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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배추 삶아 먹고 산다

'달관세대'. 나는 꼭 그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가 만들었는지 참 무례한 이름표다. 국가생산에 도움이 안 되고 권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젊음을 비아냥하려고 만든 이름이 아닌가. '엔(N)포세대'라고도 불린다. 나는 취업 대신 글과 그림으로 노동한다. 결혼 말고 동거한다. 누구의 딸, 누구의 아들 말고 온전한 주체로 만나기 위해서다.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해 동거인은 정관수술을 했다. 여성의 피임보다 안전하고 확실하니까. 우리는 취업 결혼 출산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 삶을 포기한 적 없다.

  • 홍승희
  • 입력 2017.01.23 06:22
  • 수정 2018.01.24 14:12
ⓒ홍승희

얼마 전 전시 기획자가 전시회를 함께하자고 연락했다. 전시장을 빌릴 여력이 없는 젊은 작가에게 좋은 기회라면서, 제도권 전시 경력이 부족한 나의 이력에 도움이 될 거라고 덧붙였다.

젊음은 이력을 만드는 시간일까. 예술검열로 싸우는 시국에도 어떤 청년 예술가는 자본과 국가의 전시장 앞에 고개 숙여야 한다. 나의 '위치'를 염려해주는 사람들이 나이와 함께 늘어간다. 멘토의 강연이나 책이 주는 해방도 일시적이다. 그들의 배후는 결국 '무엇이 되어줘', '너의 (빛나는) 재능을 세상에 보여줘'다. 성과 없는 젊음은 젊음이 아닐까.

나는 한 달에 몇 번 쓰는 글 원고료와 근근이 파는 그림 몇 점으로 돈을 번다. 수입이 적어서 빈곤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진 않다. 출근하지 않으니 교통비가 안 들고, 가구와 옷이 적어서 유지비가 안 든다. 손수 음식을 만들어 먹으니 식비가 적게 든다. 요즘은 양배추를 삶아 먹고 산다. 자극적인 맛에 익숙했던 혀는 담백한 양배추 즙에 금방 정이 들었다. 채소를 다듬고 세제 없이 그릇을 씻고 방바닥을 닦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즐겁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가사노동은 사소하고 사적인 일로 느꼈다. 성과에 매몰된 오늘에 바빴기 때문이다. 생명을 돌보는 일은 결과물로 전시되지 못한다.

'달관세대'. 나는 꼭 그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가 만들었는지 참 무례한 이름표다. 국가생산에 도움이 안 되고 권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젊음을 비아냥하려고 만든 이름이 아닌가. '엔(N)포세대'라고도 불린다. 나는 취업 대신 글과 그림으로 노동한다. 결혼 말고 동거한다. 누구의 딸, 누구의 아들 말고 온전한 주체로 만나기 위해서다.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해 동거인은 정관수술을 했다. 여성의 피임보다 안전하고 확실하니까. 우리는 취업 결혼 출산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 삶을 포기한 적 없다. 물론 달관과 포기도 나쁘지 않다. 부조리에 편승하지 않는 달관, 폭력에 적응하지 못하는 루저가 좋다. 인간의 위선에 구토할 수 있는 비위 약한 몸이 좋다.

얼마 전에는 검찰청에서 벌금독촉명령이 왔다. 2년 전의 대통령 풍자 그라피티 건 때문이다. 나의 동거인은 타투이스트인데, 한국에서는 타투가 불법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존재투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표현을 입막음당하지 않을 권리, 달관세대 따위로 규정받지 않을 권리, 여성, 청년이기 전에 인간으로 취급받을 권리, 내 존재가 결과물로 전시되지 않을 권리를 위한 존재 투쟁. 우리는 합법과 불법,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횡단하며 산다. 기존 질서가 멋대로 줄 친 금기는 삶의 역동 앞에서 별 위력이 없다.

8평 남짓한 우리 방에는 향을 피우는 작은 신전이 있다. 그 옆으로 물감과 붓, 캔버스, 기타와 책이 널브러져 있다. 천장에 고정한 검은 천, 붉은 천이 길게 내려와 공간을 나눈다. 벽은 금색, 초록색 포장지와 검붉은 천으로 채웠다. 커다란 보라색 숄은 햇빛을 가려주는 커튼이다. 형광등 아래에 붉은 천을 둘러서 불을 켜면 빨간 방이 된다. 고래 뱃속의 주름처럼 빗금을 낸 천이 천장을 덮고 있다. 우리는 이곳을 고래 뱃속, 자궁, 죽음의 집이라고 부른다. 전시장이 담을 수 없는 삶의 무대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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