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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재벌체제 개혁

촛불정국으로 드러난 시민들의 자각과 엄중한 요구에 비해 경제시스템이나 재벌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실제 조건이나 상황은 녹록지 않다. 삼성물산 합병을 도왔던 보건복지부나 공정거래위원회가 보여주었듯 거대 경제권력에 포획된 정부와 관료, 재벌체제로부터 이득을 챙겨온 기득권세력과 이재용체제를 만든 공모자들의 조직적 반발이 그런 경우이다.

  • 송원근
  • 입력 2017.02.16 10:18
  • 수정 2018.02.17 14:12

아직 우리 맘과 몸 속에 기억되어 있는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는 이른바 '87년체제'를 만들어냈다. 이 87년체제의 성격을 놓고 학계의 논쟁이 분분하지만 그것이 '민주화'에 대한 엄정한 전환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전환은 정치적 영역에 국한되었다. 87년체제 수립의 또다른 축이었던 노동자대투쟁에도 불구하고 기업규모별 임금격차와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더욱 확대되었다.

87년 개헌으로 경제민주화가 헌법(제119조 2항)에 명시되고, 출자총액제한, 상호출자금지 등 경제력집중 방지를 위한 규제책들(공정거래법 제3조)이 만들어지고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에도 1997년의 외환위기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당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장규율에 기댄 재벌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정치민주화가 점점 더 지체되고 경제민주화가 위축되면서 재벌들은 경제권력을 확대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해갔다. '재벌공화국' 이라는 냉소는 소득불평등과 양극화 심화로 더욱 증폭되었다.

시민 없는 '재벌공화국'에서 벗어나야 할 때

2012년 대선을 전후해 불거진 '갑질' 논란은 규제받지 않는, 더 정확히는 규제가 불가능해진 독점재벌들에 의한 부(富)의 독식구조, 비용의 사회화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전 국민적 열망을 담은 '경제민주화'가 다시 의제로 떠올랐으나, 재벌개혁과 관련된 의제들은 오히려 축소되고 말았다. 대선에서 승리한 박근혜정부는 이내 경제 활성화를 내세우며 경제민주화 공약을 폐기해버렸고, 경제민주화는 역주행했다.

이것은 시민들의 희생으로 얻은 민주주의를 시민 없는 정치, 시민에 의존하지 않는 개인민주주의 정치로 대체해버린 귀결이며,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또다른 모습이다. 최순실-박근혜-이재용 게이트로 진화한 탄핵정국을 이끈 2016년 촛불은 그동안 축소, 왜곡된 민주주의를 대중민주주의로 전환할 수 있는 공간을 열고 있다. 현재진행형인 이 집단동원의 광장민주주의 경험은 통제받지 않는 재벌체제로 대변되는 현재의 경제시스템 개혁―그것을 경제민주화로 부르든 재벌해체라고 부르든―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87년체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또다른 엄중한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경제민주화의 전제와 구체적 과제들

그렇다면 이같은 광장민주주의가 요구하고 있는 경제시스템 개혁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첫째, 현재와 같은 '정경유착' 혹은 '정부-재벌 간 공생' 프레임만으로는 경제시스템 전반에 대한 개혁에 충분하게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정부-재벌 관계는 박정희모델 혹은 수출주도형 발전모델이 통하던 정부-재벌 간 발전지배연합의 국가우위 단계에서 80년대 초반 공생 혹은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 재벌우위 단계를 지나 정치권력화한 재벌 우위로 발전해왔다. 따라서 헌법재판소 탄핵심리, 국정농단 특검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정경유착' 극복 차원에서만 이번 문제를 바라보는 한 그 해결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광장민주주의는 재벌 중심의 경제시스템에 대한 자유주의적 과제와 동시에 권력으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한 시민경제 형성이라는 새로운 과제의 해결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다. 거대 경제권력을 그대로 둔 채 이들과 정부 간 유착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자유주의적 개혁, 즉 시민 없는 제도개혁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 자유주의적 개혁의 시작은 권력을 이용해 시장규칙을 바꾸려 했던 탄핵정국의 주범과 공범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일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거대 경제권력을 어떻게 분할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하고 이를 실현하는 방법과 정책을 마련하는 일이 필요하다. 순환출자 금지, 제2금융권 계열사를 포함한 계열분리 명령제, 기업분할 명령제, 그리고 법원의 삼성물산 합병비율 재산정 판결이 나올 경우 합병 무효화를 요구해야 한다.

둘째, 거대권력에 대한 공적인 통제를 통한 경제시스템 개혁을 경제민주화라고 할 때, 이 경제민주화는 경제적 자유를 확대하는 것, 예를 들면 소비자주권, 주주권 강화 같은 것에 머물지 않고, 기업, 산업, 시장, 정부 등 모든 수준에서 경제주체로서 시민의 참여와 시민권력을 보장하고 실행하는 개혁구상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산업적 시민권의 회복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87년체제'로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은 하위 법률에서 부정되었고, 기업별 노조는 여러가지 한계를 보였으며, 산별교섭은 원천봉쇄되기 일쑤였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노동권 약화와 주주권 강화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따라서 종업원 추천 전문가 참여를 넘어 노동자 대표가 직접 참여하는 노동이사제와, 현행법에 규정되어 있지만 실효성 낮은 노사협의회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노동의 경영참여를 개별 기업에 국한할 필요는 없다. 즉 기업집단 수준에서도 계열사별로 최소1명 이상의 노동자대표, 일정 수 이상의 비조합원·비정규직이 존재하는 경우 이들 대표 1명씩 참여하는 그룹노사협의회나, 그룹 차원의 공동결정법을 만들어 노동의 대항력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산별노조 수준, 노사정 수준에서 노동의 협상력과 대항력을 높이는 실질적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셋째, 탄핵정국에서 국회에 입법발의된 '경제민주화법', 그리고 조기대선 가능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여러 대선후보들이 제안하고 있는 재벌개혁 관련 공약들과 같은 당장의 개혁과제들의 실현 가능성을 면밀하게 따져보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경제시스템 개혁에는 이런 당장의 개혁대안뿐 아니라 조금 더 멀리 보는 중장기적 제안과 구상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2018년 지방선거 혹은 2020년 국회의원선거를 통해 시민권이 확대되고 보장될 수 있는 경제시스템 개혁구상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참여정부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이기도 했던 분권과 자치를 중앙·지방정부 수준에서 제도화하는 것, 또 대의민주주의에 기초하여 서울시가 시행하고 있는 참여예산제도 같은 시민참여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고 시민권력 행사를 실효화하는 일이 그것이다.

정치는 시민들의 정치공동체를 형성하는 일

정부정책은 시민들에 의한 정치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며, 정치는 이를 조직화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공적 의식을 가진 시민들의 개입을 통해 시민들의 공통감을 일깨우고 공동체감각을 북돋음으로써 어떤 제도나 정책을 시행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촛불정국으로 드러난 시민들의 자각과 엄중한 요구에 비해 경제시스템이나 재벌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실제 조건이나 상황은 녹록지 않다. 삼성물산 합병을 도왔던 보건복지부나 공정거래위원회가 보여주었듯 거대 경제권력에 포획된 정부와 관료, 재벌체제로부터 이득을 챙겨온 기득권세력과 이재용체제를 만든 공모자들의 조직적 반발이 그런 경우이다. 또 재벌개혁을 '포퓰리즘'이라 하면서 권력의 통제로부터 '시장경제'를 지키고, 민족적 정서에 기대 '국부유출'을 막고, 광장의 경제민주화 요구를 '가짜 경제민주화'로 매도하는 지식인들은 어떤가? 어쩌면 파우스트의 거래에 익숙해진 우리 자신, 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삼성의 위기를 대한민국의 위기로 받아들이는 우리들이 더 문제일지 모른다. 힘들지 모르지만 이런 오류에서 벗어날 때 광장민주주의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그럴 때라야 거대권력을 쪼개고, 시장을 통제하며, 산업적 시민권이 보장되는 경제시스템 개혁의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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