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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사라졌다

어른이 된다는 건 가혹한 형벌일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면 필연적으로 책임감을 등에 업고 살아가야 한다. 개인의 삶을 건사해야 한다는 책임감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도 점점 무거워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런 책임감을 슬며시 내려놓는다. 서서히 망가지는 세상과 자신의 일상을 분리하며 살아간다. 가끔씩은 원래 세상이 그런 것이라 합리화하기도 한다. 세상을 망친 주범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세상을 망치는데 일조한 공범이라 여기진 않는다.

  • 민용준
  • 입력 2017.02.08 11:28
  • 수정 2018.02.09 14:12

존경할 만한 어른을 찾기가 힘들다. 어른의 얼굴로, 어른의 목소리로 산다는 것이 부끄러운 시대다.

그러니까 지난 2016년 10월부터였다. 주말만 되면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광장에 모여 촛불을 켠다. 그리고 행진을 하고 구호를 외친다. 그 주변에는 단상이 있다. 자유발언대라고 부른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많은 이들이 자유발언대에 올라 자신의 생각을 논하고 외친다. 한 번은 어린 초등학생이 단상에 올라왔다. 자신이 직접 작성한 글을 읽겠다고 씩씩하게 말하던 초등학생의 말은 이랬다. "촛불집회에 와보면 학생 언니, 오빠들이 많이 보입니다. 언니, 오빠들이 공부를 팽개치고 이곳에 오는 이유는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돈 있고, 권력 있는 부모를 이길 수 없어서가 아닐까요? 어른이 돼서 그나마 좋은 직장을 얻어도 박근혜 일당과 같은 사람들 밑에서 아부해야 하는 걸 잘 아니까 그걸 바꾸려고 이곳에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시민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목에 걸리는 환호였다. 부끄러웠다. 왜 우린, 이 나라의 어른들은 초등학생도 알게 된 사실을 미리 몰랐을까. 왜 이런 사태를 방관했을까.

어른이 된다는 건 가혹한 형벌일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면 필연적으로 책임감을 등에 업고 살아가야 한다. 개인의 삶을 건사해야 한다는 책임감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도 점점 무거워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런 책임감을 슬며시 내려놓는다. 서서히 망가지는 세상과 자신의 일상을 분리하며 살아간다. 가끔씩은 원래 세상이 그런 것이라 합리화하기도 한다. 세상을 망친 주범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세상을 망치는데 일조한 공범이라 여기진 않는다. 무능한 정치에 무심하고, 개인의 비극을 관망하는 제도와 공권력 앞에서 분노하지 않는다. 그러니 특별히 반성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종종 되레 그런 목소리 앞에서 역정을 낸다. 불합리에 저항하고자 하는 목소리나 일방적인 제도권에 맞서는 태도를 유별나다고 규정했다.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삶에 익숙해졌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엄격한 규율로 유명한 명문학교 웰튼고등학교의 특별한 사제지간을 그린 영화다. 웰튼고등학교 출신의 신임 영어교사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은 파격적인 수업을 진행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수학 공식 같은 규칙에 대입해 시를 평가하도록 명시한 교과서의 도입부를 찢어버리라 명한다. 망설이던 학생들은 점차 과감하게 책을 찢어버린다. 그리고 시를 음미하라고 한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을 즐기라 권한다. 주체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만의 안목을 키워 세상을 재단하길 권한다. 그러자 그를 추종하는 학생들도 생겨난다. 그리고 키팅이 웰튼고등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비밀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추종자들은 키팅이 참여했다던 죽은 시인의 사회를 재결성한다.

비밀 조직이라 하니 무법적인 일탈이라도 도모할 것 같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는 시의 정수를 발견하고자 하는 모임이었다. 한밤 중에 기숙사에서 빠져나와 학교 인근의 동굴에 모인 어린 학생들은 시를 읊으며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낭만에 취했다. 교과서가 인정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운율을 지녔다고 여겨지는 시를 탐닉하며 이를 통해 삶의 가치를 논했다. 그것만으로도 소년들에겐 대단한 일탈이었다. 이를 통해 어떤 소년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었고, 자신들이 포기하려 했던 삶을 다시 꿈꿀 수 있는 용기마저 얻게 된다. 특히 누구보다도 키팅을 따르는 닐(로버트 숀 레오나드)은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강요로 인해 억누르고 있던 꿈을 되살린다.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다시 불사른다. 그리고 아버지 몰래 극단에 가입하고 무대에 오를 준비를 마친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들이 연극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학교를 찾아와 아들에게 무대에 오르지 말라 명한다. 하지만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속이고 무대에 오른다. 훌륭한 연기로 객석을 매료시킨다. 아버지 역시 객석에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주길, 내심 기대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끔찍한 명령을 내린다. 지금의 학교에서 나와 보다 엄격한 사관학교로 입학하라고. 결국 절망한 아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니까 결국 아버지의 꿈이 아들의 꿈과 숨을 모두 끊었다. 아버지는 이 모든 사태가 아들에게 헛바람을 불어넣은 키팅의 탓이라 여기고 학교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학교는 일방적인 조사 끝에 키팅에게 책임을 묻고 그를 해임한다. 그리고 키팅이 학교를 떠나는 날, 이런 조치에 침묵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학생들은 교실을 떠나는 그를 향해 외치며 책상 위로 일어선다. "오, 캡틴! 마이 캡틴!"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른 학생들도 따라 책상 위로 올라선다. 교장은 격분해 처벌하겠다 협박하지만 학생들의 마음엔 불이 붙었다.

"어떤 사실을 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다른 시각에서도 봐야 해! 바보 같은 일일지라도 시도를 해봐야 한다고." 키팅은 학생들에게 책상 위에 올라서서 세상을 내려다 보라며 이와 같이 말했다. 그는 어른들의 권위에 탑승해 학생들을 지배하는 손쉬운 방식을 선택하는 대신, 학생들의 눈높이를 맞추고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단단한 가치관과 주체적인 시각을 갖길 권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여전히 감동적인 작품으로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어느 시대에나 어른들은 권위를 앞세워 젊은 세대를 훈육하려 들고, 가만히 있으라 명한다. 그러면서도 세상이 망가지는 것에는 어쩔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며 비겁하게 방관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은 어른으로서의 자격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다. 모든 관객이 키팅의 책상 위에 올라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바보처럼 보이는 시도를 통해서라도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어른의 용기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한 번은 광장의 자유발언대에 한 할머니가 올라왔다. 충청도에서 올라왔다는 그 할머니는 "너무나 부끄럽고 미안해서 광장에 나왔다"라고, "우리 늙은이들이 반성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직도 주변에는 대통령이 뭘 잘못했냐고 하는 늙은이들이 있어요. 우리 늙은이들이 정신 차려야 됩니다! 우리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할머니가 외칠 때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할머니!'를 연호했다. 올해 목격한, 가장 뜨거운 순간 중 하나였다. 어른이 된다는 건 역시나 가혹한 일이다. 어른이라 불리는 순간, 필연적으로 책임감을 등에 업게 된다. 개인적인 삶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물론,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존재가 됐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선택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책임감을 느끼는 어른은 결국 반성하게 돼있다.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어른들은 되레 시대를 탓하고, 젊은이들을 탓하며 고약하게 늙어간다. 반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랜 토리노>는 반성하는 어른이 남긴 숭고한 유산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제목인 '그랜 토리노'는 1972년에 포드사에서 제조한 고급형 자동차의 이름이다.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철저하게 관리해온 덕분에 새 차처럼 완벽한 그랜 토리노를 통해 지난 일생을 되새긴다. 그래서 그는 젊은 세대에게 관대해지기 힘들다. 지금껏 자신이 일구고 쌓아온 전통과 역사를 그들이 무너뜨리는 것만 같다. 이웃에 사는, 이름을 발음하기도 힘든 동양인들도 매한가지다. 하지만 거기서 그는 의외의 희망을 발견한다. 우연한 계기로 옆집의 동양인 가족과 인연을 맺게 된 그는 한 소년을 주목하게 된다. 타오(비 방)라는 소년은 착한 품성과 성실한 기질을 갖고 있지만 가난한 이방인인 탓에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기 어렵다. 게다가 갱단에 가입하라는 협박까지 받고 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월트는 소년의 사정을 외면할 수 없게 된다.

월트는 타오가 정직한 일을 통해 미래를 건설할 수 있도록 조력한다. 자신을 고약한 늙은이로 여기는 아들 내외보다도 더욱 아들 같은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타오에게 가해지는 갱단의 협박과 폭력이 날로 만만찮다. 그래서 월트는 결심한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수많은 살육을 저질렀고, 목격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살육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그 가운데서 자신이 절망하던 세상에 일말의 빛이 되고 소금 같은 존재가 될 소년을 만났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확신한 희망을 보존하기 위해 이미 더럽혀진 영혼을 지닌 스스로를 제물 삼아 절망의 뿌리를 뽑기로 결심한다. 자신이 지킬 만하다고 여겨지는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걸고, 기꺼이 내놓는다. 그럼으로써 월트는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회개한다. 그리고 그토록 아끼던 그랜 토리노를 타오에게 남김으로써 빛나는 전통에 새로운 세대를 태우고 시대를 나아가도록 만든다. 진정한 어른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우린 요즘 매일 같이 어른들의 탈을 쓴 얼굴을 마주했다. 국정 농단에 관한 국회 청문회장에서 질문을 받는 정재계 인사들은 앵무새처럼 죄송하다는 발음을 반복하지만 성실한 반성의 태도를 보여주진 않았다. 대한민국의 권력을 쥐고 있다는 어른들의 민낯이 이토록 부끄러운 건 그들도, 우리도, 반성하는 법을 잊어버린 어른이 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잊어선 안 된다. 그 부끄러운 얼굴들을. 책임질 줄 아는 어른이 없다는, 이 치욕적인 시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장을 메우는 어린 세대들의 낭랑한 외침에서 희망을 본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깨달아야 한다. 어른의 목소리로 반성하고, 어른의 얼굴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최소한 부끄럽다는 것을 안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더 셀러브리티] 매거진에 게재된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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