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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과 불평등의 분류학

상속을 통한 부의 대물림은 상속을 해주는 세대의 인센티브는 될지언정 상속받는 세대에게는 오히려 인센티브를 파괴하는 효과가 있다. 많은 부자들이 실제로 상속을 받은 자식들이 게으른 생활을 하게 될까 걱정을 한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정한 조건을 충족할 때마다 특정한 금액이 지불되는 '가족 인센티브 기금'의 방식으로 유산을 상속하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

  • 유종일
  • 입력 2016.12.21 11:37
  • 수정 2017.12.22 14:12
ⓒJupiterimages via Getty Images

운칠기삼(運七技三)과 불평등의 경제학 | 11. 운과 불평등의 분류학

이제까지 다양한 종류의 운이 어떻게 우리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어내는지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거꾸로 불평등을 종류별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운의 역할을 되짚어본다.

자유로운 경쟁에 의해 성패가 판가름 나고 사회적 보상이 결정되는 시장경제에서 불평등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불평등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이나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에게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더 많은 보상을 해주는 것은 결코 부당한 일이 아니다. 생산성 혹은 사회적 기여에 비례한 불평등은 사회적 정당성이 인정되는 공평한(fair) 불평등이다. 또한 장애인에 대해 특별한 배려를 해준다든지 모든 아동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것과 같이 필요에 따라 보상에 차등을 두는 것도 대개 정당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오히려 기여나 필요를 무시하고 누구나 동일한 보상을 받는 기계적 평등이야말로 불공평한 처사가 될 것이다.

특히 기여에 따른 보상의 차별은 사람들이 더 열심히 노력하고 혁신하도록 유도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하기 때문에 경제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시장 경쟁에서 더 많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 사람들은 능력을 키우고, 열심히 일하며, 새롭고 우월한 방법들을 고안해낸다. 비록 이 과정에서 운의 역할이 의외로 크다고 할지라도, 이때의 운은 순수한 우연이기 때문에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이어서 모두에게 공평하게 작용한다. 이러한 운은 인생에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이기도 하고, 실패한 사람들에게 좋은 핑계거리를 제공해주는 등 긍정적인 역할도 한다. 또한 능력과 노력에 비해 운의 비중이 얼마였는지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운에 따른 불평등도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운의 비중이 지나치게 큰 '카지노 자본주의'나 소수의 승자가 너무 많은 것을 차지하는 '승자독식 자본주의'가 낳는 과도한 불평등에 대해서는 그 경제적 필요성이나 사회적 정당성을 통째로 인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적절한 재분배로 과도한 불평등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 승자독식 시장일수록 운의 역할이 커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렇게 경쟁의 과정에서 능력과 노력, 그리고 우연이 만들어내는 불평등을 필자는 '경쟁 불평등'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두 번째 종류의 불평등은 '출발선 불평등'이다. 부의 대물림에 의해 경쟁에 진입하기 이전에 출발선 상에서부터 유불리가 결정되고 격차가 발생함으로써 초래되는 불평등이다. 출발선 혹은 태생을 결정하는 것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출발선에서 앞서는 경우도 흔히 '운이 좋다'는 말로 표현하지만 이는 경쟁과정에서 공평하게 작용하는 순수한 우연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운이다. 일반적으로 '출발선 불평등'은 '경쟁 불평등'에 비해 사회적 정당성이 약하고 경제적 필요성도 덜하다. 그래서 현대 사회는 공교육을 비롯한 사회지출과 누진적 상속세 등 '출발선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부의 대물림도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 봐야 한다. 실력을 통한 대물림은 부모에게서 자질과 여건, 그리고 기회를 부여받아 사회가 가치 있게 여기고 보상하는 실력을 갖춤으로써 혜택을 누리는 것이고, 상속을 통한 대물림은 부모로부터 신분이나 재산, 그리고 관계망 등을 전해 받아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불공평하다고, 즉 사회적 정당성이 더 약하다고 느낀다. 아무리 타고난 자질과 집안환경이 좋아도 실력은 일정부분 자신이 노력한 결과이고 아무리 불리한 여건에 처한 사람도 노력을 통해 실력을 갖출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데 반해, 상속에 의해 누리는 특혜는 본인의 노력과 전혀 관계가 없는 순수한 특권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경제적 필요성의 관점에서도 실력을 통한 부의 대물림은 불가피하게 어느 정도 용인될 수밖에 없지만, 상속을 통한 부의 대물림은 더욱 강력한 통제가 필요하다. 상속을 통한 부의 대물림은 상속을 해주는 세대의 인센티브는 될지언정 상속받는 세대에게는 오히려 인센티브를 파괴하는 효과가 있다.1)

마지막으로 가장 나쁜 종류의 불평등은 경제활동의 과정에서 자본력과 권력 등을 가진 자가 실력과 노력이 아닌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공정한 방법을 동원해서 힘없는 자를 약탈함으로써 발생하는 '약탈 불평등'이다.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시장경제에서 약탈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한국경제에는 다양한 형태의 약탈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정치권력과 재벌의 정경유착은 그중에서도 최악이다. 이들은 국고를 도둑질하고 경제정책을 재벌친화적으로 왜곡함으로써 납세자와 소비자, 그리고 노동자들을 약탈했다. 재벌의 산업지배 또한 약탈을 구조화하고 있다. 불공정한 하도급 거래에 의한 중소기업 약탈은 결국 노동시장의 분절화와 과도한 임금격차를 불러오고, 담합 등 경쟁제한행위나 기업집단에서 발생하는 사업기회편취 등은 결국 소비자를 약탈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등 협상력이 약한 집단에 대한 사회경제적 차별이나, 본부와 대리점 혹은 가맹점 사이에 성립하는 갑을관계 등에서 발생하는 소위 '갑질'도 약탈의 일종이다.

'약탈 불평등'은 불법적이거나 부당하며, 경제적으로도 매우 비효율적이고, 기존의 불평등을 더욱 확대하는 몹시 나쁜 불평등이다. '약탈 불평등'이 심해지면 결국 경제위기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약탈에 의한 이득을 취할 수 없게 만드는 정책들은 불평등 축소를 위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한다. 재벌의 정경유착과 불공정거래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경제력 집중 완화와 지배구조개선 등 재벌개혁과 공정거래정책의 강화가 필요하다. 비정규직 등 사회경제적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강력한 차별금지법이 시행되어야 하며, 나아가 비정규직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특단의 정책이 필요하다. '갑질'에 대한 규제와 함께 을의 협상력을 제고하기 위한 단결권 보장이 필요하다. 납세자, 소비자, 노동자, 그리고 소액주주 등 경제적 약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규제와 제도적 장치들이 강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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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많은 부자들이 실제로 상속을 받은 자식들이 게으른 생활을 하게 될까 걱정을 한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정한 조건을 충족할 때마다 특정한 금액이 지불되는 '가족 인센티브 기금'의 방식으로 유산을 상속하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

[운칠기삼(運七技三)과 불평등의 경제학]

1. 어느 CEO의 야릇한 이혼소송과 '행운의 보수'

2. 운의 사회적 기능과 '카지노 자본주의'

3. 마태효과와 시장경제의 '운칠기삼'

4. 승자독식 경쟁과 운의 비중

5. 특별한 기회라는 행운

6.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가는 행운

7. 타고난 재능과 성격이라는 행운

8. 능력주의의 함정과 운칠기삼의 윤리학

9. 베탕쿠르와 이재용, 그리고 세습자본주의

10. 돈이 실력이 되는 사회와 정실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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