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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전의 내부구조로 본 '절대왕정'의 속성

우리는 수많은 대통령을 만나보았지만, 청와대 내의 관저가 이슈가 된 적은 많지 않다. 이번에 우리는 확실히 청와대 안의 구석구석을 궁금해하게 되었다. 여전히 청와대는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다. 그래서 청와대는 (외국인) 관광객의 사진 촬영 장소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가 청와대에 근무한다고 하면 더 솔깃하게 된다. (그래서 청와대 직원을 사칭하는 사건도 예전부터 종종 일어나곤 했던 것 아닐까?) 우리에게 청와대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베르사유 궁전이 있다. 특히 절대적인 왕권을 상징하는 중요한 표상이었다. 절대왕정의 거울로서 베르사유 궁전을 만나보자.

1. 루이 14세는 더 이상 재상을 두지 않고 베르사유 궁전을 완성시켰다.

“이미 재무대신이던 니콜라 푸케(Nicolas Fouquet)를 숙청하면서 정치적 파란을 예고했던 젊은 태양왕은 1661년 더 이상 재상을 두지 않는 국왕의 직접통치를 선언했다. 이는 역사가들이 “1661년의 혁명”이라고 부르는 통치 변혁이었다. …. 또한 지방 총독들에 대해서는 3년 단위로 궁정에 체류하는 것을 의무화해, 그들이 왕권을 저해하는 세력으로 발전하는 것을 방지하고나 했다. 그리고 1682년 드디어 베르사유에 왕궁이 완성되었다.” (책 ‘절대왕정의 탄생’, 임승휘 저)

조선시대도 왕권과 신권 충돌의 연속이었다. 재상은 어느 정도 왕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었다. 그 건강한 견제 관계가 깨지면 국가는 흔들리게 된다. 프랑스의 루이 14세 역시 더 이상 재상을 두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왕의 독주를 예고한 것이다. 또한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모범으로 삼고 모방하려고 했던 베르사유 궁전 역시 루이 14세의 작품이다. 즉 베르사유 궁전은 절대왕정의 상징이 되었다.

2. 베르사유 궁전으로 인해 귀족에 대한 통제가 가능했다.

“이전에는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엄청난 규모의 이 왕궁은 절대주의의 한 표상이면서 귀족들의 질서와 규율을 위한 도구였다. 고위 귀족들은 지방의 영지에 있는 자신들의 성을 버려두고 국왕의 주위에서 맴돌기 위해 베르사유 시(市)의 비좁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불편을 감내했다. 자연히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봉건제의 특징이면서 왕권에 대한 큰 위협이었던 지방할거주의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책 ‘절대왕정의 탄생’, 임승휘 저)

베르사유 궁에는 매일 6천 명 이상의 귀족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리고 이들은 궁정생활의 질서에 따라 움직였다. 루이 14세는 이것으로 지배를 강화했다. 궁궐 안에 들어오면 그들의 서열에 따라 왕과 어느 정도 친밀하고 사랑을 받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는 예를 들어 “국왕과 함께 한 자리에서 등받이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는 자 그리고 서 있어야만 하는 자 등”이 구분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3. 궁전 안 정원의 태양신 아폴로는 루이 14세를 의미했다.

“베르사유는 원래 루이 13세의 사냥터였다. 그러나 태양왕의 영광의 과시라는 명백한 목표 하에 건설되기 시작한 이 성은 이제 축제와 연예의 장소, 절대왕권의 표상으로 자리잡았다. 1662년부터 건축가이자 정원설계사인 르 노트르(Le Notres)는 이솝우화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물과 신상들 그리고 수많은 분수와 폭포, 이국적 식물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정원을 설계했다. 이 정원의 그 어떤 것도 아무런 이유 없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정원이 존재하는 이유는 국왕의 권위에 대한 메타포였다.” (책 ‘절대왕정의 탄생’, 임승휘 저)

궁궐 내의 모든 설계는 국왕 권위를 도드라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성을 나와 정원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황금 마차를 탄 아름답고 젊은 태양신 아폴로를 만날 수 있었다.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태양신 아폴로는 태양왕 루이 14세를 의미한다. 물론 왕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끝도 없이 베르사유 궁전은 보수되었다. 유지비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런 비용의 지출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까지 이어진다.

4. 궁전은 합리주의와 신비주의 두 가지를 다 담아냈다.

“국왕의 침실은 정원의 머리에 위치한 아폴로 분수에서부터 정원을 가로질러 시가로 이어지는 정웅앙선상에 위치했다. 왕의 침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왕국의 심장이었다. 왕의 거주공간은 다른 방으로부터 분리되어 마치 성당의 제대를 연상시켰다. 바로 이 방에서 국왕은 마치 두 신체의 합리를 이루는 듯한 일상의 의식을 치렀다. 물리적 신체로서의 국왕은 잠자리에 들 때와 잠에서 깨어날 때 궁정인들의 알현을 받아야 했고, 정치적 신체, 즉 국가를 구현하는 인격체로서 국사를 논하고 외국 대사들을 접견했다.” (책 ‘절대왕정의 탄생’, 임승휘 저)

베르사유 궁전은 합리적이면서도 신비롭게 지어졌다. 왕의 통치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동선, 시선 등을 고려한 도시 설계가 이루어졌다. 또한 왕의 군위를 절대적으로 높이는 목적도 충분히 이룰 수 있게 짜졌다. 십자군의 왕, 성왕 루이에게 헌정된 소성당 샤펠 루아얄(Chapelle Royale)이 대표적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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