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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에 생겨나 미국을 상징하게 된 4가지

세계사를 다룬 어느 교과서에나 공통적으로 적혀 있는 문장이 있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의 피해 없이 연합국에 군수 물자를 판매하였으므로 최대의 채권국으로서 호황을 누리며 세계 경제를 주도하였다.”(금성출판사, 2007년) 실제 미국에게 있어 1920년대는 매우 특별한 시대였다. 최초로 '세계 경제 대국'의 위치에 올랐고, 지금의 미국을 상징하는 많은 것들이 만들어졌다. 실제 이때 생겨난 많은 상품과 현상들 중 몇 개는 아직도 현대 미국에 살아남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약 100년 전, 미국에 생겨나 지금까지 살아남은 4개의 상징물들을 뽑아보았다. 사실 지금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것들이다.

1. 쿠 클럭스 클랜(Ku-Klux Klan)

"당시의 '불관용주의'는 여러 가지 형태를 띠었다. 그리고 거의 필연적으로 흑인과 유대인, 로마 가톨릭교도에 대한 추악한 반감의 불꽃으로 번졌다. 전쟁 중에 확산된 집단에 대한 충성심과 증오의 감정은 휴전으로 갑자기 표현할 길을 잃었으나, 급진주의 혐의자들뿐 아니라 미국의 지배집단(백인 개신교도)은 외국적 혹은 '비미국적'으로 보이는 모든 다른 것들을 처단하는 것에서 변태적인 배출구를 발견했다." (책 '원더풀 아메리카', F.L..알렌 저)

1920년대는 미국에서 '증오, 이념 범죄'가 전면에 드러난 시기였다. 1950년대 한국이 그랬듯, 전쟁 이후에도 남아 있는 적대감과 공포를 사회 내부의 ‘자신과 다른’ 구성원을 솎아내는 식으로 해결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미국에서도 1920년대 전반기 동안 서슬 퍼런 '빨갱이 사냥'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만 미국이 한국과 다른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면, 일찍부터 이주민들로 구성된 나라였기에 그 양상이 백인들의 '흑인 및 타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로도 드러났다는 점이다. '쿠 클럭스 클랜(Ku-Klux Klan)', 줄여서 KKK라고 불리는 단체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급성장한다. 1915년 '윌리엄 조셉 시몬스' 대령에 의해 창립되었지만 1920년까지 수백 명의 미미한 단원만을 유지하던 단체가 1924년엔 45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린 거대 조직이 되었다. 흑인, 유대인, 가톨릭교도들을 배척하는 "모범적인 백인 남성(조직 정관)"으로 이루어진 이 조직은 이후 숱한 인종 증오 범죄를 주도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후로도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살아남아 현대 미국의 어두운 뒷면이 되었다.

2. 자동차

"1919년 미국에는 677만 1천 대의 승용차가 운행되고 있었으나, 1929년에는 그 수가 적어도 2,312만 1천 대 이상이었다. 아마도 이 수치가 쿨리지 시대의 번영을 가장 유력하게 뒷받침해주는 통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923년 말, 전형적인 미국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미들타운 시"에서는 이미 세 가정에 두 대 꼴로 차를 소유하고 있었다...60가구 가운데 특히 낡아 보이는 집에 살고 있는 26명에게 욕조가 있는지 물었을 때 최고 21명이 욕조가 없다고 했다. 심지어 자동차가 욕조를 앞서고 있었던 것이다!" (책 '원더풀 아메리카', F.L..알렌 저)

'미국'하면 떠오르는 '자동차 문화'도 이 때 만들어진다. 자동차는 그 전부터 있었지만, 호황을 통해 미국 경제가 급성장하며 늘어난 중산층이 경쟁적으로 자동차를 구매한 시기는 1920년대부터였다. 포장도로, 정비소, 주유소 등의 인프라 또한 제대로 갖춰지기 시작하며 이러한 자동차 열풍을 뒷받침한다. 대표적인 미국의 자동차 회사 '포드'사의 대량생산, 분업체제가 한 시대를 상징하는 개념어가 될 수 있었던 것도 1920년대 당시 미국의 대표 생산 제품이 자동차였다는 데에 기인한다. 이렇게 증가한 자동차가 당시 신세대들의 '퇴폐의 온상'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1920년대부터 자동차 회사는 지붕 있는 디자인의 자동차를 주로 생산하게 되는데, '플래퍼'라고 불리던 신세대 여성들이 이런 차를 몰래 타고 부모와 이웃이 지켜보지 않는 먼 곳으로 나가 애인과 밀회를 즐기곤 했기 때문이다. 흔히 하는 '자동차 데이트'도 처음 생겨났을 땐 경악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청춘들의 '상열지사'는 언제 어디서나 기성세대들에게 못마땅한 취급을 받았던 건지도 모른다.

3. 자기 계발

"...그러나 마작이 전성기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그 전부터 요란하게 광고되던 에밀 쿠에(Émile Coué)가 미국에 입성했다. 그리하여 1923년 초반 몇 개월 간은 이 프랑스 낭시 지방 출신의 키 작고 말라비틀어진 프랑스인이 돌연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인물이 되었다. '쿠에회'가 창설되었고, 이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던 공식, "날마다 모든 면에서 나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라는 사부의 말을 직접 듣기 위해 모여든 관중들은 그가 그 말을 되풀이할 때면 경외감으로 침묵했다." (책 '원더풀 아메리카', F.L..알렌 저)

192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대 호황은 사람들에게 한 가지 공통된 희망을 갖게 한다.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쓸 수 있다. "나도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 에밀 쿠에(Émile Coué) 열풍은 당시 미국 사람들 사이에서 불었던 이 같은 '자기계발의 신화'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프랑스 출신 심리학자인 쿠에의 이론이 미국에서 열화와 같은 반응을 얻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계로 퍼져나간 그가 만든 주요 가르침은 지금도 다양한 자기계발서적에서 반복해서 쓰이고 있다. '스스로 잘 되고 있다고 암시를 걸어라.',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와 같은 내용들이다. 부자를 향한 1920년대 미국인들의 열망은 본인의 자질을 점검하며 이미 부자가 된 다른 이들을 동경하는 방식으로 나타났고, 이는 지금도 매우 익숙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4. 무디스

"경제분석가와 예측가(최근 들어 그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고, 그 어떤 가벼운 말이라도 무게를 갖게 된 동업집단 사람들)의 어조는 전혀 활기차지 못했다. 1928년 1월 5일, 무디스 투자정보회사는 주가가 "예상 수준을 평가절하한" 상태라고 평하면서, "주식시장을 안정된 상태로 만들기 위해 얼마큼의 재조정 과정이 필요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무디스는 3월 1일에도 여전히 불안해했다. "은행이 신용 확대를 주도하여 자금이 풍부하게 되기 전까지는 일반 사람들의 위축된 심히 상태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책 '원더풀 아메리카', F.L..알렌 저)

보다 정확히 말하면 '무디스'로 대표되는 금융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미국의 1920년대는 좋게 말하면 ‘호황’의 시대였지만, 솔직히 얘기하면 '투기'의 시대였다. 소비와 고용 같은 실물 경제지표가 어느 순간 주춤하는 상황에서 '일확천금'을 노린 수많은 사람들의 돈이 주식시장으로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는 거품이었지만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았고 제대로 예측하지도 못했다. 1916년 생긴 신용평가회사 무디스는, 이런 상황에서 드물게 대공황 직전 '우려' 의견을 제시하며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이런 무디스도 2000년대 들어 서브프라임 사태 직전까지 주택담보증권(MBS)에 'AAA 등급'을 부여해 망신을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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