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재용(49)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전구속영장이 19일 법원에서 기각됐다. 이 부회장의 뇌물공여를 디딤돌로 박 대통령의 뇌물수수 혐의를 수사하려고 했던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구상이 큰 차질을 빚게 됐다. 특검팀은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사유를 면밀히 검토해 이 부회장의 영장 재청구 여부를 검토 중이다. 서울중앙지법 조의연 영장전담부장판사는 전날 이 부회장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한 뒤 특검팀이 청구한 영장을 기각했다.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에 유치돼 있던 이 부회장은 집으로 돌아갔다.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 지배력 확대 등 경영권 승계를 완성하는 데에 정부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총 433억원을 박 대통령에게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부회장은 박 대통령에게 건넨 뇌물 가운데 96억원을 삼성전자 회삿돈을 빼돌려 지원한 혐의도 사고 있다. 이 부회장은 지난달 6일 국회 국정조사특별위원회에서 최순실(61·구속기소)씨와 딸 정유라(21)씨를 지원한 사실 등과 관련해 위증을 한 혐의도 있다.
법원이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은 박 대통령에 대한 지원 과정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이 부회장 쪽 주장을 받아들인 것으로 관측된다. 또 박 대통령에게 금전적 지원을 한 것은 맞지만 박 대통령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돈을 줬다는 반박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특검팀은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 지원이라는 대가를 바라고 삼성전자를 동원해 박 대통령에 대한 경제적 이익 제공을 주도한 것으로 보고 구속의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특검팀이 구속영장에 적시한 이 부회장의 범죄사실에 비춰 볼 때 이 부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건넨 돈의 대가성이 명확하지 않고, 이 부회장이 이를 전면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방어권 보장 차원에서 구속의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관측된다.
앞서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이 부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준 미르·케이(K)스포츠재단 출연금과 정유라씨 승마훈련 지원비 등 뇌물의 전체 규모는 추려놨다. 특수본은 당시 수사 기간이 짧았던데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최지성 실장(부회장)과 장충기 차장(사장), 박상진 삼성전자 대외협력담당 사장이 입을 닫은 탓에 이 돈의 대가성까지는 입증하지 못했고, 곧이어 출범한 특검팀에 바통을 넘겼다. 특수본은 당시 박 대통령의 강요에 의한 이 부회장의 자발적인 헌납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특검팀은 지난달 21일 현판식을 한 뒤 국민연금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찬성건 수사에 공을 들이며 이 부회장과 박 대통령 사이 금전 거래의 ‘대가성’을 규명하는 데 수사력을 모았다. 삼성 합병은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의 첫 단추를 끼우는 중요한 작업이었고,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 의결의 배후에는 이번 사건의 진원지인 박 대통령과 최씨의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한 공모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검팀은 박 대통령과 최씨가 경제적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는 직간접 증거를 확보한 뒤 박 대통령이 미르·케이스포츠재단 출연금과 최씨 딸 정씨의 승마훈련 지원비를 타내는 대가로 대통령의 각종 권한을 활용해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에 필수인 국민연금의 삼성 합병 찬성을 지시한 사실을 파악했다.
이 부회장은 검찰 특수본 수사 당시에는 ‘최씨의 존재를 몰랐다’고 하다가 특검팀 조사에서는 지원을 한 뒤 사후에 모든 것을 알게 됐다는 취지로 주장하고 있다. 또 삼성그룹의 의사결정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회장 재임 시절 직접 앉힌 미래전략실의 최지성 실장(부회장)이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다는 게 이 부회장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이 부회장은 박 대통령의 강요 섞인 요청을 받고 이를 최 실장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됨으로써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핵심 연결고리로 박 대통령의 뇌물수수 사건을 정면 돌파하려고 했던 특검팀은 이번 수사의 기초설계를 다시 짜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뇌물죄는 뇌물을 준 공여자와 이를 받은 수수자를 함께 처벌하게 돼 있다. 서로 마주보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행위로 범죄가 성립된다. 따라서 뇌물공여 혐의를 사고 있는 이 부회장의 구속 필요성이 법원에서 인정될 경우 반대편에 있는 박 대통령의 수수 행위 입증도 훨씬 수월하게 성립되는 구조다. 하지만 돈을 줬다는 뇌물공여자의 대가성 입증이 법원의 구속영장 심사 단계에서부터 벽에 부딪친 것이다.
특검팀은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사유를 면밀히 따져 증거관계를 보완한 뒤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다시 청구하거나, 이 부회장을 불구속기소하고 곧장 박 대통령을 조사하는 방안 두 가지를 놓고 고심 중이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뇌물공여 혐의와 관련해 법원 구속영장 판단 단계에서조차 확실하게 대가성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박 대통령을 조사하기에는 부담이 따르는 만큼 추가 수사로 혐의를 탄탄하게 다져 구속영장을 재청구하는 방향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다.
특검팀은 합병건 외에도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에 필요한 전체 로드맵을 하나하나 따져 대가성 입증을 보완할 계획이다. 이는 이 부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돈을 전달한 시점이 삼성 합병 이후라는 점을 근거로 이 부회장이 청탁할 동기가 없었다는 삼성 쪽 반박을 허무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마무리하려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비롯해 합병에 따른 신규 순환출자 고리 해소, 지주회사 전환을 위해 금산분리 규제를 완화하는 중간금융지주회사법(공정거래법 개정) 도입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특검팀은 ‘대가성이 없다’는 삼성 쪽 주장을 깨려면 경영권 승계에 필요한 이런 과정들에 박 대통령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부분을 입증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