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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나빠질수록 기뻐하는 사람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 지지가 임기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두 정권이 집권하는 동안 그는 실정이 있을 때마다 기뻐했다. 파병, FTA, 노동유연화 정책 같은 것에 반발이 일어날 때면 "그것 봐! 내가 그럴 거라고 했지! 지지했던 놈들 다 반성이나 하나?!" 하며 조금씩 신나했다. 먼저 알아본 자신의 선구안과 근본까지 꿰뚫어보는 심미안(?)을 은근히 과시하면서. 몇 차례 그런 장면을 보다가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게 세상이 좋아지는 건가요, 당신의 적이 실패하는 건가요? 당신은 세상의 변화를 위해 신념을 내걸고 운동하는 사람인데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면서 세상이 나빠진 일에 왜 기뻐하나요?"

  • 이선옥
  • 입력 2017.02.08 06:53
  • 수정 2018.02.09 14:12
ⓒallou via Getty Images

미국 대선을 앞두고 슬라보예 지젝은 트럼프 지지선언을 했다. 트럼프가 당선되는 상황이 가져 올 피해보다 그 반대의 이득이 더 크다는 주장이었다. 한 기사에 따르면 그는 "트럼프가 이긴다 해도 미국이 독재국가가 되지는 않을 것이고 트럼프는 파시즘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그의 승리는 아주 큰 깨어남을 가져와 새로운 정치 프로세스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젝은 힐러리가 금융마피아 같은 세력들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진보적인 후보로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경우는 우리한테도 많다. 내가 아는 유명한 노조지도자는 대공장노조 선거에서 민주노조가 몇 차례 패한 후 "어용이 집권해서 조합원들이 쓴 맛을 한 번 봐야 한다. 지금은 민주노조라고 해도 닳고 닳아서 어용이랑 차이도 없는데 헷갈리게만 한다"며 차라리 어용집행부의 당선을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 조합원들이 정신을 차릴 거라는 이유에서다.

참여정부에서 고위관료를 지낸 정치인이 어떤 모임에 왔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무현 지지자들이었고, 꽤 유명한 그를 무척 반겼다. 그도 참여정부 때의 비화들, 지근거리에서 모신 노무현 대통령 얘기, 요즘 근황 등을 떠들며 자신에게 집중된 자리를 유쾌하게 즐겼다. 그 때는 이완구 총리후보 청문회 이슈가 한창이던 시기라 자기가 관료시절 만난 이완구 얘기도 많이 했다.

한마디로 진짜 함량미달인 사람이라는 일화들이었다. 한 분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이완구 같은 사람이 통과되면 어떡하죠? 이 나라의 미래가 진짜 깜깜해요."

그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뇨! 통과되어야 합니다. 이완구가 통과되는 게 좋아요. 그래야 국민들이 더 뼈저리게 깨닫죠. 이완구는 총리가 되는 순간부터 좌충우돌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 겁니다. 바닥까지 망가져봐야 다시 우리한테 기회가 와요."

사람들은 아하! 그렇군요, 그걸 몰랐네, 하며 웃었고, 구석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던 나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은 노동자 정치운동과 정당운동을 열심히 했다. 삶이 온통 그 운동이었다. 철저한 계급주의자인 그는 김대중과 노무현을 싫어했다. 그는 저 위 지젝과 똑같은 말을 했다. "그들은 자본가와 한 뿌리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진보적인 후보로 보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실제로는 이명박근혜보다 더 위험한 존재들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 지지가 임기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두 정권이 집권하는 동안 그는 실정이 있을 때마다 기뻐했다. 파병, FTA, 노동유연화 정책 같은 것에 반발이 일어날 때면 "그것 봐! 내가 그럴 거라고 했지! 지지했던 놈들 다 반성이나 하나?!" 하며 조금씩 신나했다. 먼저 알아본 자신의 선구안과 근본까지 꿰뚫어보는 심미안(?)을 은근히 과시하면서. 몇 차례 그런 장면을 보다가 나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게 세상이 좋아지는 건가요, 당신의 적이 실패하는 건가요? 당신은 세상의 변화를 위해 신념을 내걸고 운동하는 사람인데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면서 세상이 나빠진 일에 왜 기뻐하나요?"

나는 그와 그 동료들(상당수 내 동료이기도 한)의 그런 태도에 피로감을 느꼈다.

"집권을 원한다면 남들 앞에서 그런 태도를 안 보이는 게 필요하지 않나요? 나는 어떤 사람이고, 이런저런 세상을 만들겠다는 말보다, 쟤는 나쁜 놈이고 그러니 나를 찍어달라는 말은 별로 설득력도 없고 옳다고 보지 않아요. 그리고 그런다고 해서 당신을 찍어줄 거 같지도 않구요. 세상이 나빠진 것에 대한 슬픔보다 내 말이 맞았다는 기쁨이 더 커 보이는 사람은 정치인으로도, 운동가로도 매력이 없죠. 정적이라 해도 잘한 일에 대해서는 인정해 주고, 못한 일은 비판하고, 나라면 이렇게 하겠다 비전을 보여주면서 결국 내(우리)가 바라는 건 나(우리편)의 성공이 아니라 세상의 진보와 변화다, 라는 메시지를 주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보여주는 게 필요해요."

그는 자신의 태도를 좀 더 다듬는 게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고 약간 조심하는 사람이 되었다.(여전히 계급주의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나는 그의 일관된 삶을 존중한다)

선명한 선에게 최적의 파트너는 선명한 악이다. 애매한 악일 경우 근본적인 악함을 뚫어보는 사람들한테 그러지 못한 민중은 우매하고 답답한 존재가 된다. 자신들의 옳음을 입증해야 하는데 선명한 잘못을 하지는 않기 때문에 답답해 하다가 자책이나 자충수가 나오면 기뻐한다. '민중'의 삶이 나빠져도 나의 쾌락지수는 올라가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한국의 현대사는 대부분 민주개혁세력이 잘해서라기보다 기득권세력이 헛발질했을 때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했느냐의 차이로 실패와 성공이 갈렸다. 신념, 책임, 비전 같은 긍정적인 토양이 자라기 힘든 환경이었다. 자신들의 신념과 비전보다는 상대의 실책과 악함에 기대 연명하는 운동은 선명하되 앙상한 깃발로 남는다. 깃발의 선명함을 지키기 위해 상처받는 사람은 많아진다. 그렇게 떠난 마음들은 갈 곳을 모르고 방황하다 때론 뒤틀린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저주와 회한마저 이젠 그들의 깃발만큼 앙상하다.

얼마 전 이재용의 영장이 기각된 후 한 운동단체의 성명서를 받았다.

"조의연을 구속하고 사법부를 해체하라!"

누구의 삶도 구체적으로 책임질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아무말을 보면서 다시 피로함을 느낀다. 왕관을 쓴 자만이 무게를 견딜 의무가 있는 게 아니다. 깃발을 든 자, 제발 말의 무게를 직시해라.

* 이 글은 필자의 홈페이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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