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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미국은 우리나라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미국의 1920년대는 단순히 한 나라의 역사만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피해 없이 채권국의 위치에 서 세계 경제를 주도해갔던 1920년대의 미국은 현대 산업 사회에 등장한 '경제 대국'이었고, 이 때 만들어진 여러 기업, 현상, 사건 등은 한 나라를 넘어 때로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상징'이 되기도 했다. 그런 미국의 1920년대 역사가 한국의 현대사와 비슷한 점이 있다면 전쟁과 전쟁 직후의 과도기를 겪었다는 점, 그리고 급속한 성장으로 인한 호황기를 맞았다는 점일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미국에서 일으킨, 또한 한국이 겪은 일과 비슷한 사건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았다. 한국 사회든 미국 사회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조건이 주어지면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인간사가 재미있는 이유 중의 하나다.

1. 적대감 표현

"히스테리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직업적인 극우 애국주의자들(그리고 극우 애국주의자로 포장한 잡다한 전문 선동가들)에게 싸움은 이제 막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집행 사무관까지 갖춘 수없이 많은 애국주의 단체가 출현했다. 이 사무관들도 먹고 살아야 했기에, 새롭고 더 강력한 공포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 밖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사들 역시 제거하고 싶은 상대가 있으면, 그저 그 사람에게 볼셰비키 포장만 덮어씌우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급진주의에 대한 공포는, 급진주의로 오인 받는 데 대한 공포감을 일으켰다. 사업을 아무 일 없이 꾸려나가고...싶으면, 순응하는 듯 보여야 했다." (책 '원더풀 아메리카', F.L..알렌 저)

비록 자신들의 땅에서 직접 전쟁을 겪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미국도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국이었다. 그리고 사회 분위기를 '전시 체제'에 맞게 길들인 상태에서 맞은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은 아직 남아있는 공포와 적대감을 (새로 등장한 적에게) 다시 써먹기 딱 좋은 계기가 되었다. 결국 미국에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항의하며 파업에 돌입한 노동자들이 '볼셰비키' 딱지가 붙여졌고, 수많은 우익단체들의 '반볼셰비키 테러'가 연속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법무장관은 탄광의 국유화를 주장하며 파업을 예고했던 석탄 파업 노동자들을 배에 태워 소련으로 추방시켜 버렸다. 한국처럼 '학살'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전쟁 직후 '내부의 적'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불러온 광기의 세월은 미국에도 존재했던 셈이다.

2. 부동산 투기 열풍

"마이애미가 얼마나 성장했던지! 1920년 고작 3만에 불과했던 마이애미의 인구는, 1925년 주 인구조사에 따르면 7만 5천으로 늘어났고, 그 후 몇 개월 동안 유입된 전입자와 역사상 유례 없는 대규모 인구이동의 와중에 북부에서 플로리다 주로 떼 지어 몰려든 사람들 중 마이애미 몫을 고려하면 못해도 15만 명 가까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모든 이가 땅으로 돈을 벌고 있었고, 물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치솟았으며, 비웃어주러 왔던 사람들은 눌러앉아 투기에 뛰어들었다." (책 '원더풀 아메리카', F.L..알렌 저)

1970년대 한국 강남에 '말죽거리 부동산 신화'가 있었다면, 1920년대의 미국에도 비슷한 열풍이 있었다. '플로리다 부동산 열풍'이다. 강남 부동산은 정부의 계획적인 개발로 인해 생겼고, 플로리다는 자연발생적이었다는 차이가 있긴 하다. 당시 플로리다는 뉴욕, 워싱턴 등 북동부 대도시 사람들이 찾기 좋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따듯한 휴양지로 '재발견' 되었고, 이런 땅이 개발 되기 전 미리 사놓아 한 몫 챙기려는 사람들의 엄청난 러쉬(Rush)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호황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고, 휴양 인구는 끝없이 늘어날 것이란 낙관적인 분위기가 이런 사태에 일조했다. 결국 1896년 25달러였던 플로리다의 한 토지가 1925년엔 15만 달러가 되어 있더라는 '신화'가 탄생한다. 그러나 이 신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1925년 플로리다에 호된 허리케인이 불어 닥친 이후 새로 오는 투자자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토지가 더 올랐을 때 바로 되팔 목적으로 땅을 샀던 수많은 투자자들이 채무 불이행 상태가 되어버렸다. 결국 최초로 땅을 판 소유자들은 더 무거운 조세와 평가액 부담을 짊어진 땅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게 된다. 미국의 부동산 신화로 재미를 본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

3. 타블로이드 언론

"...이 소수의 사람들은(성공한 타블로이드판 신문이 날마다 가르쳐주듯) 대중들은 한 번에 한 가지 사건에 흥분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신문 경영자와 편집자들은...사건이 발생했을 때, 스타 기자를 채용하여 1면에 대서특필하고, 지면의 대부분을 그 기사로 채워버리는 식으로, 한 기사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면 판매부수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이 점을 최대한 이용했다...린드버그의 비행은 휴전조약이나 독일제국의 몰락보다 크게 취급됐다." (책 '원더풀 아메리카', F.L..알렌 저)

미국의 1920년대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대중 상대 언론들이 갈무리 되어 몇 개의 전국 단위 언론들로 합쳐진 시기이다. 그리고 이 때 마침 생겨난 라디오는 기존의 신문들과 결합하여 '타블로이드 언론' 시대를 연다. 선정성과 자극성을 기준으로 하나의 사건을 선정해 모든 언론이 특정 기간 이것만을 보도함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켜 판매부수와 청취율을 올리는 '공식'이 만들어지고 적용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안건에 대한 보도라는 의무와는 별개로 움직이는 이런 언론의 행태는 '타블로이드 언론'이란 용어를 만들어내게 된다. 호황기 미국 국민들은 심각한 얘기보다는 '서커스'를 원했고, 언론은 이런 수요에 맞춰 행동해주었던 셈이다. 원인은 다르지만, 현상의 비슷함만 놓고 보면 우리 5공화국 때의 3S 정책이 낳은 결과와 겹치는 데가 있는 대목이다.

4. 대공황 직전 정부의 대응

"...신문은 막강한 자리에 계신 분들의 확신에 찬 성명을 연속해서 실었다. 후버 대통령 자신도 백악관 설명을 통해 "이 나라의 근본적인 사업, 즉 상품의 생산과 분배는 탄탄하고 풍요로운 기반 위에 서 있다"고 했다. 그러나 토요일 장이 끝나갈 무렵 주가는 다시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월요일, 다시 한 번 대붕괴가 닥쳤다." (책 '원더풀 아메리카', F.L..알렌 저)

호황이 있으면 불황이 있는 법이다. 특히 미국의 엄청난 호황은 1929년, 20년대의 끝자락에 '대공황'이란 이름의 엄청난 불황에 의해 막을 내린다. 주목할 만한 건 당시 미국 당국자들의 대응이었다. "...오늘날 우리 미국은 이전 어느 곳 어느 역사보다 가난에 대한 최종적 승리에 훨씬 더 가까이 와 있다...우리는 하나님의 가호로 머지않아 빈곤이 이 나라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날을 보게 될 것이다."는 후보수락 연설을 남기며 당선된 당시 대통령 후버는, 대공황이 코 앞까지 왔던 시점까지도 '이 나라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며 현실을 부정해 결국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 지난 10년간의 호황이 보장했던 단꿈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걸까? 1997년 한국의 IMF 직전 수없이 보도되었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는 주장을 상기시키게 만드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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