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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취임사에 부쳐

외교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이 '미스터 불확실성'(Mr. Uncertainty)은 다른 국가들의 대외정책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부여하고 있다. '고립주의'가 트럼프의 대외정책을 담아내는 키워드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와 왜곡의 함정이 놓여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민주주의, 자유무역, 평화, 인권, 환경 같은 원칙이 아니라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만 좇겠다는 점에서만 고립일 뿐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미국의 이익이 걸린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입할뿐더러 체면도 불사하고 난폭해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 김준형
  • 입력 2017.01.26 10:46
  • 수정 2018.01.27 14:12
ⓒKevin Lamarque / Reuters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 1월 20일 정오를 기해 취임사와 함께 미합중국의 제45대 대통령으로 출발했다. 그에게서 남북전쟁 직후 관용과 화합을 주창했던 링컨의 연설이나, 대공황의 한가운데서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던 루즈벨트의 연설을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국민을 품어야 할 대통령의 취임사와는 거리가 먼, 여전히 상대를 제압하려는 선거유세의 연장이었다. 화해나 통합을 향한 호소는 시쳇말로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없었다. '하나의 미국'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와 지지자들만이 하나라는 것처럼 들렸다.

트럼프의 16분에 담긴 불안한 메시지

16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연설은 선거캠페인에서 했던 발언들을 모아놓은 것이었으며, 트럼프가 처음부터 끝까지 분열로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임을 확인해주었다. 뉴욕 부동산시장에서의 숱한 상거래로 잔뼈가 굵은 그의 세계관에는 둘 모두 이기거나 둘 모두 지는 경우란 없다. 반드시 적군과 아군으로 나뉘고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이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승리만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워싱턴의 기성 정치인들이나 관료, 주류 언론, 그리고 이민자들까지도 타도와 배제의 대상일 뿐이었다. 자신의 취임이 행정부나 정당의 정권교체가 아니라 기득권으로부터 국민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일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권력을 돌려받아야 할 주체는 국민 전체가 아니라 기성 정치세력과 이민자들로부터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잊혀져버린' 백인들로 한정된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제일주의를 부르짖은 반면 세계를 이끄는 리더십은 단호하게 거부하겠다는 뜻도 재확인했다. 동맹국들에 대해서도 파트너가 아니라 미국에 책임을 떠넘기며 이용해왔다고 비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미국이 주도하며 이득을 챙겨왔음에도 불구하고 전적인 희생자나 피해자로 묘사한 것은 그동안 미국이 보여준 리더십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차치하고, 거짓과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선거캠페인의 조각들을 끌어모아 재구성한 연설문은 그의 단호한 실천의지를 보여주긴 했지만, 거기에서 낙관과 희망, 그리고 배려와 치유는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8년 동안 미국의 경제여건이 조금씩 호전되고 있고 범죄율도 감소하고 있지만 자신의 주장과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현실을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규정해야 했다. 미국이 좋아진다면 자기 덕분인 것이고, 나빠진다면 적들 때문이어야 한다.

헨리 키신저는 트럼프를 두고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으로서 다른 국가들에는 충격적인 경험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람들의 좌절과 분노를 자극해 권력을 잡은 트럼프는 키신저의 말대로 '촉'과 '감'을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외교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이 '미스터 불확실성'(Mr. Uncertainty)은 다른 국가들의 대외정책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부여하고 있다. '고립주의'가 트럼프의 대외정책을 담아내는 키워드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와 왜곡의 함정이 놓여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민주주의, 자유무역, 평화, 인권, 환경 같은 원칙이 아니라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만 좇겠다는 점에서만 고립일 뿐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미국의 이익이 걸린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입할뿐더러 체면도 불사하고 난폭해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는 일방주의 외교로 전세계의 지탄을 한 몸에 받았던 조지 W. 부시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둘은 또 다르다. 부시의 일방주의는 9·11을 겪은 미국의 일탈임에도 국제 거버넌스와 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부시는 이라크 침공준비를 완료하고 난 후에도 8개월 이상 유엔의 승인을 기다렸지만, 같은 상황이 올 경우 트럼프는 유엔이나 국제조약을 즉각 무시해버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

파국과 공존 사이에서

트럼프의 당선은 백만장자라는 배경에 상관없이 아웃사이더의 반란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오바마는 많은 업적과 함께 퇴임 때까지 식을 줄 몰랐던 인기에도 불구하고 월가의 횡포를 막는 데 실패했고, 핵 없는 세상도 만들지 못했으며, 중국과의 대결을 조장해왔다. 트럼프가 진정한 아웃사이더라면 이런 기성질서의 진정한 변화를 가져와야 맞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결코 수많은 아웃사이더들을 위한 리더가 될 수 없을 것 같고, 권력을 시민들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도 지킬 수 없을 것 같다. 그의 취임사는 가장 분열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 역사상 취임 직전 최저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취임식보다 반대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의 숫자가 많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으며, 인종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가주의라는 괴물의 모습을 품고 있다. 미국인들이 오랫동안 자부심을 가지고 지켜온 애국적 반대(patriotic dissent)가 가능한 다원주의의 설 자리가 줄어들고, 적개심으로 지탱되며 획일화로 들이미는 매카시즘적 이분법이 지배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세계사적 맥락에서 트럼프 정권의 탄생은 두가지 갈림길을 가리킨다. 하나는 여전히 세계 최강인 미국이 극우 포퓰리즘을 앞세워 악한 패권의 무분별한 무력행사에 나서고, 부상하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그에 맞대응함으로써 파국의 소용돌이로 치닫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집단지성이 저항해, 양극화와 저성장이라는 자본주의의 최대 위기를 민주주의와 국제협력의 회복을 통해 풀어내는 길이다. 우리로서는 쉽지 않겠지만 트럼프의 미국이 포기하려는 가치와 원칙들을 되살리고 지키기 위해 '광화문의 기적'을 등에 업고 후자에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도 한국 우선의 국익을 추구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을 향해, 세계를 향해 협력과 평화공존, 민주주의 같은 가치외교의 기치를 올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도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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