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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 부부가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방법

한 번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형이 워낙 좋아하는 밴드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콘서트를 열었었는데, 형 몰래 티켓을 예매해 깜짝 선물한 적이 있다. 1부 무대가 끝나고 밴드가 옷을 갈아 입는 동안 빈 무대를 대신 채워줄 초대 가수가 나왔는데, 시간을 더 때워야 했는지 관객들을 대상으로 말을 걸다 우리를 발견하고선, 아, 여기 또 불쌍한 분들이 계시네요, 이런 날 남자 둘이 콘서트장까지 오시고, 이 불쌍한 두 남성분께 위로의 박수 부탁 드립니다, 라고 말하며 친히 우리를 손가락으로 콕 콕 찍어 주었다. 당연히 그 조롱의 대상은 게이 커플이 아니라 솔로인 두 이성애자 남자였겠지만, 그래서 더 슬프고도 분한 2부 공연이었다.

  • 김게이
  • 입력 2016.12.23 12:03
  • 수정 2017.12.24 14:12
ⓒdolgachov via Getty Images

남편을 만나기 전, 그러니까 베개 자국이 금세 사라지던 20대 초반에는 크리스마스 이브나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같은 날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연애를 아예 못 했었던 건 아니지만 반 년이 채 넘어가는 연애가 없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연인의 날"을 챙겨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로맨틱한 식탁의 촛불 아래에서 서로가 준비한 선물 푸는 게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것처럼.

어찌 보면 큰 욕심도 아니지 않나. 무슨 날 무슨 날에 뭘 해야 더 로맨틱하다는 학습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충성스런 부역자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일 뿐인데. 요즘 안 그래도 이런 거에 휘둘리는 사람들은 초콜릿 회사와 숙박 업체들의 거대한 사회 잠식에 놀아나는 거라는 진보적 비판이 많은 가운데, 없는 돈도 만들어서 쓰는 나 같은 게이 보수층조차 흔들린다면 대한민국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형과 특별한 날 로맨틱한 저녁을 보내기 위한 시도는 자괴감의 연속이었다.

한 번은 화이트 데이에 맞추어 그때까지 우리 둘이 가본 레스토랑 중 가장 비싼 곳을 예약했었다. 나름 내가 취업도 했겠다 이제 월급다운 쥐꼬리도 받고 있으니 이런 날 형이랑 근사한 저녁 한 끼는 먹어도 되지 않나 싶었다. 무려 디너에 무려 코스였는데, 그 비싼 돈 주고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한 시간 남짓의 이탈리안 요리는 형과의 9년 연애사에서 최악의 식사로 꼽을 만하다.

평소에는 잘 발동하지도 않는 내 에고 밑바닥의 부지런이 왜 그때만 등판했는지, 예약은 또 엄청 일찍 해서 레스토랑 한 가운데 제일 큰 테이블로 자리를 안내해줬었다. 레스토랑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개방적이었는데, 우리가 앉은 정중앙의 테이블은 말 그대로 사방에서 시선이 집중 가능한 자리였다. 개방적이었던 식당과는 반대로 식당 손님들은 어찌나 개방되지 못한 사람들이었는지, 나와 형이 그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주변 커플들이 일제히 우리를 힐끔힐끔, 종종 빤히 쳐다봤다. 형은 마치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한없이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코스는 또 어찌나 천천히 나오는지. 우리는 이미 겪어 볼만한 일은 웬만큼 다 겪어본 프로 게이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분위기를 압도하는 차별의 시선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에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또 한 번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형이 워낙 좋아하는 밴드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콘서트를 열었었는데, 형 몰래 티켓을 예매해 깜짝 선물한 적이 있다. 우리 둘은 이미 그 해 치의 부지런을 바닥까지 소진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게으를 수밖에 없었는데, 굳이 다음해 치 부지런을 당겨 써서 결국 스탠딩 객석의 맨 앞에 서게 되었다. 덕분에 내 지금의 몫이 아니면 설레발 쳐서 부지런 떨지 말자, 라는 오랜 교훈을 다시 한 번 체득할 수 있었다. 1부 무대가 끝나고 밴드가 옷을 갈아 입는 동안 빈 무대를 대신 채워줄 초대 가수가 나왔는데, 시간을 더 때워야 했는지 관객들을 대상으로 말을 걸다 우리를 발견하고선, 아, 여기 또 불쌍한 분들이 계시네요, 이런 날 남자 둘이 콘서트장까지 오시고, 이 불쌍한 두 남성분께 위로의 박수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하며 친히 우리를 손가락으로 콕 콕 찍어 주었다. 당연히 그 조롱의 대상은 게이 커플이 아니라 솔로인 두 이성애자 남자였겠지만, 그래서 더 슬프고도 분한 2부 공연이었다.

이런 일을 몇 번 당하다 보니, 어린 시절 품었던 환상은 이제 집 앞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풀게 되었다. 북적북적 거리고, 다른 테이블에 누가 앉았는지 보이지도 않고, 아기들 어린이들 때문에 옆 테이블 대화는 들리지도 않는 이 공간. 여기서는 남자 둘이 왔는지 청문회 도망친 사람이 왔는지 아무도 신경을 안 쓴다. 오히려 이런 공간에서야 비로소 아, 우리도 앞뒤에 앉은 다른 커플들, 다른 가족들과 똑같이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커플이구나, 가족이구나 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음력으로 쇠는 남편의 생일이 이번엔 연말에 있다. 형이 노래를 부르던 스마트 워치를 생일 선물 겸 크리스마스 선물로 몰래 준비하기로 진작에 마음먹고 있었으나, 얼마 전 블루투스 모델이 아닌 LTE 모델을 사고 싶어한다는 걸 알아 차리고 나서는 그냥 깜짝 선물 하는 걸 포기했다. 명의 문제도 있고 해서 알아서 개통하라고 어제 이야기했더니, 형은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벌써 크리스마스고 생일이다.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우리는 집 앞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번호표를 받아 한 시간쯤 대기 시간을 보내다 우리 차례가 되면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 미리 주문해 놓은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달콤한 와인과 함께 먹을 예정이다. 원래 밥 배 케이크 배는 따로 있으니까. 형은 자기가 알아서 개통한 스마트 워치를 손목에 차고서 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겠지. 사실 가지고 싶은 게 없어서 형한테 선물 준비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뭐라도 사오긴 하겠지 설마.

남편을 만나기 전, 그러니까 아이허브에서 실리마린 밀크시슬 같은 거 주문 안 해도 되던 20대 초반에 꿈꾸던 것과 꼭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보낼 형과의 9번째 크리스마스가 세상 부럽지 않게 행복할 거란 걸 잘 안다. 콘서트 갔던 그 해 빼고 나머지 8번의 성탄절처럼, 올해도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 이어, 그리고 해피 버스데이!

(www.snulife.com 에 게시된 글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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