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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계단을 만날 때까지 버텨라

X축에 시간을 들인 만큼 Y축의 실력도 정비례해 올라가면 좋겠지만, 영어 실력은 계단식 그래프를 그리며 올라가더라고요. 아무리 공부해도 실력이 늘지 않아 답답하기만 한데, 질적인 변화는 금세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양이 쌓여야 질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양질 전환의 법칙이 영어 공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영어 고수로 불리는 사람들은 대개 그 첫 번째 계단을 오르는 순간, '이거구나!' 하는 희열을 맛본 다음에 공부에 재미가 붙었다고 말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는데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포기하진 마세요.

  • 김민식
  • 입력 2017.01.20 09:42
  • 수정 2018.01.21 14:12
ⓒJirsak via Getty Images

외대 통역대학원 재학 시절 통역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온 연사가 질의응답 시간에 갑자기 조크를 던지면 당황할 때가 많았어요. 그래서 고민 끝에 교수님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해서 미국식 유머에 약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교수님은 제게 〈프렌즈〉나 〈사인펠드〉 같은 미국 청춘 시트콤을 보라고 하셨어요. 미국식 생활영어 표현과 유머에 익숙해질 수 있다고요. 그래서 시트콤을 열심히 보게 됐고, 그러다 그만 시트콤에 중독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청춘 시트콤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PD의 길로 들어섰지요.

하지만 시트콤 연출가의 길은 쉽지 않더군요. 조연출 시절, 제가 손댄 시트콤마다 망했거든요. 특수영상제작실이라고 프로그램 타이틀을 제작하는 부서가 있는데, 거기에 새 타이틀 의뢰 안을 들고 가면 부장님이 놀렸어요.

"야, 이번에 타이틀 만들어주면 얼마나 쓸 거냐? 방송에 좀 오래 나가야 우리도 신경 써서 만들어주지, 몇 번 나가고 마는 타이틀에 어떻게 일일이 공을 들여?"

한 회사 선배는 안타까운 마음에 저를 붙잡고 그랬어요.

"민식아. 너는 시트콤 전문 PD가 되겠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시트콤이랑 너랑 좀 안 맞는 것 같아. 버라이어티 쇼 쪽으로 전공을 바꾸는 건 어때?"

시트콤 제목을 너무 자주 바꿔서 타이틀 도안을 새로 의뢰하기도 민망했지요. 그래서 망한 시트콤 제목에 '뉴' 자 하나 더 붙여 만든 게 〈뉴 논스톱〉입니다. 조인성, 장나라, 양동근, 박경림 등 신인을 기용해서 만든 그 시트콤이 대박이 났습니다.

살아보니 인생은 들인 노력에 비례해서 성과가 쭉쭉 올라가지는 않더라고요. 아무리 공을 들여도 변화가 없는 시기가 한동안 이어집니다. 시트콤이 적성이 안 맞는 게 아니라 아직 노하우가 덜 쌓였던 거예요. 실패의 경험도 자꾸 쌓여야 성공의 노하우로 바뀝니다. 가도 가도 그 상태인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첫 번째 계단을 만나면 불쑥 올라갑니다.

많은 사람이 영어 공부를 하다 중간에 포기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미국 사람을 만나면 입이 열리지 않고 하나도 안 들립니다. 해도 해도 도무지 실력이 늘지 않는 시기가 한동안 이어집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방법이 효과가 없구나 하는 자괴감에 학습 의욕도 떨어집니다.

X축에 시간을 들인 만큼 Y축의 실력도 정비례해 올라가면 좋겠지만, 영어 실력은 계단식 그래프를 그리며 올라가더라고요. 아무리 공부해도 실력이 늘지 않아 답답하기만 한데, 질적인 변화는 금세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물을 가열하고 또 가열해도 김만 날 뿐 여전히 물입니다. 그러다 온도가 100℃에 도달하면 어느 순간 확 끓어 넘치며 수증기가 됩니다. 양이 쌓여야 질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양질 전환의 법칙이 영어 공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영어 고수로 불리는 사람들은 대개 그 첫 번째 계단을 오르는 순간, '이거구나!' 하는 희열을 맛본 다음에 공부에 재미가 붙었다고 말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는데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포기하진 마세요. 원래 어학 공부가 그렇습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첫 번째 계단을 훌쩍 올라서는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

책 '한 권'이라는 목표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과가 보이지 않아도 포기하지 말고 한 권을 다 외울 때까지는 해보는 겁니다. 교재 앞부분은 쉬워서 진도가 잘 나갑니다. 후반부에 들어서면 점점 더 암기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문장도 어려워지고, 누적된 표현의 가짓수가 많아지면서 복습을 할 때마다 소요 시간이 늘어나거든요. 무엇보다 가장 힘든 때는, 몇 달째 열심히 했는데도 실력이 나아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그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야 합니다. 적어도 첫 번째 계단을 만날 때까지는 버텨야 합니다. 양질 전환이 이루어지는 첫 번째 전환점 말입니다. 이 첫 고비를 넘기면 영어 공부에 재미가 붙을뿐더러, 인생에서도 힘든 순간에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책 한 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매일 한 과씩 외우고, 전날까지 외운 것을 복습하는 공부가 중요합니다. 복습을 할 때 핵심은 책을 보지 않고도 영어 문장이 떠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을 보고 읽으면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이 생기거든요.

물론 책 한 권이 다 떠오르지는 않아요. 그래서 저는 한 과 공부가 끝날 때마다 휴대전화 메모장에 대화 주제를 기록해둡니다. 인사, 날씨, 학교, 길 찾기 등으로 말이지요.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와서 쉴 때, 소파에 기대 앉아 눈을 감고 그날 종일 외운 과를 소리 내어 암송해봅니다. 오늘 공부한 과를 다 외웠으면, 1과부터 다시 복습해봅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 과는 메모장의 주제를 보고 다시 기억을 떠올려봅니다.

이렇게 매일 반복하면 언젠가는 눈을 감고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우는 날이 옵니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위즈덤하우스, 2017)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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