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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헌법을 탄생시킨 결정적 순간 4가지

한 배달 음식 앱은 자신들의 광고를 이렇게 시작한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이 카피를 조금 바꾸어 보았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정답은 촛불집회에서 숱하게 외쳐온 단어다. 바로 '민주공화국'이다. 우리가 수없이 노래로 부른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쓰여진 그 단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규정을 누가 언제 정한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사연 없는 인생이 없듯 역사 없이 그냥 생겨난 헌법은 없다는 점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 헌법을 탄생시킨 결정적 순간 4가지를 뽑아 모아보았다. 그건 그대로 '대한민국'을 만든 결정적 순간이기도 하다.

1.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19년 4월 13일, 3.1운동의 독립 의지를 이어받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만들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임을 선포한다. 헌법을 만든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에 '왕'의 의지가 아닌 '법'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결정한 최초의 근대국가기관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헌법은 그 '근대국가' 탄생의 증거물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생겨난 최초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우리나라 헌법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어야 할까? 물론 우리나라가 해방된 이후 1948년에 제정한 제헌헌법이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이다. 그러나...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 국민이 주권자가 되는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헌법의 역사를 3.1운동과 그 운동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상하이 임시정부의 헌법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다. 그래서 우리 헌법 전문에도...우리나라 헌법의 역사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책 '헌법사 산책', 김명주 저)

2. 제헌의회 구성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가진 한계는, 현실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직접 주권을 행사해 정부를 구성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광복 전에는 '광복운동자'가 전 국민을 대신하여 주권을 행사한다는 규정이 임시정부에 존재하기도 했다(책 '헌법사 산책', 김명주 저). 결국 대한민국 헌법이 완벽한 정통성을 가지기 위해선, 국민이 직접 투표해 뽑은 국회의원들이 새롭게 헌법을 보강해 선포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것이 일제 해방 후 미 군정 하 남한에서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가진 5.10 총선거의 의의다. 이 선거는 총 유권자 중 96.4퍼센트의 선거인명부 등록, 그 중 95.5퍼센트 투표의 높은 참여율로 유엔에 의해 그 합법성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이유로 좌파와 중간파,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 등은 입후보 자체를 거부한다. 제헌의회는 대표성, 다양성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구성원끼리 헌법 제정 작업을 해야만 하는 한계를 안고 출범한다. 그것은 그대로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분단 때문에 겪어야 했던 한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최근까지 가장 크게 비난을 받았던 것은 역시 선거에 좌파와 중간파가 대거 불참했다는 사실이다. 헌법을 제정해야 할 의회의 생명은 다양한 정치•사회세력이 참여하여 진정한 대표성을 갖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는 제헌국회는 실질적인 대표성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그러나...보통선거로 치러진 5•10총선거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새로 수립될 정부에 내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충분하였다...거기에 유엔의 승인은 정당성의 외적 보증이었다...그것이 과연 최선의, 혹은 불가피한 일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앞으로의 결과가 스스로를 입증할 수 있을 뿐이었다." (책 '우리 헌법의 탄생', 이영록 저)

3. 유진오, 그리고 조소앙

제헌의회는 1948년 5월 31일 개원해 7월 12일 헌법을 완성한 후 7월 17일에 공포한다. 한 나라의 헌법을 만드는 데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한 달 반이 채 안 걸린 셈인데,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해방 후 미 군정 하 각종 연구회나 단체에서 만든 초기 헌법문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제헌헌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문서는 경성제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유진오가 만든 초안이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유진오의 초안이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나온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기초 텍스트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책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박찬승 저). 실제 제헌헌법이 임시정부의 헌법을 이어받고 있으며, 곧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원류로 삼고 있음을 잘 알려주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 헌장을 기초한 조소앙의 '삼균주의' 정신은 제헌헌법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정치•경제•교육의 완전한 평등을 기한다는 그 취지가 헌법 전문 중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한다는 문구로 되살아났다. 유진오와 조소앙이 문서로 만난 그 순간이, 우리 헌법의 기본 정신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결정적 순간'이었다.

"...전문위원 유진오는 '대한민국 헌법의 제안 이유'를 설명하면서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 정신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의 조화를 꾀하는 데 있다"라고 말했다...유진오의 이와 같은...생각은 서상일 등 다른 의원들에 있어서는 '만민균등주의'가 헌법의 기본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해방 이전에 임시정부의 기본이념이 되었던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사회민주주의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던 것으로부터도 일정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책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박찬승 저)

4. 이승만의 정계 은퇴 선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독립 근대 국가가 만들어지고, 제헌의회로 그 국민들의 대리자들을 세웠으며, 구체적인 헌법 조문들로 기본정신을 담아냈다. 그렇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헌법의 가장 실질적이고 논쟁적인 부분, 바로 '권력 구조'를 결정지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본래 유진오의 초안을 비롯한 대부분의 헌법 초안은 대한민국의 권력 구조를 '내각책임제'로 규정하고 있었다. 의회 내 절대 다수도 '내각책임제'를 지지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던 당시로선 1인 독재를 초래하기 쉬운 대통령제는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책 '우리 헌법의 탄생', 이영록 저). 그러나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은 본회의 자리에서 불쑥 "이 헌법 하에서는 어떠한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서 국민운동을 하겠다."는 발언을 한다. 본인이 대통령을 못하게 되면 아예 정부 활동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해버린다. 당시 김구, 김규식이 정부 결성에 참여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승만마저 참여를 거부하게 되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결정적으로 흔들릴 위험이 있었다. 결국 제헌의회는 국회의장 이승만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원내각제를 대통령 책임제로 고치게 된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권력구조는 양원제 국회, 내각 책임제 정부에서 단원제 국회, 대통령 책임제 정부로 급격한 턴을 하게 된다. 이승만이 헌법 제정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 그 순간이 대한민국 헌법을 탄생시킨 마지막 '결정적 순간'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헌법기초위원회가 이와 같이 내각책임제 정부를 선택한 것은 정치의 안정과 독재의 방지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위원들은 내각책임제가 국회와 정부의 대립을 제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또...독재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라고 보고 있었다...그런데 이와 같은 내각책임제 안은 이승만의 반발에 부딪쳐 하루아침에 대통령제로 바뀌고 말았다...이승만은 최후의 수단을 썼다...대통령 지위가 아니라면 자신은 재야에 남아 국민운동이나 하겠다고 협박했던 것이다...결국 이승만과 한민당 사이의 줄다리기는 이승만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하여 신생 대한민국의 정부 형태는 대통령 책임제가 되었다." (책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박찬승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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