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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가 빚어내는 시간의 무도 | '달은 가장 오래된 공간, 2016'

"그곳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원작의 제목을 차용했다." '이름 없는 건축'이 제목에 내비친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은유적인 태도는 아마 고(故) 백남준이 생전에 들었어도 꽤 흡족해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전종현
  • 입력 2016.12.29 11:52
  • 수정 2017.12.30 14:12

위 글은 월간 「SPACE 공간」 12월호에 실린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요즘은 파빌리온 전성시대다. 파빌리온의 이름 아래 여기저기에 수많은 건축물이 세워지곤 한다. 파빌리온(Pavilion)의 뜻을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Often its function makes it an object of pleasure'. 곧 즐거움을 위한 장소, 쉼터 등을 생각하면 되겠다. 올해 경험한 파빌리온 중 개인적으로 으뜸을 꼽는다면 이 작업을 빼놓을 순 없지 않을까. 내게 큰 정서적 감동을 안겨준 수작이다. 바로 네임리스 건축(소장 나은중, 유소래)의 '달은 가장 오래된 공간, 201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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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임리스 건축은 서울과 뉴욕에 기반을 둔 설계사무소다. 나은중과 유소래는 각각 홍익대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U.C. 버클리를 같은 해 졸업했다. 2009년 뉴욕에서 네임리스 건축을 개소한 후 서울로 사무실을 확장했으며 예측불허한 세상 속에서 단순함의 구축을 통해 이 시대의 건축과 도시 그리고 문화적 사회현상을 탐구하고 있다. 일상에서의 근본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단단한 건축의 유형을 만드는 동시에 공공예술과 설치작업 등을 통해 건축의 유동성을 실험하고 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뉴욕건축센터, 파슨스 더 뉴스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에서 건축작업을 선보였다. AIA뉴욕건축가협회 대상, 미국건축연맹 젊은건축가상, 미국건축가협회 뉴프랙티시스뉴욕(NPNY) 대상, 보스턴건축가협회상, 김수근건축상 프리뷰상 등을 수상했고 2014년 미국건축지 「아키텍추럴 레코드」로부터 '세계 건축을 선도할 10대 건축가'에 선정되었다. namelessarchitecture.com

지난 10월 7일부터 11월 27일까지, 백남준아트센터 야외 뒷동산의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자리 잡은 원형의 목재 파빌리온은 미술관을 오고 가는 이들의 이목을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흡수하고 있었다. 중심부를 둥글게 열어 하늘에 노출한 모습이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이 파빌리온의 이름은 '달은 가장 오래된 공간, 2016'. 경기문화재단 뮤지엄본부 'gMUSEUM DAY(지뮤지엄데이)'의 일환으로 개최된 <지뮤지엄 파빌리온: 달은 가장 오래된 공간, 2016>전이 커미션한 네임리스 건축의 신작이다. 밝은 톤의 미송 원목으로 원형 열주와 지붕을 구축하고 순백의 반투명한 천으로 외피를 형성한, 이 기이하고도 간결한 아름다움을 갖춘 파빌리온은 어떻게 제 존재를 드러내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특별한 가이드라인은 없었다. 장소와 부지의 맥락을 생각해 보니 결국 자연스럽게 '백남준'과 '경사지'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도출되더라." 나은중은 말을 이었다. "나와 유소래가 주목한 백남준의 작업은 'TV 부처'와 '달은 가장 오래된 TV'였다. 전자는 부처와 카메라, 그리고 TV 간에 얽혀 있는 삼각관계가 흥미로웠다. 그래서 실제 바라보는 풍경과 가상의 풍경을 하나의 공간 속에 병치시키는 작업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미디어 아티스트와 건축가 간의 콜래버레이션에 더 알맞아 보였다. 그래서 건축가가 공간 자체로 말할 수 있는 '달은 가장 오래된 TV'를 작업 모티브로 생각하게 됐다."

Nam June Paik, Moon is the Oldest TV, 1965(2000), Image courtesy of NJP Art Center

1965년 백남준이 뉴욕 보니노 갤러리에서 처음 선보인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총 12대의 TV를 통해 초승달부터 보름달까지 변화하는 달의 모습을 스틸컷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미디어 아트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매개체로 한다. 하지만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달이 차오르는 찰나의 순간들을 정지된 이미지로 보여주며 시간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또한 곡면의 공간에 연속적으로 배치된 12대의 TV는 감상자가 보는 위치에 따라 달의 이미지를 왜곡해서 전달한다는 점이 네임리스 건축의 눈길을 끌었다. 기존의 시간성뿐 아니라 공간의 변화, 곧 관점의 유동성까지 다루는 복합적인 개념으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는 시간과 관점에 대한 이런 생각을 외부로 끌고 나와 사람들이 경험하는 실체로 공간화하려고 했다. 건축가로서 TV 대신 건축, 즉 구조, 재료, 그리고 풍경과의 조우를 통해 어느 시간도 동일한 순간은 없고, 나아가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은 절대 고정될 수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이런 면에서 가파른 땅의 특성은 파빌리온이 추구하는 가치를 강조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과 그림자의 변화 폭을 공감각적으로 더욱 스펙터클하게 경험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안팎으로 42개씩 총 84개의 기둥에 84개의 보를 자연스럽게 결부해 생성한 전체 지름 15m, 최대 높이 3.6m의 원형 목구조 공간은 요모조모 잘 짜여 있다. 관람객은 양 옆으로 난 입구를 통해 기둥 사이의 통로로 진입해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고 안쪽 기둥 밑에 설치한 데크에 앉거나 누워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경사로 위쪽에서 계단 한 칸만큼 파빌리온으로 발을 내딛으면 거대한 원형 그림자로 뒷동산을 지배하던 지붕은 시작과 끝이 사라진 동그라미 길로 탈바꿈하며 새로운 시각을 선사한다. 경사로의 상부와 하부 그리고 미술관 내부에서 바라봤을 때 온전히 다른 모습을 취하는 외형과 더불어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내부 공간의 조형적인 완결성과 원시적인 향취는 더 이상 쪼개지지 않을 단어들, 예컨대 빛, 그림자, 공간 등을 위한 성소에 어울릴 법한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파빌리온의 외부 표피를 반투명하게 가리는 흰색 메시 천은 이런 분위기를 강조하면서 기능적으로 시선의 각도와 햇빛의 강도에 따라 내부 공간을 불규칙하게 노출하며 예측불가한 변화의 순간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장치다. 결국 이 모든 공간은 빛과 그림자가 빚어내는 시간의 무도를 감상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파빌리온에는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시간성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전달하려는 건축의 순전함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건축은 단순히 건물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의 이야기와 가치, 그리고 이를 둘러싼 관계들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믿는 네임리스 건축. 이번 파빌리온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온전히 담을 수 있었을까? 스스로 "이번 작업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건 아닌 것 같다"며 다만 시간, 공간, 시점에 대한 이야기를 관람객이 건축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나은중 소장. 그에게 제목에 대한 질문을 해봤다. "달 하면 토끼가 방아 찧는 광경이 떠오른다. 닿을 수 없어 더욱 신비하고 알 수 없는 그곳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원작의 제목을 차용했다." '이름 없는 건축'이 제목에 내비친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은유적인 태도는 아마 고(故) 백남준이 생전에 들었어도 꽤 흡족해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진 | 노경 www.rohspac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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