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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잠'과 '톰 앤 제리의 법칙'

코미디나 풍자의 웃음은 약한 자가 저보다 막강한 자를 괴롭히고 골탕 먹이는 힘의 격차에서 발생한다. 만일 그 관계가 역전되면 코미디가 아니라 아무 재미가 없거나 공포물이 될 것이다. '더러운 잠'은 애초에 소재 선정이 좋지 않았다. 이미 박근혜 스스로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추락할 대로 추락한 마당에 더 이상 풍자할 것이 남아 있지 조차 않다. 수개월 전에 '더러운 잠'이 발표되었다면 세련되지는 못하나 용감하다는 평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 이미혜
  • 입력 2017.02.02 11:09
  • 수정 2018.02.03 14:12

1. 톰 앤 제리의 법칙

코미디나 풍자의 웃음은 약한 자가 저보다 막강한 자를 괴롭히고 골탕 먹이는 힘의 격차에서 발생한다. 만일 그 관계가 역전되면 코미디가 아니라 아무 재미가 없거나 공포물이 될 것이다. 고양이 톰이 생쥐 제리를, 시커먼 도둑이 집에 나 홀로 남은 꼬마를 괴롭히는 일을 상상해보면 된다.

'더러운 잠'은 애초에 소재 선정이 좋지 않았다. 이미 박근혜 스스로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추락할 대로 추락한 마당에 더 이상 풍자할 것이 남아 있지조차 않다. 어떤 재기발랄한 예술가가 '길라임'이상으로 신선한 풍자를 고안해낼 수 있을 것인가? 수개월 전에 '더러운 잠'이 발표되었다면 세련되지는 못하나 용감하다는 평이라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2. 성차별주의

아래 그림은 18세기 영국의 풍자화가 토머스 로랜슨이 휘그당 실력자인 찰스 제임스 폭스를 헨리 퓨슬리의 그림을 이용해 조롱한 만평이다. 남성을 대상으로 하면 이런 식의 풍자가 먹히지만 똑같은 상황을 여성에 적용하면 성희롱으로 받아들여질 확률이 높다.

토머스 로랜슨Thomas Rowlandson, 「코벤트 가든의 악몽」, 1784년

풍자화가인 로랜슨이 휘그당의 실력자인 찰스 제임스 폭스를 누드로 묘사한 단색 판화. 폭스는 노름을 좋아했던 모양으로 발치의 테이블에 주사위가 놓여 있다.

헨리 퓨슬리 Henry Fuseli, 「악몽」, 1790-1년 (77 x 64 cm, 괴테 하우스, 프랑크푸르트)

왜냐? 성을 이용해 풍자할 때도 힘의 격차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까지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겨져 왔다. 남녀가 동등하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하게 되고, 현실은 받쳐주지 못하지만 개념상으로나마 남녀평등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최근 수십 년 간의 일에 불과하다. 예술사에서 누드는 거의 모두 남성 예술가가 남성 관객을 위해 만든 것으로 '남성적 시선'을 포함하고 있다. 여성 누드는 에로틱한 엿보기의 대상인 반면 남성 누드는 힘과 비장함, 인간적인 위엄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

남성 권력자(강한 성/강한 힘)를 여성 누드로 치환하면 남을 웃길 수 있다. 폼 잡는 꼰대를 망가뜨렸는데 신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여성 권력자(약한 성/강한 힘)는 모순적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성적 풍자에 적합한 대상이 아니다. 여성 누드 작품을 가져다가 여성을 그 자리에 놓았을 뿐인데 참신함이나 재미가 있겠는가? 여전히 에로틱한 엿보기의 도구가 될 뿐이고 성희롱 논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내 개인적 소신을 덧붙이면 성희롱이냐 아니냐가 문제될 때는 피해자의 판단을 따르는 게 맞다. 그것을 당한 사람이나 당한 쪽이 성희롱이라고 하면 성희롱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재미없는 작품도 쌔고 쌨고, 거기 포함된 내용이나 소재, 표현방식 등이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작품도 쌔고 쌨다. 작품의 질에 대해서는 비평이 가능하고 서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다(이런 의견은 많이 교환할수록 좋다). 작품이 어떤 집단을 모욕하고 불쾌한 감정을 주었다면 이를 비난할 수 있고, 치워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화와 논리로 이를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의 작품을 훼손하는 것은 명백한 재산권 침해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전시에 관여한 표창원 의원을 사퇴하라고 집단 피케팅을 하고 목청을 높이는 것도 순 억지라고밖에 볼 수 없다. 표창원 의원은 이것을 그린 사람도 아니고, 예술전문가도 아니다. 그 전시회는 그것을 조직한 기획자와 스텝이 따로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항의하고 얘기해서 전시 장소를 이동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얼마든지 좋게 해결 가능한 일이었다.

새누리당은 공연한 남의 트집을 잡고 인신공격을 하기 이전에 성누리당 또는 색누리당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고 있는 자신들이나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자기들 마음에 안 들면 무조건 쓸어버리고, 싹을 싹둑 잘라야겠다는 발상이야말로 오늘날 박근혜와 그녀를 주군처럼 모시던 새누리당의 총체적 파탄을 가져온 것이 아니겠는가? 표 의원님은 당분간 괴롭겠지만 의연하게 버티시기 바란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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