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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잘하는 비결을 묻는다면

"기독교 신앙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성경 한 권 얻을 수 있겠습니까?" '호, 이런 기특한 신병을 봤나' 하는 흐뭇한 얼굴로 군종병이 문고판 성경책을 주더군요. "기왕이면 성경 말씀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습니다. 영어로 된 성경책을 빌려주십시오." 그래서 영한 대역 성경책을 한 권 얻었습니다. 작업하다 쉬는 시간에 남들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 피우는 동안 저는 한구석에 앉아 영어 성경을 읽고 외웠습니다. 방위병 막내가 토플책을 보다가 걸렸다면 엄청나게 맞았겠지요. 하지만 아무도 저를 건드리지 않더군요. 흔히들 군대 고참은 하느님보다 높다고 하는데, 고참도 하느님은 무서운가 봐요.

  • 김민식
  • 입력 2017.01.17 10:10
  • 수정 2018.01.18 14:12
ⓒBBurdette via Getty Images

통역사 출신 PD라고 하면 사람들이 어떤 경로로 영어를 배웠는지 물어봅니다. 저는 영어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미국 생활이나 어학연수는커녕, 회화 학원을 다닌 적도 없어요. 그냥 혼자서 책을 외우며 공부했습니다.

영어를 잘하는 특별한 비결을 묻는다면, 전 다음과 같이 말하겠습니다.

"그건 바로 간절함입니다."

대학 시절 자원공학을 전공했습니다. 신소재 재료를 다루는 첨단 공학인 줄 알고 지원했는데, '소재'는 다루지만 '신'이 아니었어요. 원래 이름이 광산학과였습니다. 탄광에 가서 일하고 싶은 생각은 당연히 없었으니, 공부에 의욕이 생기지 않더군요. 그렇다고 재수를 할 엄두도 안 났어요. 고등학교 내신 등급이 15등급 중 7등급입니다. 원래 산업공학과에 지원했는데, 내신 성적이 낮아 1지망 낙방하고 여기 붙은 거지요. 내신이 너무 안 좋으니 재수도 할 수 없어 2년 동안 방황만 하다 입대했습니다.

자대 배치받고 내무반에 인사하러 갔더니 자기소개를 시키더군요. 대학에서 뭘 배우느냐고 묻기에 석탄채굴학이랑 석유시추공학을 배운다고 했습니다. 짓궂은 고참이 물었어요.

"그럼 넌 졸업하고 탄광 가는 거냐?"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뭐해서 먹고살 건데?"

순간 할 말이 없어 멍하니 서 있는데, 옆에 있던 고참 하나가 끼어들었어요.

"군대 짱박으면 되겠네. 직업군인 지원해라."

그랬더니 다른 고참이 그러더군요.

"야, 저놈아는 방위잖아. 똥방위는 군대 짱박는 것도 안 된다. 군대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기도 아까워서 도시락 싸서 출퇴근하라는 거잖아."

그때 알았어요. 방위는 군대 말뚝도 못 박는다는 걸.

동시에, 스물한 살의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태어나서 연애 한 번 못 해봤고, 신체검사에 떨어져 현역 입대도 못 하는 약골에, 전공 학점도 바닥인, 잘하는 것은커녕 하고 싶은 일도 없는 나. 정말 비참했습니다. 그 순간 다짐했어요.

'내가 그렇게 못난 놈이 아니란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자. 남보다 잘하는 특기 하나를 만들자.'

문득, 영어만 잘하면 전공을 살리지 않고도 취업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땐 정말 그랬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기특한 마음을 먹은 때가, 하필 군대 신병 시절이라는 거지요. 학원은커녕 영어책 한 권 없는 곳이었어요.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뭘 가지고 공부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군대에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다 부대 안에 있는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기독교 신앙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성경 한 권 얻을 수 있겠습니까?"

'호, 이런 기특한 신병을 봤나' 하는 흐뭇한 얼굴로 군종병이 문고판 성경책을 주더군요. 다시 부탁했습니다.

"기왕이면 성경 말씀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습니다. 영어로 된 성경책을 빌려주십시오."

그래서 영한 대역 성경책을 한 권 얻었습니다. 작업하다 쉬는 시간에 남들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 피우는 동안 저는 한구석에 앉아 영어 성경을 읽고 외웠습니다. 방위병 막내가 토플책을 보다가 걸렸다면 엄청나게 맞았겠지요. "이 자식이 군대를 뭐로 보고!" 하면서요. 하지만 아무도 저를 건드리지 않더군요. 흔히들 군대 고참은 하느님보다 높다고 하는데, 고참도 하느님은 무서운가 봐요. 비록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저는 하느님의 '백'을 믿고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때 깨달았어요. 영어 공부는, 간절함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도 할 수 있다고.

그렇게 18개월의 방위병 생활을 마치고 대학 3학년에 복학했습니다. '혼자서 영어책을 외운 것이 전부인데, 그렇게 공부한 영어가 실전에서도 먹힐까?' 궁금한 마음에 전국 대학생 영어 토론대회에 나갔습니다. 직접 쓴 영어 연설문을 발표하고 영어로 토론하는 대회였는데, 거기서 2등을 했습니다. 당시 대상은 중·고교 시절을 외국에서 보내고 들어온 외교관 자녀가 받았습니다.

'국내에서 공부한 사람 중에서는 내가 전국 영어 1등이란 말이지?'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삶이 바뀌는 인생의 전환점은 언제일까요? 언제든 나의 인생을 바꾸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낸 바로 그 순간입니다. 간절한 마음은 꾸준한 실천으로 이어지고, 꾸준한 실천은 반드시 삶의 모양새를 바꿔놓거든요. 영어를 잘하는 비결은 인생을 바꾸고 싶다는 간절함입니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위즈덤하우스, 2017)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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