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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궁에서 키우던 코끼리가 귀양을 간 이유

역사 이야기는 무한하다. 우리가 흔히 배워서 아는 이야기는 당시 상황의 1/10도 안 될 것이다. 주요한 사건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를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인과관계가 촘촘히 되어 있지도 않은데 무조건 암기해야 하거나 이해해야 하는 경우다. 역사에 흥미를 붙이기 위해서, 그리고 어렵게 느끼지 않기 위해서 실제 일어났던 일들 중 흥미로운 것들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 후 그런 사건이 일어났던 시대를 확인해 보면 자연스럽게 역사가 머릿속에 들어오게 된다. 역사책에 잘 등장하지 않는, 하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여기 있다.

1. 코끼리가 사람을 죽여 귀양을 간 적이 있다.

“…. 조선시대에 코끼리를 기른 적이 있었대. 1411년 2월 22일, 일본에서 온 사신이 태종에게 코끼리를 한 마리 바쳤거든. “일본 국왕이 나한테 코끼리를 보내 주다니, 일본으로 돌아가면 고맙게 잘 받았다고 전해 주시오.” 태종은 코끼리를 사복시에서 맡아 기르도록 했어. 사복시는 궁궐의 말과 소, 수레 등을 관리하는 관청이었지. ….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사복시에 코끼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공조전서를 지냈던 이우가 찾아왔어. 이우는 코끼리에게 다가가 놀리듯이 말했어. “네놈이 왜국에서 왔다는 코끼리로구나. 그 녀석 참 추하게 생겼네. 에이, 재수 없어, 퉤!” 이우는 코끼리는 비웃더니 코끼리를 향해 침을 뱉었어. 그러자 화가 난 코끼리가 이우를 쓰러뜨리고는 그 큰 발로 밟아 버렸어. 결국 이우는 숨을 거두고 말았지. 그 사건으로 1413년 11월 5일, 조정에서 회의가 열렸어. 코끼리가 사람을 죽인 일로 ‘코끼리 재판’이 열린 거야. 병조판서 유정현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어. “….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이니 죽일 수는 없고, 전라도의 외딴 섬으로 보냈으면 합니다. ….” 태종은 유정현의 말을 따라, 코끼리를 전라남도 순천의 장도라는 섬으로 귀양을 보냈어.”(책 ‘교실 밖 엉뚱 별난 한국사’, 신현배 글, 안지혜 그림)

이 코끼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코끼리가 유배지에서 많이 힘들어했다. 태종은 불쌍히 여겨서 육지에서 기르도록 했다. 그런데 전라도에서만 기르게 되자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아마 관리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충청도와 경상도까지 고통을 분담하기로 했는데, 충청도에서 코끼리가 또 다시 사고를 쳤다. 자기를 돌보는 노비를 발로 차 죽인 것이다. 이로써 코끼리는 다시 섬으로 귀양을 떠난다. 그리고 그 후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2. 곡식 3천 석을 바치고 양민이 된 재벌 노비가 있다.

“사노비는 다시 주인과 함께 사는 솔거노비와 주인과 떨어져 사는 외거노비가 있었어. 이중에서 외거노비는 평민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어서 개중에는 엄청난 재산을 모은 노비고 있었다고 해. 그 재산의 일부를 흉년 때 나리에 바치고 양민이 된 경우도 있었지. 그 대표적인 사람이 성종 때 충청도 진천 땅에 살았던 사노비 임복이야. 그는 곡식 1만 석을 소유한, 지금으로 치면 재벌 노비였어. 그런데 나라에 큰 흉년이 들자 곡식 2000석을 나라에 선뜻 바친 거야. 성종이 보기에 이 사람이 얼마나 기특했겠어. …. 성종은 임복을 대궐로 불러 물었지. “네 소원이 무엇이냐? ….” 임복이 대답했어. “제게는 아들 넷이 있습니다. 아들들을 양민으로 만드는 것이 소원입니다.” 성종은 임복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했어. 그러자 조정 대신들이 반대하고 나섰어. …. 그러나 성종은 대신들의 말을 듣지 않았어. “임복은 양반도 하지 못한 아름다운 선행을 한 사람이오. 그러니 당연히 상을 주어야 하지 않겠소.” 성종은 임복이 곡식 1000석을 또 바치자, 임복의 네 아들은 물론이고 임복까지 양민으로 만들어 주었어. 그 뒤 전라도 남평의 사노비 가동이 곡식 2000석을 바치고 양민으로 만들어 달라고 청했지만, 성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어. 신분 제도가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지.” (책 ‘교실 밖 엉뚱 별난 한국사’, 신현배 글, 안지혜 그림)

이렇게 탄탄하던 신분제도 조선 중기 이후 많이 약화된다. 나라의 재정이 많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납속책과 공명첩이다. 부농, 상인, 수공업자 등 돈을 제법 모든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이들은 면세와 면역을 위해 합법적으로 양반이 된다. 관직 매매, 신분 매매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이전에 노비가 양민이 된 것은 상당히 특이한 사례다. 노비의 신분으로 1만 석의 곡식을 모은 것 자체도 신기할 따름이다.

3. 임진왜란 때 조선 장수로 큰 공을 세운 일본인이 있다.

“1592년 4월,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야.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한 조선인이 찾아와서 말했어. “저는 일본군 장수 사야가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그가 장군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 박진은 사야가를 만나기로 하고 심부름꾼을 돌려보냈어. 그리고 다음 날 정오에 인적이 드문 들판에서 통역관과 함께 사야가를 만났지. 사야가는 박진에게 절을 하고는 정중하게 말했어. “저는 어려서부터 조선을 사모해 왔습니다. 조선은 동방에서 이름난 예의의 나라이고, 학문과 도덕이 깊은 군자의 나라입니다. …. 부하들과 함께 조선에 귀순하고자 하오니 저희들을 받아 주십시오.” …. 박진은 사야가와 그의 3천 군사를 받아들여 조선 군대에 편입시켰어. 그 뒤 사야가는 경주, 울산 등지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는가 하면, 정유재란 때는 의령 전투에 나가 큰 공을 세웠어. 이에 선조는 사야가에게 ‘가선대부’라는 높은 벼슬을 내리고 ‘김충선’이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지.”(책 ‘교실 밖 엉뚱 별난 한국사’, 신현배 글, 안지혜 그림)

조선을 흠모해 왔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이 명분이 없음을 지적하며 일본군 장수가 그의 부하 3천 명을 데리고 투항을 한다. 바로 사야가 이야기다. 훗날 김충선이 된 사야가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운다. 모국 군대를 잘 알았기에 큰 승리가 가능했다. 임진왜란 후에는 여진족 침략이 잦아지자 변방 근무를 자원해서 그곳에서 여러 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때도 청나라와 맞서 싸와 승리를 거두었지만, 곧 청나라에게 인조가 항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이 사는 우록촌으로 들어가 조용히 살다 숨을 거둔다. 사야가(김충선)는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조선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상상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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