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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롭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다방면에 걸친 천재였다.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받은 바 없지만, 미술, 과학, 공학 등 각 분야에 걸쳐 두각을 나타냈다. 그래서 다 빈치의 전기를 최초로 집필했던 조르조 바사리는 그를 일컬어 ‘신적인 인간’이라고 불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다른 사람들은 다 자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너무 일찍 깨어버린 사람’이라고 칭했다. 보통 사람들이 범접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남긴 유산은 상당하다. 21점의 회화, 10만 점에 달하는 소묘와 스케치가 있다. 이들 중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의외의 면들을 살펴본다.

1.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전쟁에 도움을 주었다.

“탄도학에 대한 지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레오나르도는 인상적인 묵화 스케치로 그려내었다. 영국 여왕이 소유하고 있는 커다란 스케치는 요새 벽 앞에 놓인 네 개의 화기에서 돌 탄환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탄환 수백 개가 공중으로 날아가, 진을 친 장소는 그 어느 곳도 무사하지 못하고 비처럼 쏟아지는 탄환을 맞게 된다. 레오나르도는 각각의 발사체를 위해 정확히 포물선 궤도를 그려서, 처음에는 다발 져 나와서 계속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가는 커브는 마치 분수를 연상시킨다. 심미안을 지닌 레오나르도는 완전한 파괴 속에서조차 우아미를 보았다. 대포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인식이 진짜 전쟁에 얼마나 적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500년 2월 루도비코가 노바라를 폭격했을 때 그의 박격포는 매우 지능적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북이탈리아의 도시 노바라는 짧은 시간에 함락되었다. 영국의 전문가 케네스 켈레는 루도비코가 레오나르도의 조언에 따라 체계적인 포격을 가했을 것이라고 본다.” (책 ‘다빈치의 인문공부’, 슈테판 클라인 저)

초기의 과학자들은 군대와 공생 관계였다. 전폭적인 지원을 국가가 해 주면, 그것을 기반으로 과학자들은 전쟁에 사용될 수 있는 각종 이론을 제공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덕적 의식 수준이 높았음에도 그러했다. 물론 지금의 잣대와는 다를 것이다. 당시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지던 때였다. 싸우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전쟁에 도움을 준 행위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2.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인간 비행을 계속 시도하였다.

“레오나르도의 글라이더가 공중에 한 번이라도 떠오를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 레오나르도는 움직이는 두 날개를 하나로 합하는 결정적인 걸음을 내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1495년경에 스케치한 유망해 보이는 기구에 공기역학적으로 설계된 날개들을 달았더라도, 시험비행은 실패했을 것이다. 날개에서 상승기류가 생겨나려면 비행사가 내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의 비행기는 작은 새처럼 ‘스탠드’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참새는 몸이 가벼워 날개를 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몸을 띄울 수 있는 공기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백조만 해도 뛰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날개에서 날아오르는 데 필요한 공기의 운동이 생겨나지 않는다. 하물며 인간은 더 큰 양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아주 용감한 남자가 레오나르도의 비행 도구로 체체리 산에서 비행을 시도했다면 별 수 없이 채석장으로 추락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틀림없이 그런 위험을 알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비행 시도를 비밀에 부쳤던 것일까? 아니면 결국은 겁이 나서 비행 시도 자체를 하지 못했던 것일까?”(책 ‘다빈치의 인문공부’, 슈테판 클라인 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평생에 걸친 시도 중 인간 비행이 있다. 새를 연구했고 바람의 흐름을 관측했다. 하지만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사실 몇 번의 시험 비행을 했는지조차 정확한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조르조 바사리의 다 빈치에 관한 전기에는 나이가 든 다 빈치가 손님 머리 위에서 빙빙 도는 장난감 새를 만들었다고 썼다. 꿈을 이루지 못한 한이 이 장난감에 서려 있는 듯하다.

3.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실용성을 중시했고 고객의 주문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레오나르도가 남긴 기록을 보면 그가 정말로 실용성을 중시한 인기 있는 설계자였음을 의심할 수 없다. 목욕물을 데우는 난로, 자물쇠, 여자 손가방, 리프트, 재봉틀 등 스케치에 등장하는 수백 가지의 유용한 물건들은 기술적 유토피아의 묘사와는 거리가 멀며, 실제 제작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 명백해 보인다. 미국의 학술사가 베른 디브너는, 레오나르도의 원고가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실제적인 도구들을 제공하는 홈쇼핑 카탈로그 같다고 말했다. 그의 기계들이 정말로 실용화되었는지를 의심할 이유는 없다. 비행기 같은 것은 꿈꾸기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리프트, 수도 같은 일상적인 물건들은 제작을 맡은 사람만이 설계하는 법이다. 탁월한 엔지니어라는 명성을 얻고자 했으니, 레오나르도는 고객들의 주문을 기뻐했을 것이다.” (책 ‘다빈치의 인문공부’, 슈테판 클라인 저)

엄청난 양의 제품을 설계하고 세상에 선보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다만 이 모든 것들이 100% 자신의 아이디어였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1474년에 세계 최초로 특허법을 공포하였지만, 아무도 그 법을 준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두가 모두를 표절하였다. 기술자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아이디어보다는 의뢰 받은 도구를 제작하는 능력이 중요했다. …. 최근 피렌체의 파올로 갈루치 같은 기술사가들이 레오나르도의 스케치를 … 비교했을 때 …. 예상대로였다. 레오나르도가 동료들의 기술을 자유롭게 이용했다는 것이 결론이다.”(책 ‘다빈치의 인문공부’, 슈테판 클라인 저)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모든 것을 다 만들고 생각해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당시 거의 모든 것을 제작하고 구상해냈다고 여기는 이유는 그의 원고나 유산이 널리 알려지고 전해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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