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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성들이 확 바뀌었다!

강남역 사건 이후의 집단적 변화가 없었다면 대통령과 최순실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이용한 여성비하와 혐오문화가 엄청나게 유통되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여성문제로, 페미니즘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이는 여성이 많아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아마도 여성 다수에게 해당되는 비정규직, 저임금 문제와 함께 성 욕망, 낙태, 성폭력, 미혼모 등 섹슈얼리티 문제를 둘러싼 문화적 법적 도전이 한국 사회에서 더 전면화되지 않을까 싶다. 어떤 방향으로 가더라도 촛불집회의 시민혁명에 버금가는 새로운 문화적 변화를 낳을 힘의 태동은 시작되었다.

  • 권인숙
  • 입력 2017.01.11 05:20
  • 수정 2018.01.12 14:12
ⓒ연합뉴스

지난해 5월, 대학에서 십여년 수업을 한 이후 처음 경험하는 일이 벌어졌다. 수업 도중 한 여학생이 손을 들었다. "강남역 사건을 토론하면 안 될까요?" 그날의 수업과 맥이 닿지 않았던 갑작스런 주제라는 것도 의외였지만 학생들이 손을 들고 먼저 토론 주제를 제시하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평소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여학생과 남학생도 모두 어떤 소견을 가지고 있었고, 이야기를 하였고, 눈을 반짝였다.

수도 없이 붙은 노란색 포스트잇으로 기억되는 '강남역 10번 출구 여성살인사건'은 당시 살해자가 조현병 환자라는 이유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여성혐오 범죄인가라는 논쟁을 낳았다. 여성들이 과잉반응을 하며 모든 남성을 가해자로 몰아세운다는 반발도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여성들이 경험한 각종 혐오와 폭력의 경험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면서 '여성혐오'를 한국 사회에 공공연히 존재하는 문제적 개념으로 인정받게 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당시에는 파악할 수 없었던 사실이 있었다. 사건 이후로 여학생들이 확 바뀌었다는 것이다. 사건 이후 수업시간에 만난 여학생들은 정말 달랐다. 늘 페미니즘이나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은 일부 소수 여학생에게만 나타났었다. 그마저도 점점 흐릿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사건 이후 만난 거의 모든 여학생이 여성혐오 등의 단어뿐만 아니라 여성문제에 눈빛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경험을 사회적으로 해석해보려는 노력이 다수에게서 발견된다. 불편한 금기어 같았던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도 편하게 사용한다. 그래서인지 여러 여학생에게 발견되었던 결혼, 남자를 통한 계층상승 욕구도 현저히 덜 보이기 시작했고, 자신들이 중요한 당사자지만 두려움 혹은 수치심으로 반응하지 않았던 낙태 처벌 등의 주제에 더 당당히 부당함을 지적한다.

수업을 통한 경험만이 아니다. 한국여성재단이 신설한 차세대여성운동단체 지원에 기금 신청을 한 단체 거의 모두가 강남역 사건 이후 활동을 시작한 20대 여성들이 뜻을 모아 만든 신생 단체들이다. 출판계의 페미니즘 서적 선전이나 문화예술계 성폭력에 대한 젊은 여성들의 폭로도 이 연장선에 있다.

살인이 매개되었기에 충격이 클 수는 있다. 그러나 유독 여러 세대 여성 중 젊은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집단미몽에서 깨어난 듯 반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해당한 여성이 젊은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광범위한 공감대를 불러일으켰을까?

사실상 대중적으로 떠오른 최근의 여성혐오는 젊은 여성만을 향해 있었다. '김치녀', '된장녀'라는 호명은 경제력이 낮은 젊은 여성의 과도한 소비욕망을 비난하기 위함이다. 데이트 비용을 남자에게 기대는 여성으로 젊은 여성을 상징화하면서 일베 등은 끊임없이 혐오를 정당화해왔다. 이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성적 대상화 되면서도 여성 자신의 성적 욕망은 있는 것 자체도 부정되고 공격당하는 성문화에 포위되어왔다. 낙태는 음성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낳은 아이는 베이비 박스에 버릴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젊은 여성들의 성경험은 문화·경제의 폭력적 결과를 두려워해야 하는 현실을 동반한다. 오프라인의 성폭력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는 여성 비하적 공격이 더 거침없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처럼 답답하게 들끓었던 일상의 비난과 폭력의 경험을 (젊은 여성) 다수가 나의 문제로 공감하며 해석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강남역 사건이다. 새롭게 현실을 볼 수 있는 집단 틀이 형성된 것이다. 마치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연설문 작성에 도움을 받았다고 시인한 대국민 담화가 보도되던 순간과 맞먹는 느낌의 강도로.

그 이후 문화에서 드러나는 여성혐오에 대한 대응력은 예전보다 훨씬 커진 것 같다. 강남역 사건 이후의 집단적 변화가 없었다면 대통령과 최순실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이용한 여성비하와 혐오문화가 엄청나게 유통되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여성문제로, 페미니즘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이는 여성이 많아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아마도 여성 다수에게 해당되는 비정규직, 저임금 문제와 함께 성 욕망, 낙태, 성폭력, 미혼모 등 섹슈얼리티 문제를 둘러싼 문화적 법적 도전이 한국 사회에서 더 전면화되지 않을까 싶다. 어떤 방향으로 가더라도 촛불집회의 시민혁명에 버금가는 새로운 문화적 변화를 낳을 힘의 태동은 시작되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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