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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모자를 사러 뉴욕 트럼프타워에 갔다. 잔뜩 쌓여 있는 트럼프 모자를 나만 살 수 없었다

  • 김수빈
  • 입력 2017.02.10 11:26
  • 수정 2018.02.11 14:12
ⓒAndrew Kelly / Reuters

난생 처음의 뉴욕 여행을 계획하면서 반드시 뉴욕에서 챙겨오리라 다짐했던 아이템이 하나 있었다. 바로 트럼프 모자.

트럼프의 유세마다 수백 명의 지지자가 이 모자를 쓰고 나타난다. 트럼프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조롱하는 재미에 모자를 사들인다. 트럼프 모자를 주문했다는 브랜든 마틴이라는 민주당원은 "트럼프는 마케팅의 천재다. 사람들이 무의식중에 모자에 새겨진 슬로건을 인지하게 만든다"고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말했다. (조선일보 2015년 9월 23일)

때는 트럼프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힐러리 클린턴을 격파하고 대선에서 승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16년 12월 초였다. 틀림없이 어디서나 트럼프 모자를 팔고 있을 테지.

저 이민자는 해로운 이민자다위대한 영도자들의 제스처는 다 닮나 보다

그래도 기왕 뉴욕까지 왔는데 '메이드 인 그레이트 아메리카' 정품을 사줘야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뉴욕에 당도한 다음날 바로 트럼프타워로 향했다.

트럼프타워의 정문 쪽 보도는 아예 뉴욕경찰들이 통행을 제한하고 있었다. 평소 때라면 이렇게 경비가 삼엄한 곳을 굳이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나 트럼프 모자에 대한 나의 열망은 충분히 강했다.

경찰은 바로 손짓으로 나를 제지하더니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보도를 지나갈 수 없느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트럼프타워에 가려는 건데 그것도 안되느냐고 물으니 그제서야 지나게 해준다.

4층, 5층에 있는 정원을 비롯한 트럼프타워의 일부 공간은 공공에 개방돼 있다. 뉴욕시의 규제로 건물의 층수를 추가적으로 올릴 경우 뉴욕시와 그런 내용의 합의를 해야 한다. 그런데 트럼프타워는 지난 30년 동안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아 여러 차례 벌금을 물기도 했단다.

정원에 가려고 엘레베이터 앞에 서니 양복을 입은 경비원(시크릿서비스일지도 몰랐다)이 오늘은 날씨가 안 좋아 정원이 폐쇄됐다 한다. 눈물을 머금고 오늘 트럼프타워 방문의 주목적이었던 기념품 가게로 바로 향했다.

트럼프타워 지하의 기념품점. 심지어 트럼프 향수...도 판다.

혹시 너무 인기가 많아 재고가 없는 것은 아닐까. 우려와는 달리 기념품점에는 모자 등의 각종 상품이 가득했다. 아직 이른 오전이라 그런지 점원은 상자 하나를 열고 트럼프 모자들을 꺼내고 있었다.

모자를 살 수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점원은 내가 미국 시민이냐고 반문했다. 미국 시민권자나 영주권자만 이 모자를 살 수 있단다.

나는 충격에 빠졌다. 심지어 모자를 사는 것도 America First라는 건가! 아직 대통령 취임도 하기 전인데 벌써 미국에는 차별의 폭풍이 불고 있단 말인가! 나는 이유라도 들어보려고 다시 물었다.

트럼프라는 정치인을 후원하는 상품이기 때문에 이를 구입하는 것도 정치적 기부 행위로 간주되며 따라서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갖고 있는 사람만 구입이 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처음에 점원이 나 같은 조선인에게 모자를 팔기 싫어서 둘러대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트럼프타워 로비 2층의 스타벅스에서 분노의 커피를 마시며 인터넷 선생님에게 그 말이 참말이냐고 여쭈어 보았다.

사실이었다. 그래서 캐나다 사람들도 트럼프 모자나 힐러리 클린턴 쿠션을 살 수가 없다는 게다.

미국의 연방선거관리위원회(FEC)는 선거 캠페인 가이드에서 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만일 선거 캠프가 5달러를 주고 산 티셔츠를 기부자가 20달러를 주고 구입했다면 기부자는 20달러를 기부한 것이다."

아, 그럼 시민권자인 친구에게 돈 주고 사달라고 하면 되겠네? 연방선관위는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는다. 미국 시민권자가 외국 국민이 미국 정치인에게 기부를 하는 데 매개체가 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기 때문.

트럼프타워의 로비 1층. 사진 하단에 보이는 트럼프타워의 이니셜 TT가 나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기념품점을 나가기 전에 나는 마지막으로 점원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트럼프 모자를 살 수 있는 다른 곳은 정녕 없단 말인가. 점원은 차이나타운 같은 데를 찾아봐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며칠 후 나는 차이나타운을 들러 트럼프 모자를 살펴보았지만 이미 정품을 본 나의 눈은 중국제 짝퉁을 같은 '트럼프 모자'로 인지하기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나는 트럼프 모자도 없이 쓸쓸히 귀국했다.

왜 돈도 있는데 널 살 수 없는 거니...

모자나 티셔츠 같은 물품 구매는 정치인을 후원하는 상당히 괜찮은 방법인 듯하다. 트럼프 캠프가 정확히 모자를 몇 개나 팔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트럼프 캠프가 공개한 선거 캠프 회계자료에 따르면 모자를 구입하는 데 총 320만 달러(한화 37억 원) 가량을 썼다.

트럼프 캠프가 모자를 얼마를 주고 매입했는지도 역시 알 수는 없지만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제시한 계산법을 따라보면 약 18만 개 정도 된다. 140만 달러(한화 16억 원) 가량의 순수익을 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대단한 성공이다.

한국에서도 매번 알맹이 없는 책 내서 출판기념회를 하는 대신 이런 실용적(?)인 물품 구매도 합법적인 정치적 기부로 처리해준다면 선거 캠페인이 보다 다채로워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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