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MBC 해직기자가 '반성문'을 올린 막내기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MBC 기자들에게 "짖어봐"하며 조롱했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찢어지고 피눈물이 흘렀습니다. MBC 로고를 마이크에서 떼어내고, 골목에 숨어서 방송하는 게 부끄럽고 수치스럽겠지만 절대 죄책감은 갖지 마세요. MBC가 이렇게 된 건 그대들 탓이 아니니까. MBC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비극은 다 우리 선배들 탓입니다. 권력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뿔뿔이 흩어져 이제는 아무 힘이 없는, 그래서 막내 후배들에게 소주 한 잔 따라 주며 '기자는 힘센 놈들과 싸워야 된다'고 가르치지도 못하는, 못난 선배들 탓입니다.

  • 박성제
  • 입력 2017.01.10 09:13
  • 수정 2018.01.11 14:12
ⓒMBC

곽동건, 이덕영, 전예지 기자에게.

편하게 말을 놓기에는 솔직히 조심스럽군요. 제가 그대들보다 한참 먼저 MBC에 입사한 건 분명하지만 여러분의 얼굴과 이름을 잘 알지 못합니다. 2013년 그대들이 입사했을 때 저는 이미 해직된 상태였죠. 우리는 함께 일해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대들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죠. 재작년인가? 기자회 행사에서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그래도 그대들은 이미 제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그대들이 만든 동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 봤습니다. 회사에서 쫓겨난 선배들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하나 띄우면서 돌아와야 한다고 호소하는 장면. 갑자기 제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눈시울이 뜨거워진 걸 보면 우리는 이미 서로 아끼는 선후배입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진 형제, 남매처럼, 우리는 서로를 애타게 그리는 게 아닐까요.

1993년 겨울, MBC 보도국에 입사했을 때가 기억납니다. 그대들보다 딱 20년 먼저 기자가 됐습니다. 수습기자 시절, 새벽부터 하루 종일 경찰서를 돌아다니다 저녁에 회사로 돌아오면 호랑이 같은 선배들은 피곤에 지친 우리를 다시 술집으로 끌고 가곤 했습니다. 폭탄주를 따라주면서 어떤 선배가 물었습니다.

"어이, 수습, 기자가 뭐하는 직업인 줄 알아?"

전 잠시 당황해하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새로운 사실과 정보를 취재해서 국민에게 알리는 거 아닙니까?"

제 어리바리한 대답을 들은 선배의 목소리가 높아지더군요.

"사실과 정보? 그런 정신으로 MBC 기자 하려면 당장 그만둬. 그런 기자는 너 말고도 세상에 널렸거든."

"그럼 MBC 기자는 뭐 하는 건데요?"

"잘 들어. MBC 기자는 힘센 놈들과 싸우는 직업이야. 이 나라에서 힘센 놈들이 누구냐? 청와대, 국회, 검찰, 재벌, 이런 집단 아냐? 우리는 이런 놈들과 싸워야 해. 왜냐하면 언론이 대신 싸워주지 않으면 힘없는 서민들은 늘 힘센 놈들에게 당하거든."

9시 뉴스데스크에 폼 나게 데뷔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저는 그 선배의 일장훈시를 술 취한 꼰대의 잔소리로 흘려 버렸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후 기자생활에 익숙해질수록 그 선배의 말이 생각나는 상황이 계속 벌어졌습니다. '힘센 놈들'이 자꾸 MBC를 통제하고 간섭하려고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싸워야만 했어요. 기자들끼리 싸우다 힘에 부치면 노동조합과 함께 싸웠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가끔 힘센 놈들에게 굴복해서 뉴스를 망치려는 간부들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들도 부끄러움은 아는 선배들이었습니다. 후배들이 '이제 그만 뉴스를 더럽히고 물러나라' 하면서 성명을 발표하거나 농성을 하면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MBC 뉴스는 위기를 넘기고 다시 국민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2012년, 그대들이 입사하기 1년 전, 다시 큰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진짜 센 놈들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 방송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우리는 무려 6개월이나 파업을 하면서 처절하게 버텼습니다. MBC 역사에서 가장 악랄했던 낙하산 사장과 간부들은 저항하는 우리를 빨갱이, 좌파로 몰아붙였습니다. 대선을 앞둔 정치권도 우리를 외면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싸우던 언론인들은 회사에서 쫓겨나고 남은 이들도 마이크와 카메라를 빼앗겼죠. 그리고 MBC 뉴스는 철저하게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청자들은 약자의 편에 서지 않고 강자에게 굴복한 뉴스를 금방 구분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에서 힘센 놈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방송, 국민들이 가장 사랑해 주던 방송, 대학생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어 했던 방송은 언제부턴가 욕설과 손가락질을 받는 방송으로 전락했습니다. MBC 기자들은 순식간에 '기레기'의 대명사가 됐더군요. 그 와중에 그대들이 MBC에 입사한 겁니다.

MBC 기자인 곽동건, 이덕영, 전예지씨가 4일 공개한 'MBC 막내기자의 반성문' 동영상.

곽동건, 이덕영, 전예지 기자.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MBC 기자들에게 "짖어봐"하며 조롱했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찢어지고 피눈물이 흘렀습니다. MBC 로고를 마이크에서 떼어내고, 골목에 숨어서 방송하는 게 부끄럽고 수치스럽겠지만 절대 죄책감은 갖지 마세요. MBC가 이렇게 된 건 그대들 탓이 아니니까. MBC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비극은 다 우리 선배들 탓입니다. 권력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뿔뿔이 흩어져 이제는 아무 힘이 없는, 그래서 막내 후배들에게 소주 한 잔 따라 주며 '기자는 힘센 놈들과 싸워야 된다'고 가르치지도 못하는, 못난 선배들 탓입니다.

요즘 제게 MBC가 예전의 사랑받던 방송으로 돌아갈 수 있겠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쉽지 않을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반성과 개혁이 있어도 회생의 불꽃을 피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무릎 꿇은 건 아니었지만 굴종의 세월이 점점 길어지면서 젊은 기자들의 피도 차갑게 식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대들이 만든 동영상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권력과 맞서 본 경험도 없고 이끌어 줄 선배도 없었던 막내들이, 힘내서 싸울 수 있도록 더 MBC를 욕해달라고 호소하는 걸 보고 가슴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더군요. 가장 어두운 상황에서 그대들이 한 줄기 빛을 던져줬습니다. 저런 후배들과 함께라면 MBC 뉴스를 다시 살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강해졌습니다. 그대들의 뜨거운 목소리는 지금 이 순간, 패배주의로 얼어붙은 선배들의 가슴을 녹이고 있을 겁니다. 다들 똑같은 심정일 겁니다. 틀림없어요.

머지않아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갈 거라 믿습니다. MBC 역시 바닥부터 다시 일어나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겠죠. 쉽진 않겠지만 절대 회피해서는 안 되는 싸움입니다. 그 싸움을 시작할 수 있도록 새해 벽두부터 용기를 북돋워 준 그대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합니다. 막내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MBC #기자 #박성제 #해직기자 #반성문 #미디어 #언론 #사회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