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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폴리아모리스트의 고백

*이 글은 레즈비언 농부인 젠 다니엘스-레이크가 허핑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내 아내 외에 많은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고 섹스를 한다.

구글에 검색해 보면 기혼자의 70%가 바람을 피운다고 하는데, 내 경우는 그런 혼외 불륜이 아니다. (과학적인 경고: 이 수치에 대한 구글이나 내 말을 그대로 믿는 건 아마 현명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내 혼외 불륜은 사려깊고 전적으로 동의를 거친 관계이다. 나와 아내,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 미리 의논하고 정한 것이다.

이런 관계를 가리키는 ‘폴리아모리 polyamory’나 ‘비 일부일처제 non-monogamy’라는 말은 당신도 아마 들어보았을 것이다. 혹은 스윙어, 섹스 클럽, 변태 문화(kink culture)를 알지도 모르겠다. 사이콜로지 투데이는 다양한 다자간의 사랑들을 정의하려고 시도했지만, 이 정의는 결코 정확하지 않다. 10년 동안 다양한 비 일부일처제 퀴어 관계에 참여해 온 나는 내가 성적 정체성이나 실제 행동에서 이 스펙트럼 어디에 해당하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가 스스로의 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까닭은 내 섹슈얼리티의 유동성과 늘 변하는 천성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욕구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든, 혹은 그것이 무엇에 불을 붙이든, 나는 나와 아내의 비 일부일처제적인 폴리아모리 관계에서 오는 합의에 의한 성적 탐구와 실험의 자유를 아주 가치있게 생각한다.

내 정체성, 최소한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내가 아는 바로는 나와 아내는 혼외의 관계를 서로 이야기하고 우리의 결혼, 우리 가족, 우리의 커리어, 함께 하는 미래에 대한 비젼을 개인의 어떤 욕구보다 우선시한다. 이론상으로는 상당히 단순하다. 우리는 평생 서로에게 헌신하고, 함께 하는 집을 만들어 나간다. 언젠가는 아이를 갖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의 부모, 형제 자매, 친척들, 친구들을 돕고, 우리 자신이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섹스를 원해서라기 보다는 성적 욕구와 사교적 필요에 대해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걸 원해서이다. 다행히도 우리 둘 다에게 있어 적당하다고 느껴지는 다른 상대와 섹스를 하는 것은 이러한 공개적 결혼을 하는 것의 긍정적 부산물 중 하나에 불과하다.

반면 내가 이해하는 헌신이라는 것은 욕구와는 분리된 개념이다. 자주 바뀌는 나의 성충동을 넘어서는 것이며, 내 개인적 흥미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있는 존재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매력과 욕구의 생리학적 경험과는 달리, 헌신은 힘과 지위의 세계에 존재한다. 자신의 이익과 우리가 또래들에게 알리고 싶은 의사를 합치는 게 헌신이다. 헌신이 폴리아모리나 비 일부일처제 관계의 힘과 만나면 정말 흥미로워진다. 내 생각이 얽히기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하므로 양해해 달라.

개인의 자각이 시작될 때부터, 우리의 결정과 행동은 자신의 이익(심리적, 철학적, 영적 논의는 제쳐두고 여기서부터 시작하자)에 따라 결정된다. 의도적으로 타인에게 헌신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이익을 내 이익처럼 생각할 것을 요구 받는다. 그리고 모두 언젠가는 우리 자신의 필요에 대한 대가가 너무 높아지는 한계 내지 경계를 느끼게 된다. 대부분의 관계에서 우리는 파트너와 섬세하게 조정한 무언의 경계를 지키지만, 선을 넘어서 상대를 불편하게 하거나 상대가 우리를 떠날까 봐 두려워한다.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은 스스로의 개인적 필요와 자신의 이익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필요를 개인적으로 최소 조금이라도 이해를 하고 나면, 둘 중 누구도 상대의 행동이 자신의 필요에 맞지 않아 실망이나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형성하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결혼이나 평생을 함께 하는 관계에서 안정적이고 오래가는 유대를 맺으려면 우리는 이러한 상호 이익의 의도적 확장을 서로가 공유하는 선천적 필요의 조합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을 합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이타적 사랑처럼 자연스럽고 단순한 것으로 만들기를 꾀한다. 헌신이 쉽길 바라고, 결혼이 평생 지속되길 원한다. 하지만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 서로의 이익을 진정으로 결합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열심히 노력하고 많이 협의하는 것이다.

둘 사이의 권력 관계의 역학이 서로의 이익을 합치는 것을 어렵게 한다. 미국의 젠더, 계급, 인종간의 역학처럼 특히 권력 관계가 불평등한 경우, 결혼의 안정성은 서로간의 권력차에 쉽게 영향 받는다. 사회적으로 더 큰 권력을 지닌 파트너는 관계에서 원하는 걸 더 쉽게 얻고, 자신의 행동과 의도에 대한 투명성은 덜 요구받는다. 게다가 우리는 단체 생활을 하는 종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소외받는 집단의 소속이냐와 무관하게 이러한 역학 관계가 인간의 존재 전반과 모든 관계에 영향을 준다.

압제적 체제를 해체하기를 원하는 행동가로서, 나는 내 결혼 관계 및 다른 관계에서 이러한 권력 구조를 협의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특정 사람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기존 권력 계층이 존재하고, 이는 그들의 삶과 결정을 간단하게 해준다. 남녀 간의 결혼을 협의하는 것은 훨씬 쉽다. 개인의 역할과 필요가 이미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적어도 그런 믿음이 존재하긴 했다). 이러한 권력 배분의 단순함은 사회적 보수주의자들이 과거 미국의 위대함의 근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며, 여러 가지 면에서 그 말은 틀리지 않다.

남녀간의 전통적 결혼은 퀴어나 비 일부일처제적 관계에 존재하는 깊고 의도적 협의를 요구하지 않는다. 전통적 결혼에 그런 게 없다는 말은 아니고, 권력이 모든 계약에서 참작해야 하는 요소이며 결혼도 예외가 아니라는 뜻이다. 권력의 차이가 없는 진정 평등한 사회에서는 강제나 지배의 권력 구조로 안정되지 않는 강력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훨씬 더 깊은 노력이 필요하다.

평등한 우리 부부의 관계는 자신의 이익과 필요에 대한 자기 성찰적 이해,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협의를 이뤄내는 능력, 그 약속에 대한 의도적 헌신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므로, 비 일부일처제적인 우리의 결혼(그리고 내가 맺는 모든 관계)의 안정성은 우리의 이익을 합치려는 의도의 깊이, 서로에 대한 헌신을 협의할 때 특권을 버리는 것에 의존한다.

쉬운 일일 것 같지 않나?

모두 쓰고 다니는 빨간 모자를 쓰는 게 더 쉬울 수도 있겠다(…).

이기적으로 살기보다 인생의 파트너와 공유하는 이익에 헌신할 때 생기는 깊은 의미는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 아내에 대한 나의 헌신은 내가 했던 약속 중 가장 의도적이고, 선지적이며, 신성한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우리 두 사람의 이익, 필요, 우리의 삶의 미래에 대한 비젼을 합치는 것이며, 우리의 결혼 계약(케투바)을 우선시하자는 깊은 헌신이다. 우리 두 사람뿐 아니라 우리의 가족과 더 큰 커뮤니티도 우리의 결혼을 지켜보았고 지지했다.

널리 퍼진 문화적 믿음과는 달리, 우리의 결혼에 대한 헌신은 합의에 의한 혼외의 성적, 로맨틱, 사교적 관계를 배제하지 않는다. 부부가 되어 서로에게 헌신하기로 한 뒤 이런 외부적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있어 근본적 변화가 생겼다. 이제 우리는 외부 파트너를 만나 협의할 때 우리 부부의 필요를 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 대화, 논의, 변화, 성장, 궁극적으로 넘쳐나는 사랑에 대해 열려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의 아름다움은 서로에 대한 우리의 헌신이 매일 새로워진다는데 있다. 삶의 고난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사랑에 의해 고양되고, 서로에 대한 끝없는 믿음으로 연대한 우리의 유대의 핵심은 빨간 모자를 쓴 파시스트들보다 더 오래 갈 것이다.

허핑턴포스트US의 Confessions From A Polyamorist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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