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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퇴문을 읽으며 | 정치의 아마추어리즘

한 정치인의 "됨됨이"나 그릇은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만큼이나 어떤 자리에서 물러날 때 드러난다. 그점에서 반씨의 퇴임사는 얼마전 대선 경쟁에서 물러난 모 시장의 그것과도 비교된다. 한 사람은 경쟁에서 물러나면서도 남 탓을 한다. 다른 사람은 자기 탓을 한다. 그들의 속마음이나 "진면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민들은 남 탓하는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점에서 반씨는 물러나는 순간까지도 큰 정치적 실책을 했다. 자신이 정치적 아마추어에 불과하다는 걸 대중에게 여실히 드러냈다.

  • 오길영
  • 입력 2017.02.02 13:08
  • 수정 2018.02.03 14:12
ⓒ뉴스1

반씨의 사퇴문을 읽었다. 이런 표현이 눈에 띈다. "순수한 애국심, 이기주의적 태도, 순수한 뜻, 목전 이익에 급급, 국민대통합. 인격살해" 운운. 언뜻 보면 지당한 말씀이다. 이런 '좋은 말'을 읽으며 정치인의 덕목을 다시 생각한다. 결론을 당겨 말하자. 반씨가 정치를 그만 둔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나 정치판을 위해서나 다행이다. 주관적 선의를 대중에게 믿어달라고 말하는 이들은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 아래 마키아벨리의 언급처럼, 정치인은 때로 "동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싸워야 한다."

 

나는 정치인의 기질은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왔다. 이건 가치판단이 아니라 사실판단이다. 정치인의 기질이 옳으냐, 그르냐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좋은 정치인이 되기 위해 '사실'적으로 필요한 덕목이 문제다. 한 사적 개인으로서 어떤 정치인이 "인간"적으로 "순수"(sic!)하고 "이기적"이지 않은 건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런 말들은 정치판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런 구분은 문학장에도 적용된다. 사적 개인으로서 작가가 "순수"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작가의 작품이 그저 "순수"하기만 하다면 그건 치명적인 결격사유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작가들이 있다. 내가 "순수"한 작가나 시인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다.) 정치인은 인간적인 면모와 동물의 기질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 아무나 정치인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자기는 "순수"한데, 남들이 그런 "순수한 애국심"을 몰라줘서 정치를 못하겠다는 말은, 적어도 "동물"의 덕목이 지배하는 정치판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유치한 말이고 행동이다. 마키아벨리의 지적대로, 정치인이 실제로 "자비롭고 신의가 있고 정직하고 인간적이고 신실"할 필요는 없다. 물론 실제로도 그렇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실제가 어떻든(그리고 대중은 정치인의 실제 모습에는 별관심이 없다) 정치인은 그렇게 대중에게 보여야 한다.

 

사실이 중요하게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게 중요하다. 나이브한 정치인들이나 정치평론가들은 이미지가 중요하지 않고 실제 모습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정치에서는 대중에게 보이는 이미지, 말과 몸짓, 행동이 곧 현실이다. 외양이 곧 본질이다. 어떤 정치인의 "순수한" 속마음과 '선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종종 대중들은 정치인의 위선을 욕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위선이 정치의 필수적 덕목이라는 걸 밝힌 게 근대 정치이론의 시조인 마키아벨리의 핵심 공로다. 이런 '진실'을 밝혔기에 마키아벨리즘은 종종 무자비한 정치현실주의로 오해되지만.

 

반씨의 퇴임사를 읽으며 떠오른 말. "누구나 거의 다 역경을 견디어 낼 수는 있지만, 한 인간의 됨됨이를 정말 시험해 보려거든 그에게 권력을 줘 보라."(링컨) 한 정치인의 "됨됨이"나 그릇은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만큼이나 어떤 자리에서 물러날 때 드러난다. 그점에서 반씨의 퇴임사는 얼마전 대선 경쟁에서 물러난 모 시장의 그것과도 비교된다.(특정 정치인을 지지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비평가로서 두 사람이 내놓은 '텍스트' 분석을 하는 것뿐이다.)

 

한 사람은 경쟁에서 물러나면서도 남 탓을 한다. 다른 사람은 자기 탓을 한다. 그들의 속마음이나 "진면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민들은 남 탓하는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점에서 반씨는 물러나는 순간까지도 큰 정치적 실책을 했다. 자신이 정치적 아마추어에 불과하다는 걸 대중에게 여실히 드러냈다. 아무리 마음이 쓰라리고 힘들어도, 정치인은 물러나는 순간에도 "자비롭고 신의가 있고 정직하고 인간적이고 신실"하게 대중에게 보여야 한다. 남탓을 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그런 "신실"한 이미지를 대중의 마음과 기억에 남겨야 한다. 그래야 재기의 기회가 있다. 반씨는 그런 기회를 날렸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다. 반씨에게, 그리고 "순수한 애국심"을 주장하는 정치의 아마추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키아벨리의 말들이다.

 

 

- 따라서 예컨대 자비롭고 신의가 있고 인간적이고 정직하고 경건한(종교적인) 것처럽 보이는 것이 좋고, 또한 실제로 그런 것이 좋다. 그러나 달리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면, 당신은 정반대로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렇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군주론〉)

 

- 다수는 외양에 따라서 판단한다

현명한 군주는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앞에서 이야기한 다섯 가지의 성품들로 가득차 있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를 견문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지극히 자비롭고 신의가 있고 정직하고 인간적이고 신실한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리고 이중에서도 특히 신실한 것처럼 보여야 한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으로 만져보고 판단하기보다는 눈으로 보고 판단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볼 수는 있지만, 당신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볼 수 있는 반면에 당신의 진면목에 대해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 군주는 동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싸워야 한다. 그렇다면 싸움에는 두 가지 방도가 있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법률에 의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힘에 의거한 것이다. 첫째 방도는 인간에게 합당한 것이고, 둘째 방도는 짐승에게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전자로는 종종 불충분하기 때문에 , 후자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군주는 모름지기 인간에게 합당한 방도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짐승을 모방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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