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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도덕은 가능한가

평소 '법과 원칙'을 앞세우며 점잖게 인간의 도리를 훈계했을, 가지고 배우고 누린 자들의 청문회 증언과 청와대의 대응이란 걸 보면서, 우리에게 과연 도덕은 가능한가라는 회의가 밀려온다. 말(馬)마저 들고일어날 시국에, 말(言)의 귀환을 외치는 함성에 온 나라가 요동쳐도, 말의 파산에 앞장섰던 이들의 거짓은 단호하고 거침없다. '하지 말라' 하면 없던 욕망도 생긴다 했으니, 죽은 법조문을 입에 달고 살던 자들의 탐욕이 각별하다 한들 뭐 그리 대수이랴 싶기도 하다.

  • 고세훈
  • 입력 2016.12.27 08:59
  • 수정 2017.12.28 14:12
ⓒ뉴스1

"조직하지 말라, 부패한다." 한때 저항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모 인사가 한 언론과의 대담에서 했던 말이다. 그의 이른바 '전향'을 둘러싼 왈가왈부가 한창인 때 나온 이 말을 두고 내 친구는, "걱정하지 마라. 인간은 조직 전에 이미 부패해 있다."고 옆에서 비아냥댔었다.

평소 '법과 원칙'을 앞세우며 점잖게 인간의 도리를 훈계했을, 가지고 배우고 누린 자들의 청문회 증언과 청와대의 대응이란 걸 보면서, 우리에게 과연 도덕은 가능한가라는 회의가 밀려온다. 말(馬)마저 들고일어날 시국에, 말(言)의 귀환을 외치는 함성에 온 나라가 요동쳐도, 말의 파산에 앞장섰던 이들의 거짓은 단호하고 거침없다. '하지 말라' 하면 없던 욕망도 생긴다 했으니, 죽은 법조문을 입에 달고 살던 자들의 탐욕이 각별하다 한들 뭐 그리 대수이랴 싶기도 하다.

악은 불가피한가

지식인의 위선에 진저리쳤던 조지 오웰은 "노동과 출산으로 기골이 장대해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고하고 땀 흘리는" 보통사람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리하여 『1984』의 주인공 윈스턴은 노동으로 굵어진 팔로 빨래에 열중하는 창밖의 여인을 보며 "왜 사람들은 열매가 꽃보다 못하다고 여기는가!"며 무릎을 쳤거니와, 오웰은 공룡시대에 살아남은 미물처럼, 땅속 삶을 완강하게 지속하는 두더지처럼, 변함없이 존재하는 보통사람을 찬양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아주 선하거나, 아주 악한 이는 극소수고 대다수의 보통사람은 꽤 선하리라는, 이른바 '선과 악의 벨커브'(the bell curve of good and evil) 패러다임에 친숙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나 자기만의 누추한 비밀(dirty little secret)이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우릴 괴롭힌다. 선을 행하고도 반성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 그래서 다시 새롭거니와, 행위의 내밀한 동기를 들추는 양심의 소리를 끝끝내 외면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우리 내면에 엄연한, 악의 가공할 힘을 그린 짤막한 소설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양심과 욕망의 권력, 그 둘의 항시적 분열상태에 있을 뿐 아니라, 둘 다 뿌리가 깊어서, 어느 쪽이 진정한 자아인지 구분할 수 없다. 지킬이 확인한 것은 악은 숨어있고(Hyde hides.), 상상 이상으로 강하며, 사실상 제어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어느 날 그는 공원벤치에 앉아 자신이 지난 몇 개월간 행했던 선행들이 마침내 살인자 하이드를 영구히 제압했으리라고 흐뭇해하지만, 아래쪽을 보자 그의 손에 힘줄이 솟고 털이 자라면서 자신이 어느새 하이드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발견한다. 도덕적 노력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려 애를 쓸수록 번민은 오히려 커가고 내면의 악은 더 강해질 뿐이라고, 저자는 탄식하는 것이다. 더 이상 지킬로 돌아갈 수 없었던 하이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부끄러움마저 사라지는 사회

문제는 악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부턴가 불의에 대한 수치심마저 실종돼 간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는 도덕을 "현상유지를 통해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의 정치적 수사"라며 내쳤다지만(곽준혁,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도덕의 정치적 공과를 따지는 일도 쉽지 않을뿐더러 그것이 도덕의 폐기로 이어질 수는 더더욱 없다. 가령 마키아벨리와 정확히 동시대를 살았던 토머스 모어는 권력(헨리 8세)에 맞서다 결국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삶과 『유토피아』가 주는 도덕적 교훈은 오늘도-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자괴감이 들 정도로 불의가 편만한-살아 있어서 우리를 깨운다. 만일 영국제국 팽창기의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의 도덕적 열정과 희생이 없었다면, 노예제가 폐지되기까지 인류는 훨씬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말년 작품인 『카라마조프 형제들』은 "신이 없어도 도덕은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진다. 구원이 외부에서 오지 않는 한, 인간은 지킬박사의 절망적 딜레마에 영원히 갇힐 운명일지 모른다. 전통사회에서 왕왕 관행으로 전해온다는 이타심이란 것도 실은 공동체를 꾸려가기 위한 차선의 방책, 곧 이기심을 합리적으로 제도화시킨 데서 비롯됐을 것이다.

여하튼 도덕이나 우정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못하고 자기이해만이 행동의 주된 준칙이 될 때, 시간은 모든 '친밀한'-즉 이해관계로 얽힌-관계들을 비틀어 버리기 마련이다. 시간과 더불어 국정농단의 주역들이 내부에서 먼저 파열음을 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도덕과 정직이 수단으로만 기능할지라도, 그것들로 인한 이익이 치러야 할 비용보다 큰 사회를 잠정적으로나마 타협해내는 일마저, 우리에겐 정말 그리 요원한가.

* 이 글은 다산연구소 홈페이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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