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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울음소리와 초인의 노래

육사는 뛰어난 진보주의자였다. 진보주의를 삶의 방식으로만 말한다면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다. 한 사람의 진보주의자가 미래의 삶을 선취하여 이 세상에서 벌써 미래의 초인으로 살지 않는다면 그 미래의 삶에 대한 확신과 미래세계의 건설 동력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그의 존재는 이 불행한 세상에 점처럼 찍혀 있는 행복의 해방구와 같다.

  • 황현산
  • 입력 2017.01.06 05:25
  • 수정 2018.01.07 14:12
ⓒ이육사문학관

닭의 해를 맞아 닭 울음소리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육사의 시 〈광야〉를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육사는 마흔이 되던 해인 1942년 여름 일제의 경찰대와 헌병대에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던 기차간에서 이 시를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생은 이 시를 통해, 민족의 가장 처절한 고난이 자신의 한 몸을 꿰뚫었던 그 시간을 민족이 자랑해야 할 가장 거룩한 시간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나는 〈광야〉를 민족서정시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늘 주장해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문맥이 통일되고, 수미가 일관된 이 시가 늘 단편적 이미지들로만 해석되어온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광야에 관해서, 매화 향기에 관해서, 초인에 관해서 저마다 장려한 그림을 떠올리면서도 시 전체를 꿰뚫는 설명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광야〉는 또한 시구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를 두고, 닭이 울었다는 뜻이라는 해석과 울지 않았다는 해석 사이에 논쟁이 오래 계속되기도 했다. 나는 두어 차례에 걸쳐 천지개벽의 순간에 닭이 울지 않았어야 옳다는 점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지만, 그 닭 울음소리의 없음이 시의 핵심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글에 격렬하게 반대한 논자가 있었다. 글자 한 자 한 자를 역사적 사실과 얽으려는 그 글에 발을 길게 멈출 필요는 없지만, 이 말만은 해두기로 한다. 시라고 이름 붙은 글에서는 그 시를 구성하는 현실요소를 모두 제외하고도 남은 것을 시라고 한다. 시의 현실은 다시 현실로 환원되지 않는다. 육사가 자기 고향 원촌을 생각하며 광야라고 말한 것이 사실이고,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말하며 독립투쟁가 허형식을 생각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시의 광야는 원촌이 아니며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허형식이 아니다. 그것은 늘 원촌을 넘어서고 허형식을 넘어서는 어떤 새로운 가치의 이름이다. 시는 현실에서 시작하나 현실에 묶이지 않는다. 시를 읽자.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접근이 금지되었거나 개척하기 어려운 땅이라는 점이다. 그 땅을 "차마 범하진" 못하고 한 번 휘달리는 것으로 자신들의 작업을 끝내고 제 위치를 결정해버린 산맥들은 그 광야에 길 닦기를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을 터부의 땅으로 남겨두었다. 반면에 "큰 강물"은 긴 세월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이 땅에 자신의 길을 낼 수 있었다. 그 세월이 "부지런"하다는 것은 그 계절이 쉬지 않고 근면하게 이어졌다는 뜻이고 그 기간 내내 강물의 노력이 또한 그렇게 부단했다는 뜻이다.

지금 그 광야에는 눈이 내린다. 본디부터 험난한 그 자리에 인간의 길을 개척하려는 시인의 노력이 더욱 큰 고난을 맞이하게 되었다. 눈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홀로 피어 시인의 고고한 이상과 지조를 상징하고 증명하는 매화 향기에는 어떤 아득한 높이가 있다. 이 고결함과 아득함은 물론 시인이 실현할 높은 이상의 아득함일 뿐이다. 그 실천의 아득함 앞에서 시인이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저 큰 강물의 교훈이다. 그는 아득한 세월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장구함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그의 "가난한 노래", 현재로서는 별다른 힘을 지닌 것도 아니고 합창해주는 사람도 얻기 어려운 고독한 노래의 씨를 뿌리기로 결심한다.

이 노래의 씨앗은 또다시 "부지런한 계절"을 따라 싹이 돋고 "피여선 지"기를 거듭한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맞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초인은 어떤 비범한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름지기 그렇게 되어야 할 인간이며, 저마다 제 자유의지로 행동하게 될 미래의 인류이다. 이 '초인'이라는 표현에는 고난의 극한에서 노래 부르기를 선택한 자신의 의지에 대한 시인의 자부심과 높은 정신적 경지를 확보할 미래의 인간에 대한 강렬한 기대가 겹쳐 있다. 이 새 시대의 새 인류는 지금 시인이 숨죽여 부르는 이 노래를 마음 놓고 "목 놓아" 부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초인이 도래할 미래의 시간이 "천고의 뒤"인 것은 야릇하다. 천고는 '긴 세월'을 뜻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먼 옛날'을 말하기 때문이다. 천지개벽의 시간이야말로 그 먼 옛날이다. "다시 천고의 뒤"가 이 시의 눈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천고'는 저 태고의 "까마득한 날"을 미래의 아득한 날과 연결시킨다. 그 까마득한 날에 하늘과 땅의 새벽이 있었다면 이제 아득한 날을 거쳐서 와야 할 것은 '인간의 새벽'이다. 인간은 저마다 자유인이 되어 제 새벽을 맞는다. 이 새로운 천고에, 아득한 미래의 새벽에, 초인이 목 놓아 부를 노래는 바로 그 인간 개벽의 '닭 울음소리'가 된다.

이 초인의 노래와 함께 다시 첫 연으로 돌아가면, 까마득한 날 하늘이 처음 열릴 때 어디선가 들렸으리라고 흔히 생각될 만한 저 '하늘 닭의 울음소리'를 시인은 부정하고 있다. 천지가 개벽하는 순간, 하늘이 어떤 지고한 소리를 울려 자신을 진리 그 자체로 선포하고, 신성한 뜻을 가르쳐 인간이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미리 정해 놓았던 것은 아니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따라서 시인이 천지개벽의 닭 울음소리를 부정할 때, 그것은 이른바 저 섭리의 목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천지가 단지 그렇게 열렸을 뿐 어찌 지엄한 닭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겠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제 운명을 제가 설계해야 하며, 제 노래를 스스로 만들어 불러야 한다. 하늘의 섭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그 진보를 믿는 자인 육사(陸史)의 의지가 바로 이렇게 한 '땅의 역사'로 표현된다.

구성은 완벽하다. 시는 중층적 대립구도로 짜여 있다. 이 구도의 최소 단위에서 제2연의 '산맥의 성급한 포기'가 제3연의 '강물의 끈질긴 도전'과 대립하고, 제4연의 '시인의 가난한 노래'가 제5연의 '초인의 당당한 노래'와 대립하며, 중간 단위에서 '자연의 교훈'을 우의하는 제2·3연이 '인간의 실천'을 나타내는 제4·5연과 대립되며, 마지막 단계에서 첫 연의 '닭 울음소리가 없는 천지개벽'과 마지막 연의 '초인의 노래가 있는 인간개벽'이 대립된다. 이 대립구도는 닭 울음소리가 부정될 때만 보인다.

루쉰은 그의 단편소설 〈고향〉에서 수구주의자들이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터부의 자리에 인간의 가치가 들어서기를 희망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끝을 맺었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땅 위에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다 보면 길이 만들어진다." 선생은 1936년 루쉰이 타계했을 때, 그를 애도하여 추도문을 썼고 단편소설 〈고향〉을 번역하여 발표하였다. 육사는 〈광야〉를 쓸 때, 소설의 저 마지막 구절을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육사는 뛰어난 진보주의자였다. 진보주의를 삶의 방식으로만 말한다면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다. 한 사람의 진보주의자가 미래의 삶을 선취하여 이 세상에서 벌써 미래의 초인으로 살지 않는다면 그 미래의 삶에 대한 확신과 미래세계의 건설 동력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그의 존재는 이 불행한 세상에 점처럼 찍혀 있는 행복의 해방구와 같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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