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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고려, 조선의 시대정신을 이끌었던 지식인 3명

지난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압도적인 찬성으로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많은 이들이 시대정신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였다. 또한 헌법을 찬찬히 들여다 보게 되었다. 헌법 속 시대정신은 국민이라는 글도 있고, 직접민주주의로 국민의 힘을 보여준 것 자체가 시대정신이라는 의견도 있다. 우리의 역사 속에는 각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있었다. 또한 시대정신을 고민하던 지식인이 있었다. 시대정신과 지식인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보도록 하자.

1. 원효: 동일성을 인정하면서도 차이를 승인한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의해’편에서 원효의 삶과 사상이 갖는 특징을 ‘구속을 받지 않다’(不羈)라고 적고 있다. ‘불기’란 달리 말하면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문제적 지식인의 삶을 돌아볼 때 일연은 그 핵심을 정확하게 포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원효의 삶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 원효는 화쟁의 공동체로서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화쟁은 모순과 대립을 넘어서는 통합을 지향한다. …. 삼국통일로 나아가는 신라에 부여된 새로운 과제는 사회통합이었으며, 원효의 불교사상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제기됐다고 볼 수 있다. 사회가 분열돼 있다면, 이 분열이 치유될 수 있는 통합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요구되는데, 원효의 사상은 바로 이러한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한다. …. 동일성을 인정하면서도 차이를 승인하려는 진정한 의미에서 통일의 원리가 다름 아닌 화쟁의 철학이다. 바로 이 화쟁사상이 삼국통일 시기에 군사적, 정치적 수준을 넘어선 문화적, 의식적 통일에서 하나의 중대한 시대정신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책 ‘시대정신과 지식인’, 김호기 저)

원효는 617년부터 686년까지 살았던 신라의 고승이다. 그의 삶 속에는 660년 백제의 멸망, 668년 고구려의 멸망, 그리고 나당 전쟁 후 676년 당나라의 축출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혼란의 시기였으며 역동적 시기였고 이질적인 것들이 이합을 반복하던 때였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힘을 합치고 조화를 이루어야 했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원효는 화쟁사상을 내 놓았다. 동일성을 인정하면서도 차이를 승인하려는 시대에 딱 맞는 사상이었다.

2. 정도전: 왕이 모자라도 재상이 현명하면 정치가 잘 운영될 수 있다.

“한마디로 정도전의 정치적 기획은 거시와 미시, 제도와 의식을 결합하고자 한 일종의 종합적 정치 프로그램이었다. 최상룡은 이를 이념적 기반으로서의 ‘주자학’, 경제적 기반으로서의 ‘공전제’, 권력적 기반으로서의 ‘재상제’로 정리한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할 것은 재상제다. ‘조선경국전’에서 정도전은 재상이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통치의 실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어 ‘경제문감’에서는 중국과 우리 역사에서 재상제도의 변천을 살펴봄으로써 재상제의 타당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설령 군주가 현명하지 못하더라도 재상이 현명하면 정치가 잘 운영될 수 있다는 견해는 정도전이 얼마나 재상제를 옹호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정도전의 정치적 기획은 재상을 중심으로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 관료 지배 체제를 기반으로 하되, 그 통치권이 백성들의 삶을 위해 기능해야 한다는 민본주의를 추구한 것이었다.”(책 ‘시대정신과 지식인’, 김호기 저)

고려 왕조의 무능함과 그 아래에서 부역한 권문세족의 뻔뻔한 탐욕스러움에 치를 떨었을 정도전은 정교한 정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시대의 소명이라 생각한다. 왕과 재상이 균형을 이루어 왕이 부족하면 재상이 메워줄 수 있는 재상제를 제시한다. 왕권과 신권의 건강한 견제는 정도전의 희망 사항이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어느 정도 둘 사이의 균형이 이루어진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쪽으로 힘이 쏠리곤 했다. 왕권을 대표하던 이방원에게 신권을 대표하던 정도전이 죽임을 당한 것도 둘 사이의 균형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 대표적 예다.

3. 정약용: 나라를 뜯어고치고 백성을 살려내 보자.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정약용의 사상을 선명히 보여주는 것은 ‘1표 2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로 알려진 경세학이다. 유학자답게 정약용은 경학에 심혈을 기울였고 …. 하지만 현재적 관점에서는 경학보다 아무래도 경세학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경학이 실학파의 관점에서 본 유학의 재구성이라면, 경세학은 현실개혁을 목표로 한 실학파의 본격적인 사회과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학파의 집대성이라는 그의 평가가 오롯이 반영돼 있는 영역 또한 다름 아닌 경세학이기도 하다. …. ‘1표 2서’에 담긴 정약용의 문제의식은 부국강병을 위한 포괄적인 사회개혁에 있었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면, ‘경세유표’에는 ‘조선이라는 오래된 나라를 통째로 바꾸어버리자’는 문제의식이, ‘목민심서’에는 ‘현재의 법 테두리 안에서라도 우리 백성들을 살려내 보자’라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그리고 ‘흠흠심서’는 형사사건을 다루는 관리들을 계몽하기 위해 저술한 형법서다.” (책 ‘시대정신과 지식인’, 김호기 저)

조선 후기는 이미 나라의 시스템이 무너진 때다. 정약용은 나라를 다시 살리고 싶어했다. 앞선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수원 화성 건설에 도움을 주었다. 개혁적 사상을 정리해 이론적 토대도 마련하였다. 그의 사상 밑바탕에는 애민사상이 깔려있다. 이 정도로 깊은 식견과 열린 마음, 백성을 위하는 생각이 갖추어진 위정자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정약용만한 정치인이 우리 곁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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