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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 남성들에 대한 멜로드라마틱한 재현을 거부하는 '문라이트'가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인 이유

  • 김도훈
  • 입력 2017.02.06 10:50
  • 수정 2017.02.23 11:35

“누가 호모야? 내가 호모인가?” 스스로를 발견해 가는 소년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진솔하고 가슴아픈 질문이 이것 아닐까.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 주인공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배리 젠킨스 감독의 ‘문라이트’(2016)에서 리틀은 마이애미의 거친 동네 리버티 시티에서 자라나며 괴롭힘, 빈곤, 결손 가정, 자기 정체성,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민을 한다.

그의 이야기는 세 챕터에 걸쳐 전개된다. 사춘기 전에는 리틀, 십대 때는 샤이론, 어른이 되어서는 블랙이다. 배리 젠킨스와 터렐 앨빈 맥크레이니의 실제 경험에 기반한 픽션이다. 맥크레이니는 이 영화의 원작인 2003년 연극 ‘달빛 아래서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In the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를 썼다. 리틀, 샤이론, 블랙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준 젠킨스와 맥크레이니는 굉장히 개인적이며 일방적인 판단을 피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골든 글로브 작품상을 받았으며, 아카데미 상에서도 상을 받을지 주목되고 있다.

‘다르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괴롭힘을 받아야 했던 모든 리틀 같은 사람들에게 ‘문라이트’는 옛 상처를 다시 아프게 만들지도 모르지만 한편 치유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문라이트’는 지금 리틀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조건을 나아지게 할 여지를 열어준다. 젠킨스가 영화를 통해 설교를 하려 했다거나, 도덕적 교훈을 담으려 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처한 상황을 담담히 보여 줄 뿐이다.

뉴욕 타임스의 웨슬리 모리스와 제나 워섬은 흑인 남성이 등장하는 영화치고는 드문 사례라고 지적한다. 알렉스 R. 히버트가 연기하는 리틀이 첫 장면에서 괴롭히는 아이들을 피해 빈 건물에 숨을 때, 우리는 그에게 공감을 하면서도 후안(메허샬레하쉬바즈 엘리)이 그를 찾아내고 약간은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될 때 완전히 측은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샤이론(애쉬튼 샌더스)이 등장하면서 괴롭힘은 심해지고, 샤이론은 마침내 복수를 하게 된다. 그때도 샤이론은 무력한 피해자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후에 등장하는 블랙(트레반테 로데스)는 아직 괴로워하는 페르소나이긴 하지만 보다 안정된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생존자다. 학교 괴롭힘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를 가르쳐 주기보다, 젠킨스는 샤이론을 심판하기보다는 샤이론의 인간적 반응을 보여 줄 뿐이다. 그리고 그의 보다 나은 성인의 삶으로 시선을 옮김으로써 미묘하게 희망과 새로운 시작을 격려한다.

젠킨스는 불리한 입장에 처한 게이 남성들에 대한 전형적인 멜로드라마틱한 재현을 거부함으로써 아감, 남성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문제를 겪은 모든 리틀, 샤이론, 블랙들에게 이 영화는 괜찮다, 너는 정상이다, 너는 계속 성장하고 변화한다고 넌지시 말하는 것 같다. 샤이론은 자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운이 나빴지만, 그는 자신의 분노와 걱정을 잠재운다. 애쉬튼 샌더스는 늘 긴장한 표정(보더라인 분노)으로 이를 잘 담아낸다. 그는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방법도 모르는 젊은 남성이지만 이 영화의 가장 도발적인 장면에서 감사를 느낀다. 가장 친한 남자 친구 케빈(자렐 제롬)과 함께 달빛 아래 해변에서 죄책감이 동반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장면이다. 이것이 자신이 게이라는 확인이기 때문에 그가 충격을 받지는 않는다. 그는 경이로움을 느껴 미소를 짓는다.

보수적인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이 부분을 가장 불편해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케빈은 후회, 자기 증오, 수치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성인으로서 재회하고, 그 이야기를 하고, 똑같이 로맨틱하게 서로를 포용한다. 젠킨스의 이 걸작이 아름다운 것은 이 지점이다. 모든 리틀, 샤이론, 블랙에게 이 영화는 어딘가 너를 위한 케빈이 있다고 말해준다. 가장 친한 흑인 남자 친구가 연인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뒤틀린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예술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진실을 표현할 뿐이다.

가난한 동네에서 마약 중독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던, 또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 모든 리틀과 샤이론에게 ‘문라이트’는 당신은 사랑받고 있으며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을 넌지시 건넨다. 샤이론은 어렸을 때 가장 힘들었던 시절 ‘새 가족’을 만난다. 후안과 후안의 여자 친구가 그의 삶에 개입해 그의 삶을 낫게 만들어 준다. 샤이론의 어머니인 폴라(나오미 해리스)를 비난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전적으로 미워할 수는 없다. 그녀의 힘든 삶 역시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무책임한 어머니이긴 하지만 자신의 상황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크랙 코카인은 그녀를 파괴하지만, 혼자서 흑인 게이 남자 아이를 키우는 그녀의 현실에 가장 빠르고 편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그녀와 샤이론이 화해하는 장면은 아마 가장 감동적인 장면일 것이다. 여기서 두 사람은 울며 포옹한다. 폴라는 어머니로서 실패했다고 털어놓으며 용서를 빈다. 샤이론은 폴라를 용서한다. 젠킨스가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이 아닐까. 아무리 괴롭다 해도 과거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우리를 괴롭게 한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눈물은 자유로워짐의 상징이다. 샤이론 자신도 마약 딜러가 되긴 하지만 – 사회가 얼마나 개인을 형성하는지를 보여준다 – 그는 적어도 예전보다는 나은 위치가 된다. 젠킨스는 모든 걸 회색으로 보지는 않고, 다른 리틀, 샤이론, 블랙들도 자신의 비젼을 추구할 수 있다.

뉴욕 타임스의 A. O. 스콧은 '문라이트는 올해 최고의 영화인가?'라는 리뷰에서 ‘문라이트’가 “흑인의 몸의 존엄, 아름다움, 끔찍한 취약성, 흑인들의 삶의 실존적이며 육체적 문제에 대한” 영화라 정말 시기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리틀, 샤이론, 블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지만 그가 겪는 이슈들에 공감할 수 있는 모든 아프리카 출신 남성들을 반영한다. 화면에서 자기 자신이 반영된 모습을 보았을 때 자신이 진공 속에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괴로움과 경험이 인종의 맥락에서 더욱 정당하고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게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고, 논의의 대상이 된다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영화의 힘이다.

백인이나 다른 인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게이 영화는 흑인 남성 관객을 소외시키는 경우가 많다. 공통점이 있다 해도 인종과 사회에 따라 경험은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흑인 남성 관객들에게 샤이론이란 캐릭터는 굉장히 개인적이며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진정함을 지닌 캐릭터로 다가갈 것이다. 지금은 모든 리틀, 샤이론, 블랙을 위한 시대다. ‘문라이트’는 흑인 게이 남성의 경험을 담아내는 올바른 방향을 취했다.

허핑턴포스트US의 For Every Little, Chiron, Black of “Moonlight”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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