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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조하는 영부인의 시대는 저물어야 마땅하다

당신은 질문을 던지고 싶을 것이다. 투표를 하는 데 후보자의 배우자까지 고려를 해야 하는가? 그건 각자의 선택이다. 하지만 더는 남편과 아내(혹은 남편과 남편, 혹은 아내와 아내)는 후보자와 내조자가 아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살며 어느 정도 공통적인 삶의 가치를 함께 쌓아온 파트너다. 그들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미시적인 정치는 결국 거시적인 정치로 이어지거나 확장된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버락 오바마와 미셸 오바마의 8년으로부터 충분히 배웠다. 게다가 오랜 세월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협력해온 사람의 모습은 결국 후보자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우리는 후보자를 더 잘 알 수도 있다. 트럼프 취임식에서 각자의 배우자를 대하는 버락 오바마와 도널드 트럼프의 태도가 얼마나 달랐는지를 한 번 떠올려보라.

  • 김도훈
  • 입력 2017.01.26 09:12
  • 수정 2018.01.27 14:12
ⓒ뉴스1

미셸 오바마는 버락 오바마를 구입하면 딸려오는 '1+1'이 아니었다. 시작부터 그녀는 강력한 정치적 동반자였다. 정치적인 발언에 있어서도 물러섬이 없었다. 그녀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강력한 지지자임을 항상 표명하며 "딸들에게 늘 말하듯이 여자들도 뭐든지 할 수 있다. 여성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무한하다"고 말했다. "내가 만약 여러분 나이에 누가 날 좋아하고 귀엽게 생각하는지에 집착했다면 오늘날 미국 대통령의 배우자는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은 전세계 소녀들에게 던지는 멋진 메시지였다. 흑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서도 언제나 솔직하게 발언했다.

동시에 미셸 오바마는 허핑턴포스트US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을 너무 진지하게는 여기지 않기 때문"에 진정으로 멋진 영부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지미 팰런의 '투나잇 쇼'에 출연해 춤을 췄다. 아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멋지게 국민들 앞에서 춤을 추고 랩도 했다. 멋진 파티를 열었다. 멋진 드레스입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까지 이 글에서 '멋진'이라는 표현을 얼마나 많이 썼는지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미셸 오바마는 멋졌다.

오바마의 시대가 가고 트럼프의 시대가 왔다. 미셸의 시대는 가고 멜라니아의 시대가 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치적인 진보를 자처하면서 멜라니아 트럼프의 과거에 대해서 모욕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정말이지 저질스러운 짓이다. 멜라니아를 멍청한 '트로피 와이프'(남자의 돈 때문에 결혼한 여자)로 몰면서 미셸 오바마와 사사건건 비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멜라니아가 미셸과 같은 대통령 부인이 되지 않으리라는 예측은 가능하다. 트럼프 정부하에서 모든 것은 백인 남성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미 트럼프는 취임 3일 만에 남성들에게만 둘러싸인 채 낙태 저지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멜라니아가 남은 4년 동안 트럼프의 머릿속 우주에 빅뱅 같은 영향력을 행사해 더 나은 남자가 되도록 만들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진 않겠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지도 않겠다.

한국의 '영부인' 상은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 이승만은 프란체스카를 두고 "여자는 보는 대상이지 듣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직 그 시대는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박근혜의 종말이 박정희 신화의 종말일 뿐 아니라 육영수 신화의 종말이라는 지적은 매우 일리가 있다. 2002년 '한겨레21'이 여대생과 수도권 주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여대생의 51%와 주부의 78%가 가장 마음에 드는 대통령 부인으로 육영수를 꼽았다. 여기에 대해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대통령이라는 절대권력의 반대급부로 따뜻하고 사려 깊은 대통령 부인상을 찾는다"고 해석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1980~90년대까지 이어진 '제왕적 대통령'의 신화는 없다. 그것은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시대를 거치며 좌로부터도 우로부터도 무너졌다. 당연히 대통령 부인도 더는 국모일 이유는 없다. 대통령이 아버지가 아니고 대통령 부인이 어머니가 아니라면, 대통령 부인의 활동 역시 그저 '내조'일 이유는 없다.

문재인의 부인 김정숙은 북콘서트를 열면서 남편을 지원한다. '한국의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별명도 있다(하지만 이 별명은 힐러리 클린턴이 스스로 대통령에 출마하고 떨어진 지금 상황에서는 바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재명 성남시장 부인인 김혜경은 꽤 적극적으로 언론에서 이재명의 정책을 설명할 줄 안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부인 민주원을 '동지적 유대감을 가진 20년지기'로 표현하곤 한다. 안철수의 배우자인 김미경은 의학박사이자 카이스트 교수이며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반면 반기문의 부인인 유순택은 조용히 남편의 뒤를 따르는 데 만족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당신은 질문을 던지고 싶을 것이다. 투표를 하는 데 후보자의 배우자까지 고려를 해야 하는가? 그건 각자의 선택이다. 하지만 더는 남편과 아내(혹은 남편과 남편, 혹은 아내와 아내)는 후보자와 내조자가 아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살며 어느 정도 공통적인 삶의 가치를 함께 쌓아온 파트너다. 그들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미시적인 정치는 결국 거시적인 정치로 이어지거나 확장된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버락 오바마와 미셸 오바마의 8년으로부터 충분히 배웠다. 게다가 오랜 세월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협력해온 사람의 모습은 결국 후보자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우리는 후보자를 더 잘 알 수도 있다. 트럼프 취임식에서 각자의 배우자를 대하는 버락 오바마와 도널드 트럼프의 태도가 얼마나 달랐는지를 한 번 떠올려보라.

그러고 보니 미셸 오바마는 2016년 공식 콘퍼런스에서 '영부인'(first lady)이라는 말 대신 '대통령 배우자'(The first spouse)라는 말을 썼다. 물론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고 빌 클린턴이 '퍼스트 젠틀맨'이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하지만 미셸 오바마의 그 표현은 자신에게, 그리고 미래의 대통령 배우자들에게도 너무나 적절한, 새로운 시대의 단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이 아직도 몹시 아쉽다. 가장 큰 아쉬움 중 하나는 '퍼스트 스파우즈' 빌 클린턴을 영원히 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건 우리 생각보다 더 혁명적이고 전복적인 광경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갑갑한 백악관에 다시 들어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해야 했을 빌이 그걸 원했을지는 모르겠다만.

*이 글은 한겨레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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