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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답은 릴레이로

"세상에, 넌 정말 친절하구나."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도 그가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하나. 나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너무도 많은 도움을 받아왔어. 이제 내가 너에게 그 친절을 돌려주는 거야. 그러니 하나, 너도 여행을 하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네가 받은 친절을 그 사람에게 돌려줘." 우리는 포옹하고 헤어졌다. 나는 공항 환전소에서 극적으로 여권을 되찾았고 그날 밤 늦게 숙소로 되돌아갔지만 두 번 다시 그 청년을 보지 못했다.

  • 이옥선
  • 입력 2017.02.10 08:28
  • 수정 2018.02.11 14:12
ⓒ김하나

혼자 쿠바에 갔을 적의 일이다. 오랜 시간 걸려 도착한 멕시코 칸쿤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 다시 비행기를 갈아 타고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공항에 내리자 이미 한밤이었다.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택시를 타고 또 한참을 걸려 아바나 시내로 들어가 예약해둔 숙소를 찾아갔다.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어다 방에 내려놓고, 눈앞의 침대에 바로 쓰러져 자고 싶었지만 일단은 주인장이 요구한 여권을 보여줘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여권이 보이질 않는 거였다. 날이 별로 덥지도 않았는데 땀이 줄줄 흘렀다. 여행가방을 모조리 다 헤집었는데도 여권이 없음이 분명해졌다. 쿠바는 한국과 수교가 되지 않은 공산국가. 숙소도 국가에서 관리하는 거였고 여권 없는 여행자인 나는 호소할 영사관도 없이 바로 추방될 위기였다. 숙소 주인의 단호한 거절을 듣고 절망과 피곤함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에게,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던 금발의 통통한 여행객 청년이 다가왔다.

"사정을 들었어. 너 이름이 뭐니?"

"하나."

"하나. 반가워. (그는 자기 이름을 밝혔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내 생각엔 네 여권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은 공항이야. 그리고 이곳 주인장은 너를 묵게 하면 불법을 저지르는 게 돼. 너에겐 두 가지 길이 있어. 하나는 공항에서 여권을 되찾아서 이곳에 돌아오는 것, 또 하나는 여권이 없을 경우 너는 쿠바의 어느 숙소에도 체류할 수 없으므로 공항에서 바로 본국에 돌아가는 거야. 부디 네 여권이 공항에 있기를 바라지만, 그게 아닐 경우를 대비해서 너는 다시 여행가방을 들고 공항으로 가야 해. 너무 힘들겠다. 내가 도와줄게."

그는 내가 짐을 다시 챙기는 동안 주인에게 요청해 택시를 불러주었고, 내가 빠트린 물건이 없는지 살펴주고는 내 무거운 가방을 들고 앞장섰다. 한 블록을 걸어가 택시 타는 곳에 도착하자 나는 말했다.

"세상에, 넌 정말 친절하구나."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도 그가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하나. 나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너무도 많은 도움을 받아왔어. 이제 내가 너에게 그 친절을 돌려주는 거야. 그러니 하나, 너도 여행을 하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네가 받은 친절을 그 사람에게 돌려줘."

우리는 포옹하고 헤어졌다. 나는 공항 환전소에서 극적으로 여권을 되찾았고 그날 밤 늦게 숙소로 되돌아갔지만 두 번 다시 그 청년을 보지 못했다.

그후로도 나는 수많은 여행지에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때론 작은 보답을 할 수 있었고 감사 편지를 쓴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럴 상황이 못 되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의 빚 따위는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답은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하는 거니까.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가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보답하면 되니까. 그렇게 해야 따뜻함의 순환이 생겨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책인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에 이런 부분이 있다. 비행을 하다 리비아 사막에 추락한 생텍쥐페리와 부조종사 프레보는 몇날 며칠간 사막을 헤매며 구조를 기다리다 목이 말라 죽을 지경에 이른다. 그러다 베두인족 상인이 그들을 발견하고 물을 준다. 고개를 처박고 미친 듯이 물을 마신 그는 이렇게 서술한다.

우리를 구조해 준 그대, 리비아 사막의 아랍인이여, 그렇지만 당신은 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고 말 것이다. 그 얼굴도 생각나지 않게 되리라. 당신은 '인간'이며,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내게 나타난다. 때가 되면 이번에는 내가 모든 사람들 속에서 당신을 알아볼 것이다. 모든 내 친구와 모든 내 적들이 그대 쪽에서 내 쪽으로 걸어왔기에, 이제 나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의 적도 없어지고 만 것이다.

쿠바에서 만난 청년이여. 나는 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너의 말은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 남아, 내가 누군가에게 베푸는 친절은 너에게 보답하는 것이기도 하다.

* 이 글은 월간에세이(2016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쿠바 사진들 대방출. 2007년이었으니 꼭 10년 전이라 똑딱이 카메라도 시원찮고 보정도 안 한 것들이지만 오랜만에 보니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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