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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이정식'? 해외에선 이미 불문율

매번 식사 접대를 하고 나면 해당 영수증을 하드카피로 제출하고 다시 그 비용 보고서를 스캔해서 소프트카피로 제출하고, 그것도 모자라 concur라는 외부 업체의 비용 관련 시스템에 접속해 일일이 만난 사람의 이름, 회사명, 직함 등을 기재해야 했다. 이 같은 번거로움은 공짜밥을 당연시 해왔던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자 귀찮은 업무였다. 신기한 건 미국인, 영국인, 싱가포르인, 중국인 심지어 인도인까지 회사 동료들 중에 회사 법인카드를 만능카드 내지 도깨비 방망이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 김채원
  • 입력 2017.01.24 11:18
  • 수정 2018.01.25 14:12
ⓒ뉴스1

[코리아노마드 인 싱가폴] '란이정식'? 해외에선 이미 불문율

'란이정식'. 최근 한국에서 시행된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금지법' 속칭 '김영란법' 이후로 등장한 3만원대 한식 정식 세트 이름이다. 이 법의 등장으로 대한민국의 접대 문화는 일대 변혁의 시대를 맞이했다. 식사는 3만원, 선물은 5만원으로 제한. 대상은 주로 공무원과 언론사 기자들이다. 정작 대상이 되어야 할 국회의원과 기업체 고위 임원 등은 쏙 빠졌다.

하지만 언론에선 연일 '김영란법 때문에 서민 경기가 죽었다'라든가, '김영란법 때문에 대형마트, 백화점, 재래시장 등 유통업계의 명절 대목이 사라졌다'는 부정적 내용의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까지 한국의 비즈니스는 밥집과 술집, 선물상자를 통해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비용들을 결제하는 법인카드는 일명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의 요술램프' 혹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게 해주는 '도깨비 방망이'로 인식되곤 했다.

한국에서 법인카드로 가족 외식비를 내거나 장을 보는 등 생활비로 남용했다는 류의 기사가 비일비재하게 등장하는 것만봐도 법인카드를 둘러싼 한국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의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한다. 그동안 법카의 혜택을 누리던 이들이 김영란 법 시행을 놓고 볼멘 소리를 하는 것도 한편으론 이해가는 대목이다.

눈물·웃음·꼼수·냉소.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금지법'(김영란법) 시행 100일이 지난 요즘 볼 수 있는 4가지 세태다. 고급 음식점과 화훼·한우농가 등을 중심으로 서민경제는 직격탄을 맞았다. 하지만 음식 맛이 좋고 저렴한 일부 업소에는 손님이 몰리고 있다. 음식점에서는 밥값 대신 '외식카드'를 만들어 파는 등 꼼수도 등장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이후 '대통령도 안 지키는 법을 서민들이 왜 지켜야 하느냐"는 냉소적인 반응도 나온다. (중앙일보)[1]

한국의 고질적인 '갑을 문화'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공짜 밥과 공짜 술, 공짜 선물이 사회적 비용으로 낭비되고 있는 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싱가포르에서 5년여 간 미국계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하면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가장 부패지수가 낮은 국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싱가포르란 나라에 살면서 당시의 내가 얼마나 부끄럽고 위험한 행동들에 부지불식 간에 물들어 있었는지 깨달았다. 대한민국이 얼마나 부정과 청탁 목적의 뇌물에 중독돼 있는 사회인지도 함께 말이다.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발표한 '전세계 부패 인식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전세계 167개국 중 37위를 기록한 반면, 싱가포르는 8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경쟁국인 대만(30위), 일본(18위)는 물론 빈국 중 하나인 부탄(27위)과 보츠와나(28위) 보다도 부패한 나라로 평가됐다.

세계경제포럼(WEF)이 해마다 발행하는 세계경쟁력보고서를 통해 국가별 부패지수를 공개했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WEF의 보고서를 인용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부패정도가 심한 국가 11개국을 선정했다. 대한민국은 9위로 그 그룹 안에 포함됐다. 가장 부패 정도가 심각한 국가는 멕시코였다. WEF는 지난 2월부터 6월까지 141개국 기업가 1만5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펼쳐 국가별 부패 순위를 선정했다. 설문조사에는 자국의 공공자금이 얼마나 많이 불법적으로 유용되는지, 정치인의 윤리적인 잣대가 어떻게 평가되는지, 기업들 간에 뇌물은 얼마나 많이 오고 가는지 등의 질문이 포함됐다. (뉴스1)[2]

(참고: 전세계 부패 인식지수, 국제투명성기구)

싱가포르에서 미국계 다국적 기업에 근무하면서 나는 한국이 얼마나 불투명한 사회였는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내가 다니던 회사에선 '김영란 법'과 같은 싱가포르법이 없더라도 회사 자체적으로 강력한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팀을 통해 식사 접대비는 인당 미화 50달러, 선물은 미화 100달러, 취재를 목적으로 한 공짜 숙박이나 공짜 비행기표 등은 일체 금지 하는 등 매우 세세한 지침이 정해져 있었다. 선물을 받더라도 가액이 미화 50불을 넘으면 안되며, 오직 상대 회사의 로고가 찍힌 판촉물 개념의 선물만 수령 가능할 정도로 지침은 엄격했다.

가장 좋았던 점은 25%정도 기자의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직업상 에너지 원자재 트레이더들을 만나 정보를 얻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국이었으면 공짜 밥을 당연스레, 하지만 한편으론 민망하게 대접(?) 받아야 할 상황에서 멋지게 내 회사 로고가 찍힌 법인카드를 내밀며 당당히 밥값을 결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외국의 비즈니스 관계에선 갑을관계가 존재하더라도 한국만큼 뚜렷하지 않다. 갑이라고 해서 항상 얻어 먹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을이라고 해서 항상 대접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갑과 을이 서로 존중하며 번갈아 가며 밥을 사는 것이 거의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게다가 매번 식사 접대를 하고 나면 해당 영수증을 하드카피로 제출하고 다시 그 비용 보고서를 스캔해서 소프트카피로 제출하고, 그것도 모자라 concur라는 외부 업체의 비용 관련 시스템에 접속해 일일이 만난 사람의 이름, 회사명, 직함 등을 기재해야 했다. 이같은 번거로움은 공짜밥을 당연시 해왔던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자 귀찮은 업무였다.

호텔숙박비 같은 경우엔 총 비용을 1/n로 나누고 어느 호텔에 묵었는지를 일일이 기록하고 호텔이 위치한 나라, 지역, 어떤 종류의 업체인지 등등 여러가지 항목을 선택해야 하는 등 여간 번거로운 작업이 아니었다.

이것도 모자라, 관련 리포트를 대조하고 확인하는 인도 소재의 컴플라이언스팀에서는 번번이 하드카피가 누락됐다며 나를 들들 볶기까지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해당 비즈니스 미팅과 관련된 미팅 노트도 써야한다. 클라이언트와 언제 어디서 만나 무슨 얘기를 왜 나눴으며, 마케팅 및 세일즈 팀에 전달할 만한 사항(Key takeaways)이 뭐가 있는지까지 일일이 보고해야 했고, 이 미팅 노트는 소중한 고객 정보로 전사에 공유되는 한편 나의 퍼포먼스 리뷰에도 활용되었다.

이 때문에 싱가포르에서 처음 갖게 된 생애 첫 법인카드란 나에게 요술방망이라기 보단 건드리면 피곤해지기만 하는 벌집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신기한 건 미국인, 영국인, 싱가포르인, 중국인 심지어 인도인까지 회사 동료들 중에 회사 법인카드를 만능카드 내지 도깨비 방망이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미국계는 물론 유럽계, 심지어 일본계 등 다국적 기업에서는 법인카드 사용이 조심스럽고 까다로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심지어 정기적으로 관련 지침 내용을 업데이트 하고 이러닝(e-learning) 프로그램으로 퀴즈를 풀고 인사고과에 반영하기도 했다. 문제는 특정 상황을 예로 들면서 과연 선물을 받아도 되는가 아닌가 등을 따지는 내용들이었다.

몇 해 전에는 중국 기업과 비즈니스 과정에서 '꽌시'[3]를 너무 신경쓴 나머지 우리돈 100여만원 상당의 선물을 줬던 높은 직급의 영국인 디렉터가 컴플라이언스 규정 위반이란 이유로 해고를 당한 사건도 있다고 했다.

말단 사원도 아니고 높은 직급의 디렉터가 잘릴 정도면 얼마나 강력한 사내 규율인지 짐작이 간다.

한국인인 나에겐 그저 신기했지만 해외에선 이미 당연시 되는 컴플라이언스 룰이었다. 이런 당연한 것들을 한국에선 이제야 법제화 한 뒤 시행에 나서고, 그마저도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xx 게이트'라며 줄줄이 터지는 뇌물수수, 청탁, 비리 사건들은 이제 지겹기까지 하다. 물론 해외에도 그런 불법과 비리가 없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기업들 스스로 강제하지도 않은 규정을 세세하게 만들어 직원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철저히 지키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연일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뉴스가 홍수를 이룬다. 박근혜-최순실은 기업들을 상대로 금전을 요구해 지난 40여년 간 10조를 모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게다가 또 한명의 비선 측근인 정윤회를 만나려면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최소 2000만원을 준비해야 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들에게 '김영란 법'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해외 유수 기업들의 깐깐한 컴플라이언스 규정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지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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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앙일보 2017년1월6일자 [한우집 문 닫거나 피자집 전업...공무원, 회식 뒤 쪼개기 결제]

[2] 뉴스1 2016년 10월1일자 [WEF "한국, 부패지수 OECD중 9위"]

[3]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꽌시'는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경영이나 경제 시스템의 기저를 이루는 엄연한 실체이다. 현재 중국의 중앙 정부는 상하이의 인맥을 바탕으로, 전문 인력은 칭화대학[淸華大學] 인맥을 중심으로 포진되어 있다. 중국인들은 정권을 잡은 집단과 새로 등장한 집단의 변화에 따라 지역 및 학연의 후광 부침(浮沈) 현상을 경험하여 왔다. 이처럼 인맥에 의해서 움직이는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부패를 양산할 수밖에 없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꽌시'와 비합리성 (중국의 문화코드, 2004. 2. 10., ㈜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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