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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회고록] 24. 체포동의안 부결, 법정구속 그리고 무죄

감옥에서는 오후 5시에 밥을 먹고 5시 반부터 TV가 나왔다. 7시에 뉴스를 보고, 드라마 1편, 불후의 명곡을 보면 9시에 TV가 끊겼다. 일상이 그랬다. 그런 뒤 점호를 하고 공식적으로는 자는 시간이다. 하지만 보통 9시에 점호가 끝나면 이부자리 펴놓고 책을 보곤 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간은 평화의 시간이다. 평온 그 자체다. 출소하기 전날 밤 9시가 됐는데 감옥 동료 두 명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이불을 깔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치를 보는 것이다. 내가 자정이 넘으면 출소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불을 깔라고 했다.

  • 정두언
  • 입력 2016.12.20 11:06
  • 수정 2017.12.21 14:12

서울시 정무부시장, 3선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두언 전 의원의 회고록 [최고의 정치, 최악의 정치 - 정권은 왜 매번 실패하는가]를 연재합니다. 연재의 다른 글은 정 전 의원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살다보니 이런 일이...

존경하는 의장님, 그리고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잠시 화면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저에 대한 이 부당한 짜 맞추기 표적 수사, 물타기 수사에 대해 당당히 맞서 반드시 진실을 밝힐 것입니다. 물론 외롭고 험한 길이겠지만 반드시 승리하여 대한민국 국회의 자존심을 살리고 자유민주주의의 대의를 지키겠습니다."

2년여 전 여러분들은 여야를 떠나 압도적인 표차로 제 체포동의안을 부결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 저는 결국 법정구속이 되어 열 달을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이제 저를 믿어주신 여러분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고 이 자리에 다시 서게 된 것이 너무도 기쁘고 감사합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이 책을 가장 많이 보고 있는 건물이 어딘지 아십니까? 국립중앙도서관? 아닙니다. 제가 있던 의왕 국립 기도원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루 종일 책을 보고, 생각을 하는 게 일입니다. 저도 거기에서 꽤 많은 책을 봤습니다. 누가 그중에 베스트를 꼽아보라고 하더군요. 그럴 때마다 저는 두 말 않고 이 책 '권력의 조건'을 듭니다. 다큐멘터리식으로 쓴 링컨의 평전이지요. 우리는 링컨이 매우 훌륭한 위인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왜 그런지는 정작 잘 모르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 책을 보고서야 비로소 링컨이 왜 훌륭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링컨은 연방 하원의원 초선 경력의 초라한 정치인이었습니다. 학력도 가문도 재력도 다 별 볼 일 없지요. 그런 그가 쟁쟁한 공화당 스타들을 물리치고 대통령 후보가 되고 대통령까지 당선이 됩니다. 그 때 그와 경쟁을 벌였던 라이벌들은 '저런 자가 대통령이라니' 하며 다 이민을 가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링컨은 그런 그들을 집요하게 설득하여 모두 내각으로 끌어들입니다. 하지만 차기를 꿈꾸는 그들은 모두 링컨에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국무회의는 늘 난장판에 가깝게 난상토론이 벌어지고, 장관들은 자신의 입장과 소신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링컨이 밤에 주로 하는 일이 무언지 아십니까. 예고도 없이 장관들 집을 찾아가 저녁을 먹는 겁니다. 거기서 그는 장관들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동의를 얻어내거나 아니면 장관의 의견을 받아들입니다. 이게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링컨이 한 일입니다. 나중에 그의 라이벌들 모두가 링컨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게 됩니다. 링컨의 훌륭함은 두 마디로 요약됩니다. 바로 '관용과 인내'입니다.

저는 링컨의 전기를 읽으며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저의 정치 인생 아니 저의 인생 전체를 그와 비교해 보면 바로 '불관용과 불인내'더군요. 참 한심하지요. 그동안 제깐에는 용기를 가지고 할 말 하고, 할 일을 한다고 했는데 언론을 비롯해 주변은 늘 그런 저를 권력투쟁으로 몰고 갔습니다. 정말 억울하고 답답했었습니다. 하지만 곰곰 반성해보니 저의 언행에는 늘 경멸과 증오가 깔려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러니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겠지요.

그것뿐 아닙니다. 그곳은 시간만큼은 부자인 곳이라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지난 날 잘못한 일들이 많이 떠오르는지요. 나중에는 내가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도 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제게 성찰의 기회를 준 고난의 시간들이 제게 축복이었다고 믿습니다.

살다가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보니 그동안 가지고 있던 것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더군요. 국회의원이란 자리도 마찬가지지요. 앞으로 이 귀한 자리를 정말 귀하게 사랑으로 쓸 수 있도록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들의 계속적인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4년 12월 9일(화)

무죄 확정 후 본회의 신상발언

2012년 4월 제 19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선거는 늘 전쟁이다. 나는 심신이 지쳤다. 휴식이 필요했다. 재충전을 위해 아내와 북유럽으로 미술관·박물관 기행을 떠났다. 오래 전부터 별렀던 일이었지만 비행기를 타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병원에서 요양하는 어머니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 오늘 일도 아니기에 일단 떠나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덴마크에서 노르웨이로 넘어가는데 형에게서 빨리 들어오라는 전화가 왔다. 남은 일정을 생략하고 부랴부랴 귀국길에 올랐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독일 프랑크프루트로 갔는데,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형의 문자를 받았다. 6월 22일이었다. 다리가 접혀졌다. 허망함이 밀려왔다.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 삼우제가 끝난 날 저녁, 술에 취해 자고 있는데 조선일보 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잠결에 전화를 받으며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내일 아침 신문에 검찰에서 형을 저축은행 사건으로 수사 할 것이라고 나오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임석 솔로몬저축은행 회장을 이상득에게 소개시켜준 기억밖에 없는데 왜 나를 수사하지? 참고인으로 조사하려고 하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침 신문 기사를 봤더니 1면 톱으로 나를 수사할 계획이라는 기사가 보도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언가 조짐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인지 점검을 해야 했다. 내용을 알 만한 사람은 내 비서관으로 있던 김봉현이었다. 보좌관에게 김비서관을 수소문하라고 했더니 경주 처갓집에 가있었다. 김비서관과 통화한 보좌관은 "김비서관이 그때 돈을 돌려준 기억이 있으니 의원님은 걱정 안 하셔도 된다고 했다"라고 보고했다. "그럼 그렇지!" 하면서 안심했다. 나는 7월2일 의원총회에 참석해 신상발언을 했다. "대선 과정에서 오해 살 부분이 있었는데, 파악해 당사자를 찾아냈고 확인까지 했다. 삼척동자도 이해할 수 있게 해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떳떳하다."

이 대목에서 잠깐 과거로 돌아가 보자. 당시 이상득이 구속된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저축은행 사건이 터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수사를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것들이 튀어나온다. 검찰도 어떤 사안에 대해 조사 할 때 그 건과 관련 되어 있는 정관계 고위 인사를 얘기해 주면 구형을 할 때 참작하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이상득이 저축은행과 관련이 있었기에 이름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이상득 구속'을 이끈 측면도 있다. 왜냐? 저축은행들이 잇따라 쓰러질 때도 솔로몬저축은행은 1차, 2차 퇴출 대상에서 빠지고 퇴출되지 않았다. 저축은행이 부도가 나면 갖다 안길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하니 쓰러진 저축은행들을 인수할 곳이 있어야 했다. 솔로몬저축은행 임석 회장은 빠져나간 게 아니라 쓰러진 저축은행들을 떠안기기 위해 남겨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서 담보 가치가 떨어지고 BIS 비율을 못 맞추면서 솔로몬저축은행도 퇴출될 수밖에 없었다.

영업정지 대상 저축은행 3차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 직전 나는 권혁세 금감원장을 비롯해 조원동 등 친구들과 저녁을 먹었다. 금감원 조사 결과를 일요일 날 발표한다기에 권원장에게 '솔로몬이 들어가냐?'고 물어봤더니 대답을 안 했다. 나는 '솔로몬은 이상득이 봐줘서 계속 살아났다던데 만약 그런 것이면 너 나중에 혼난다'고 말했다. "이상득 때문에 봐준다고 하는데 조심해. 그러다가 네가 온전치 못할 수 있다"고 주의를 준 것이다.

[잇달아 쓰러진 저축은행들 - 저축은행 영업정지 일지]

- 2011년1월14일 삼화저축은행 영업정지

- 20111년2월17일 부산·대전저축은행 영업정지

- 2011년2월19일 부산2·중앙부산·전주·보해저축은행 영업정지

- 2011년2월23일 도민저축은행 영업정지

- 2011년8월5일 경은저축은행 영업정지

- 2011년9월18일 토마토·프라임·에이스·제일·제일2·파랑새·대영저축은행 영업정지

- 2012년5월6일 솔로몬·한국·미래·한주저축은행 영업정지

오래 전에 하루는 임석이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한다는 이야기가 자기가 이상득한테 옛날에 돈을 줬다는 것이다. 내 귀에는 협박으로 들렸다. 이상득에게 직접 할 수 없으니 나를 통해서 협박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상득에게 전달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전달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 이상득의 보좌관인 문성곤을 불렀다. 임석이 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런데 얼마 뒤 전화를 걸어 온 문보좌관은 "(이상득이)전혀 상관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문성곤에게 화를 내며 "그래? 알았어. 그럼 앞으로 알아서 하시라고 해!"라고 말했다. 나는 내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했다. 사안을 알려줬는데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나는 기자들과의 사석에서 그 얘기를 공개했다. "임석이 찾아와서 (이런 저런)얘기를 해서 이상득에게 알렸더니 아무 문제가 없다더라." 당연히 그 얘기는 여의도에 회자되고, 증권가로 가고 검찰 정보망에도 포착됐을 것이다. 청와대 친인척 문제 담당자에게도 전화를 했다. 임석이 이렇게 말하는데 담당이 모르고 있으면 나중에 큰일 나니 파악을 해놓으라는 취지에서였다. 나중에 보니 그는 금감원 출신 국정원 직원을 불러서, 확인하는 등 나름대로 사안을 파악했다. 내가 솔로몬저축은행과 관련해 무언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면 이렇게 했을까? 나부터 솔로몬저축은행을 구제하려 하고 덮으려고 쉬쉬했을 것이다. 오히려 솔로몬저축은행을 왜 안 날리냐고 했으니 판을 키워놓고 내가 당한 셈이다.

2012년 7월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이 저축은행 금품 수사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으로 들어서고 있다.

여야를 막론 압도적 표차로 부결된 체포동의안

7월 2일 의원총회에서 신상 발언을 한 다음날 검찰에서 변호사를 통해 연락이 왔다. 5일 날 출두할 것인가, 6일 날 출두할 것인가? 묻는 전화였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가자고 했다. 빨리 가서 해명하고 싶었다. 나는 7월 5일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영장은 발부됐고 7월 9일 결국 체포동의안이 국회로 왔다. 체포동의안이 처리되는 본회의는 11일 열렸다. 이한구 원내대표는 가결되는 게 정상이라고 말했다. 나는 착잡했다. 표결하기 전 주말, 나는 군 복무 중인 아들을 면회했다. 아들은 "아빠 명예는 손상이 됐네. 어떻게 하시려고요?" 물었다. 나는 "아빠 국회의원 그만두려고 하는데?" 그랬다. 아들은 '그러시죠' 하고 쿨하게 답했다. 나는 그때 욱 하는 심정에서 국회의원 지위를 내려놓고 수사를 받겠다고 생각했다. 안 좋은 버릇이지만 나는 가끔 욱 한다.

당시 나는 친구가 운영하던 여의도의 미래전략연구원에서 장정수, 정태근, 이태규 등과 매일 대책 회의를 했다. 내가 국회의원 그만 두겠다고 하니 다들 명예롭게 그만 두자며 동의했다. 그런데 체포동의안 처리 전날인 10일 송태영과 친구 안기포가 찾아왔다. 기분도 그러니 산에 가자고 해 갔다가 내려와 막걸리를 마시며 국회의원을 그만두겠다는 얘기를 했더니, 두 사람이 왜 가만히 앉아서 당하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든 작업을 해서 체포동의안이 가결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고 핏대를 세웠다. 그러면서 자기들도 대책 회의에 오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여의도 대책회의에 와서 성토를 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김용태 의원도 송태영, 안기포의 말이 맞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체포동의안 처리 하루 전이었다. 송태영이 내가 쓴 호소문을 들고 의원회관에 있는 국회의원들의 방을 돌았다. 김용태도 의원들 만나면서 움직였다. 그래도 나는 사실 부결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이 그날 오후부터 그 다음날 오전까지 밖에 없었다. 박근혜를 비롯한 친박 그룹은 가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총선 도중 여야를 막론하고 기득권 내려놓기 경쟁을 벌인 직후라 시기도 좋지 않았다. 새누리당은 한 달쯤 전인 2012년 6월 8~9일 이틀간 충남 천안시 지식경제공무원교육원에서 의원연찬회를 열고, 6대 쇄신안과 당의 발전 방안에 대해 논의한 뒤 결의문을 발표했었다. 이날 새누리당이 결의한 6대 쇄신안은 ▲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포기 ▲ 의원연금 제도 폐지 ▲ 국회의원 겸직 원칙적 금지 ▲ 무노동 무임금 원칙 적용 ▲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기능 강화 ▲ 국회 폭력에 대한 처벌 강화 등이었다.

김용태 의원은 '정두언에 대한 체포동의안 자체가 부당하다, 국회에서 구속영장이 오기도 전에 체포동의안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제도적으로 문제가 있다, 정두언도 출두를 하겠다는 데 체포동의안을 가결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를 펴며 의원들에게 부결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현행법상으로는 국회의원이 불체포특권을 포기하려고 해도 포기할 방법이 없다. 당시 나도 불체포 특권을 포기하며 검찰에 출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뜻하지 않은 원군들이 나타났다. 윤상현은 친박 인사로 대선 당시 박근혜 공보단장을 맡고 있었다. 윤상현이 먼저 송태영에게 전화를 해왔다. "두언이 형 살려야 해. 나도 열심히 할 테니까 무엇이든 할 일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다. 송태영은 윤상현에게 "의원총회에서 체포동의안을 부결시켜야 한다는 얘기를 해 달라"고 했다. 윤상현은 "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친박계 핵심 인사가 박근혜의 뜻에 어긋나게 행동하기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겠다고 답은 했는데 윤상현은 의원총회가 열리는 당일 아침까지 통화가 되지 않았다. 다급해진 송태영은 윤상현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압력을 많이 받은 듯했다. 송태영은 "정치 길게 봐라. 이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당신 정치에 중요한 것이다"는 논리로 윤상현을 설득했다. 윤상현은 "알았다. 그 대신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 체포동의안이 부결된 뒤 윤상현은 이 일 때문에 박근혜 공보단장에서 물러났다. 의총을 앞두고 정태근, 송태영 등은 윤상현, 조해진, 김성태, 김태흠, 남경필 등을 설득해 의총에서 발언하겠다는 동의를 얻는 데 성공했다. 애초에 당론투표를 할 가능성도 있었으나 당론 투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친박'이 똘똘 뭉쳐 가결표를 던질 것이 예상됐으나 '친박'인 윤상현, 김태흠 등이 반대 토론에 나서면서 친박의 전열은 흐트러졌다.

그래도 나는 부결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표결 전 본회의장에서 신상발언을 한 뒤 나는 장정수 원장이 운영하던 연구원으로 갔다. 연구원에서 TV를 켜놓고 마음이 착잡하니 대낮부터 폭탄주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자막에 '부결!'이라고 나왔다. 찬성 74 대 반대 197이었다(기권, 무효 포함). 이렇게 나온 배경을 보면, 찬성 74는 거의 한나라당이었다. 야당이 거의 반대를 했다. 야당은 왜 반대했을까. 박지원 변수도 있었다. 박지원이 체포동의안 다음 수순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나를 가결 시키면 박지원도 꼼짝없이 가결시켜야 했다. 그러니까 박지원 일파에서는 부결을 시켜야 했다. 그래서 박지원과 가까운 이윤석이 부결 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야당에는 내 팬들이 많다. 김영주 의원은 정두언 살려야 한다고 백방으로 나서서 전화를 했다. 같이 환노위를 2년 했는데, 상임위를 2년 정도 같이 하면 사람을 속속들이 다 안다. 2년 동안 자주 보고, 여행도 가기 때문이다. 그때 같이 상임위를 했던 의원들이 내 팬이 됐다. 노영민도 그 중 한명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이 된 전병헌도 오랜 술친구다. 그런 사람들이 부결표를 던진 것이다.

뉴스에서 '부결!' 자막을 본 순간 머리가 띵~했다. 그 당시 지역에서 누가 전화가 왔는데 나보고 여야 공동 원내대표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여야를 떠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뜻이었다. 박근혜는 여기서 내게 일격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한구 원내대표는 부결된 책임을 지고 사퇴를 선언했다. 이한구는 전형적으로 재승박덕인 사람이다. 그는 "정두언은 구속수사를 받고 탈당하라"고까지 말했다.

연구원에서 TV로 체포동의안이 부결된 것을 확인한 뒤 다들 술을 마시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 정몽준으로부터 축하한다는 전화가 왔다. 그러면서 "정의원 도와준 사람들 다 불러라, 내가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고마웠지만 나는 심신이 지쳐 있었다. 폭탄주도 많이 먹어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정태근, 김용태를 보내고 나는 집에 갔다. 집에 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일단 샤워를 했는데 샤워를 하다가 오열을 터뜨렸다. 나는 꺼이꺼이 소리 내어 한참을 울었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잠을 푹 잤다.

이 일로 박근혜가 대국민 사과도 했다. 박근혜는 소득세 증세안 통과 때 완패했고, 이때도 나에게 졌다. 나한테 두 번 진 셈이다. 그리고 '친박'임에도 부결에 앞장섰던 윤상현, 김태흠도 곤욕을 치르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다 잘됐다. 2008년 조선일보 인터뷰 사건이 났을 때도 나는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살아났다. 그 이후에도 전당대회 등 여러 차례 그런 고비를 겪었다. 재판 진행 중에 누가 나한테 그랬다. '정의원은 오뚝이 같은 사람이니까 또 일어설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충격, 법정 구속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사람들은 1심 재판 중 심리를 할 때마다 나에 대한 재판장의 애정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11월 24일 선고일에 피의자 최후 진술을 3분만 했다. 한마디로 대충 했다. 판결 결과에 대해 별 걱정을 안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처를 다했고, 검찰 수사 자체가 짜 맞추기를 하다보니까 엉성했다. 청와대에서는 이 정도면 공소유지가 힘들다는 얘기까지 나왔다고 들었다. 재판부는 선고하기 1주 전 토요일에 우리 변호사에게 변론서가 담긴 파일을 달라고 했다. 재판부가 우리 쪽 변론문을 인용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좋은 징조라고 나는 생각했다. 선고 당일 나는 송태영과 북악산에 갔다가 내려와 햄버거를 먹고 법원으로 갔다. 양복에 푸른색 넥타이를 매고 가벼운 마음으로 재판정에 섰다.

그런데 그날 법정구속이 됐다. 법정구속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충격이었다. 대단히 이례적이고 무리한 조치였다. 불구속 사건, 체포동의안 부결, 증거 부족···. 그랬는데도 법정구속이라니! 판결을 내린 부장판사는 2주 후 지법 부장판사에서 고법 부장판사로 영전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판사들이 판결을 할 때 제일 우선 순위는 자기 인사 문제이다. 특히 형사재판에서는 더 그렇다. 사람들이 여론재판을 한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인가? 여론이 나쁘다, 여론이 시끄럽다는 것은 자기 인사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여론에 거스르지 않게 판결을 한다. 결국에는 자신의 인사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다. 특히 정치적인 사건에서 판사들은 자기의 인사 문제를 우선시 한다.

법정 구속되어 구치소로 가는데 멍했다.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고 10년 동안 끊었던 담배 한대 피웠으면 하는 생각밖에 안 났다. 2013년 1월 24일 목요일이었다. 날이 매우 추웠다. 구치소에 들어갔더니 4명인가 있었다. 옷이나 먹을 것 등을 챙겨줬다. 날은 춥고 찬바람은 불고 마음은 싱숭생숭하고 잠이 오지 않았다. 도무지 이것이 현실인가 꿈인가 했다. 일요일이 되어서야 정신이 들었다. 뭐할까 하다가 상을 가져오라고 해서 상을 놓고 '같이 예배 볼 사람 예배나 봅시다' 그랬다. 몇 사람이 옹기종기 모였다. 성경-말씀-기도-찬송으로 순서를 정해서 예배를 보았다. 그때 같이 예배했던 감방 동료 가운데 한 명은 그 후 얼마나 열심히 성경 공부를 했던지 지금 거의 목사가 되었다. 나는 감옥에 있을 때 결심했다. '여기 있는 동안에는 이곳이 기도원이라고 생각하자. 여기서 내 과제는 신앙에 도전을 해보는 것이다. 나도 신앙을 한 번 가져보자.' 그날 예배를 시작해서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아침, 점심, 저녁 세 차례 예배를 보면서 성경을 2회 반 정도 통독하고 나왔다.

나는 열흘 만에 독방으로 갔다. 혼자 가지 않고 같이 있던 사람 중 한명과 같이 갔다. 독방 넓이가 양팔을 쭉 다 펼 수가 없다. 길이도 다리를 펴면 얼마 남지 않는다. 거기서 둘이 있는 것이다. 왜 둘이 있었냐. 내가 원래 식욕이 없는데다가 혼자 밥 먹을 자신이 없었다. 밥을 안 먹으면 기운이 빠지고 우울증이 생길 것 같아서 같이 가자고 했다. 그가 있으니 같이 예배도 볼 수 있었다. 그는 4개월 정도 나와 같이 있다가 나갔다. 나는 혼자 두 달인가 독방에 있다가 2심 선고를 받았다. 2심 선고하는 날 구치소에서는 다들 내가 나가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못해도 집행유예라고 생각했다. 교도소장부터 모든 재소자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되면 한동안은 심신이 거의 초주검이 된다. 나도 한동안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정신적으로 멘붕이 왔다.

재판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변호사들이 재판할 때 제대로 말을 못한다. 그리고 세게 해야 하는 말은 최후진술 때 하라고 은근히 내게 미뤘다. 변호사가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나중에 이해가 갔다. 변호사는 재판장과의 관계에서 보면 영원한 을이다. 그리고 한 재판관에게 한 건만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다른 몇 건을 같이 한다. 그래서 영화에서 보듯이 세게 변론을 하지 못한다. 재판장에게 완전히 찍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건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이것이 변호사들의 한계이다. 변호사들은 검찰과 대립해서 싸우지만 제대로 안 싸운다. 검찰 수사 사건도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판에서는 피의자들이 절대로 불리하다.

내가 최후 진술을 하기에 앞서 이상득의 변호사가 몇 시간 동안 변론하느라 기운을 다 빼놓았다. 나는 밤 9시가 되어서야 최후진술을 시작했다. 변호사들이 그동안 못한 말을 거기서 다했다. 최후진술이 끝나니 판사들을 포함해서 전체가 숙연해졌다. 설득력 있게 얘기를 한 것이다. 그때 이동명 변호사가 하는 말이 '네가 변호사 해야 되겠다'고 했다. 끝나고 오는데 교도관들이 '정말 의원님 말이 다 맞네요, 의원님은 이길 것이에요' 하고 격려해 주었다. 심지어 이상득도 내게 '공부 많이 했데이' 이랬다. 그러나 결국 혼거방으로 옮겨 4개월 정도 있다가 만기를 채우고 구치소를 나왔다.

어느 날 저녁 점호가 끝나고 책을 보고 있는데 동료 한 명이 부탁이 있다고 했다. 뭐냐고 했더니 노래 한 곡 해달라고 했다. 무슨 노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요. 그러고 보니 그날이 10월 31일이었다. 가사가 가물가물했다. '글쎄' 하다가, 그의 간절한 눈망울 때문에 '에라 모르겠다'하고 일단 불렀다. 그런데 끝까지 불렀다. 감옥에 있으면 기억력이 좋아지는 게 분명하다. 스마트폰이 없는 덕이리라. 노래가 끝났는데 박수 소리가 안 들렸다. '이게 뭐야'하고 동료들을 쳐다보니, 둘 다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감옥에서 시월의 마지막 밤을 그렇게 보냈다.

감옥에서는 보통 저녁 5시에 밥을 먹는다. 사실 저녁은 일찍 먹는 게 좋다. 병원에서도 저녁을 일찍 주지 않는가. 그리고 교도소는 저염식이다. 당연히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염분 때문에 살이 많이 찌는데 교도소 음식을 먹으면 날씬해진다. 그래서 내 체중이 65kg까지 내려갔다. 매일 뛰는 등 운동도 꾸준히 했다. 돌이켜보면 정말 최고의 기도원이 감옥이었다. 그런 기도원이 없다. 재워주고, 입혀주고, 먹여주고, 건강관리 해주고···. 또 거기 있으면 시간 부자이다. 나와서 하는 얘기지만 가끔 거기가 그립다. 왜? 그곳은 자신 만의 자유를 누리는 곳이다. 자기 시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감옥 밖에 나오면 자유가 없다. 바쁜 일정을 쫓아다니면서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보고 싶은 사람도 못 보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먹는다. 아이러니컬하지만 감옥은 자유가 있는 곳이다. 거기는 작은 감옥, 바깥세상은 큰 감옥이다. 이 감옥에 있다 보니까 저 감옥이 그리워지고, 저 감옥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그리워진다.

2012년 7월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이 저축은행 금품수수 의혹과 관련해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으로 들어서고 있다.

감옥을 기도원 삼아 키운 신앙의 힘

감옥에서는 오후 5시에 밥을 먹고 5시 반부터 TV가 나왔다. 7시에 뉴스를 보고, 드라마 1편, 불후의 명곡을 보면 9시에 TV가 끊겼다. 일상이 그랬다. 그런 뒤 점호를 하고 공식적으로는 자는 시간이다. 하지만 보통 9시에 점호가 끝나면 이부자리 펴놓고 책을 보곤 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간은 평화의 시간이다. 평온 그 자체다. 출소하기 전날 밤 9시가 됐는데 감옥 동료 두 명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이불을 깔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치를 보는 것이다. 내가 자정이 넘으면 출소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불을 깔라고 했다. 감옥에서의 마지막 평화를 누리고 싶었다. 이부자리를 깔고 각자 눕거나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데, 9시 반쯤 그 중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의원님, 이 찬송가 310장 어떻게 부르죠?" 그는 내가 나가면 순서상 예배를 인도해야 했다. 이때 제일 머리 아픈 게 찬송이다. 매일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없으니 레파토리를 다양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걱정이 됐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아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잠자던 또 다른 감옥 동료도 합세해 셋이서 찬송을 했다. 다른 방에서는 끽 소리도 안했다. '잡시다 이제!' 이런 소리 하는 이가 없었다.

마지막 날이라 교도관이 배려한다고 밤 10시쯤 왔다. 일찍 나와서 차도 마시고 그러다가 나가라는 얘기였다. 나는 "12시 되려면 아직 멀었으니 조금 있다가 오세요"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찬송을 부르는데 10시 30분이 되니 교도관이 다시 왔다. 그래서 또 더 있다 오라 했더니 11시에 왔다. 나는 조금만 더 있다 오세요 하며 계속 찬송을 했다. 교도관이 11시 15분에 오더니 "이제 준비해야 한다. 나오시라"고 했다. 나는 이제 이들과 헤어질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셋이 모여서 마지막 기도를 했다. 동료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험한 곳이었지만, 정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출소한 후 세상으로 돌아온 나를 차마 글로 쓰지 못할 여러 가지 배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딱 마주치니까 그동안 다져온 마음의 평화가 와르르 무너졌다. 차라리 구치소에 있을 때가 나았는데, 나온 뒤에는 나락으로 더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조금씩 좋아지기는 했지만 2014년 6월까지 거의 멘붕 상태로 있었다. 그때 송태영이 매일 산으로 나를 끌고 다녔다. 밤에는 잠이 안 오고 불안하니 설교동영상을 보면서 잤다. 얼마나 많이 봤는지 지금은 목사님 보다 내가 설교를 더 잘할 것 같다. 전에는 신앙이라는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신앙도 역시 노력 속에서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지 뚝 떨어지는 신앙은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딸의 결혼 문제가 생겼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 결혼시켜야겠다고 생각해 3, 4월로 예정하고 막 서둘렀다. 나중에는 딸이 울면서 나를 쫓아내려고 하느냐고 힘들다고 문자까지 보냈다. 그나마 닦달을 해서 7월 5일로 결혼식날을 잡았다. 대법원 선고가 그 전에 잡히면 안 되는데 하면서 내심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대법원 선고일이 6월 26일로 잡혔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만약 판결이 안 좋은 결과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에 잠도 안 왔다. 그때부터 저녁 시간까지 약속을 잡고 놀러 다녔다. 6월 25일 대법원 선고 전날 저녁에는 친구들, 후배들과 압구정동에서 만났다. 10시 좀 넘어서 일어나는데 친구가 덕담한다고 "내일 하느님이 정의원에게 기적을 베풀라고 기도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지막 말이 걸린다. 하느님이 기적을 베풀어서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도하자고 했는데 만약 나쁜 결과가 나오면 하나님이 나쁜 분밖에 더 되냐, 그것은 아니다. 기도를 하려면 '내일 어떤 결과가 나와도 제게 순종하는 마음을 허락해주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고 받아들이도록 해 달라'라고 기도를 부탁한다"고 했다. 사실 그때쯤이면 우리가 모를 뿐이지 결과는 이미 다 나와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기도를 할 정도로 내 신앙이 상당히 정리가 돼있었다. 그동안 6개월 넘게 뮤지컬, 연기, 노래 공부를 했다. 영어학원에 다니고 등산도 다녔다. 어떤 때는 도산공원에서 리코더를 불었다. 그리고 백화점에 가는 낙도 배웠다. 시간 때우는 데는 백화점 가서 옷 구경하는 것 이상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미천한 자들에게 편지를 쓰다

또 한 가지 시작한 것이 사형수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지금은 좀 뜸해졌다. 내가 사형수들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성경책을 읽을 때 제일 마음에 꽂힌 것이 복음서 중 최후심판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 한다. 양은 천국을 의미하고, 염소는 지옥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에게 양이라고 얘기하면서 '너는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줬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줬고, 추울 때 입을 것을 줬고, 내가 아플 때와 감옥에 갔을 때 돌봐주었다' 하셨다. '주님, 저는 그런 적이 없거든요?' 그랬더니 '아니다. 가장 낮은 자에게 하는 게 나한테 하는 것이다' 하셨다는 구절이다.

구치소에서 나와 그 구절을 생각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가 누구일까 생각했다. 사형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위로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형수들과 편지를 주고받다보니 위로 받는 건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나였다. 어느 사형수의 편지다. 그는 내 편지에 답장을 안 하다가 아주 오랜만에 이런 답장을 보내왔다.

은총과 평화를 기도합니다.

책 '용서'에는 이타심에 대하여 자세하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달라이라마가 "몸이 몹시 아팠을 대 자신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를 기억하자 고통의 강도가 훨씬 줄어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247p)

바깥에서 살 때의 저는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는 단순무식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무슨 어려운 일이나 슬픈 일이 생겼을 때 무너지는 그 마음이 어떤 것일지에 대하여 잠깐이라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거나 배려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랬던 제가 감옥에 들어와 오랫동안 신앙 안에 살면서 달라졌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자신을 잃은 부모와 가족들의 참담한 심정이 저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한동안 잘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였습니다. 눈에서는 눈물도 자주 흘렀습니다. 제일이 아니었는데도 정말 미안했습니다. 감옥을 살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회복할 수 없었을 저의 소중한 감정들입니다.(그렇다고 제가 사형수가 된 것이 잘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9월 25일 아침에 의원님께 편지를 부치고 나서 치과 진료를 나갔는데, 은인표 형님께서 먼저 대기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2년 반 만의 만남이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의원님과 각별하게 지낸다는 말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급 호감이 생겼습니다. ㅎ~

이곳에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형제처럼 마음을 나누며 지내다가,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떠났지만, 저는 남았습니다. 이 얼마나 사람을 힘 빠지게 하는 일인지... 간혹 약속처럼 면회를 오거나 편지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습니다. 상처도 많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신부님이나 수녀님, 봉사자 여러분들이 아니라면 될 수 있으면 서신을 주고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제가 의원님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저에게 의원님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ㅎ~

이곳은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입니다. 오래 전에 의원님께서 이명박 대통령과 대립(?)하고 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청와대에 근무하다가 구속된 어떤 사람이 운동장에서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두언의원은 여야를 떠나서 말이 통하는 사람이다. 4차원 같은 면도 있지만 밀어 붙이는 힘이 세다. 상대가 누구여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다.'다 기억할 순 없지만 대충 이런 말들을 했습니다. 의원님과 같은 당이지만, 상대편 쪽 사람이었는데도 의원님을 아주 좋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살기 시작한지 17년이고, 64년생, 천주교 신자이며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입니다. 바깥에 부모님과 아내와 딸, 아들이 있습니다. 다들 면회오고 있습니다.

2014. 10. 7 OO올림

나는 10월21일 이OO에게 이렇게 답장을 썼다.

이OO님에게,

신은 어디 있을까요. 하늘에? 땅에? 우리 가슴 속에? 저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특히 남의 아픔을 공감할 때 그곳에 신이 계시다고 생각해요, 요즘. 특히 그곳에 다녀와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스 신화에 '일리아드'라고 있잖아요. 자기 동생을 잃은 아킬레스가 트로이의 장군 헥토를 죽이고 복수를 하지요. 그리고 시체를 끌고 왔어요. 그날 밤 아킬레스가 술을 먹고 있는데, 헥토르 아버지인 프리아모스 왕이 몰래 찾아오지요. 그려면서 울며 자기 아들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합니다. 그때 아킬레스는 자기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의 손을 잡고 함께 웁니다. 그의 아픈 마음에 공감을 한거지요. 영어로는 compassion이라 합니다. 나는 그자리에 신이 함께 한다고 믿습니다. 성경의 요한 일서 4장 12절을 보면 이렇게 쓰여 있어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니,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된다.' 놀랍지요? 우리는 서로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만나는 거지요. 예수님뿐 아니라 석가모니나 마호메드, 공자 님 같은 소위 성인들의 가르침도 결국 '공감' 이 한마디로 압축된다고 해요. 네가 남이 해주길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하라! 황금률이라고도 하지요. 나는 님의 편지를 읽으며 님의 아픔에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났어요. 그리고 내게 신을 만나게 해준 님이 고마웠어요. 우리가 살면서 모든 게 헛된 거 아니겠어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게 헛되도다. 하지만 남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사랑만큼은 절대 헛된 게 아니겠지요. 우리가 살다 가면서 남는 건 아무 것도 없지만, 우리가 나눈 사랑만큼은 영원히 남아 메아리친다고 생각해요. 신이 함께 했으니까요. 그리고 그게 우리가 사는 이유가 아니겠어요? 님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라고 이해해 주세요. 그럼 주님 안에서 늘 승리하기를 빌며....

2014. 10. 21 정두언 드림.

내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전말은 최후진술서(별첨)를 보면 상세히 알 수 있다. 2014. 6. 26 대법원은 내 사건에 대해 '무죄취지'의 환송판결을 내렸고, 10.21 서울고법은 최종적으로 나의 무죄를 확정했다. 그 후 대한민국 법무부는 나의 억울함에 대해 6,350만원의 보상금을 보내왔고, 나는 그동안 인생공부를 시켜준 신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로 그 돈 전액을 「나눔문화재단」이라는 한 작은 장학재단에 기부했다.

<글 싣는 순서>

연재를 시작하며 | 벌거숭이 임금님의 나라에서

1. 위기의 시절을 보내던 MB는 어떻게 서울시장이 되었나

2.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 청계천 복원에 협조하게 되었나

3. '좌파정책'인 대중교통개혁의 성공

4. MB 캠프의 태동

5. 안국포럼과 경선캠프의 실상

6.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 "이런 사람은 안 된다" 기자회견

7. 대선승부의 최대 걸림돌 'BBK 사건'

8. 왜 모든 정권은 비슷한 몰락 과정을 거치는가

9. 대선캠프의 변질

10. 백해무익한 정권 인수위

11. 인수위 시절의 어두운 비화들

12. 남북관계를 절단 낸 비밀 접촉

13. 한반도 대운하의 포기, 4대강 살리기로의 전환

14. 제18대 총선 한나라당 공천 작업의 내막

15. MB정부 인사실패의 교훈

16. MB정부 민간인 사찰의 겉과 속

17. 권력사유화 파동의 전말

18. 노무현 서거를 불러온 권력내부의 음모

19. 세종시 수정안은 왜 실패했는가?

20. 나는 왜 2010년 전당대회에 출사표를 던졌나

21. 자원외교, 무엇이 문제였나

22. MB정부의 경제정책이 실패한 이유

23. 외고 개혁이 절반의 성공으로 끝난 이유

______________________

※ 별첨 : 최후진술서

피고인 최후진술서를 통해 본 정두언 무죄 사건의 전모

 변양호 사건과 완전 판박이

 여타 정치자금 사건과 다른 점

① 돈을 돌려준 사실이 확인됨

② 임석을 회피하고, 이상득씨에게 패스함

 1심 판결의 지나친 편파성

 임석의 당초 진술 번복

 임석을 이상득씨에게 소개한 것이 공범이 되다

 검찰의 무리한 짜맞추기 수사

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재판정

 3천만 원 수수 건의 공소시효 조작

 검찰 측 증인도 부인한 1억 수수

 마무리: 변양호 신드롬

존경하는 재판장님과 두 분 판사님,

그동안 이 바쁘신 와중에서도 저의 재판을 자상하고 공정하게 진행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저로서는 할 말은 태산같이 많으나, 재판장님의 깊고도 넓으신 지혜와 명철을 믿고 가급적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변호사들께서 하신 변론과 다소 중복되는 면이 있더라도 법에 문외한인 저는 법적인 논리가 아니라 세상의 상식적인 논리로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 겨울 중 가장 추웠던 날인 1월 24일 현역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법정구속이 되어 지금까지 5개월 넘게 서울구치소에서 구금되어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구치소에서 오십년이 넘는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보며 참으로 소중한 성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처음에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거의 숨도 못 쉴 정도였습니다만, 차츰 시간이 가면서 제가 믿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정말 많은 죄를 짓고 살았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한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저의 인생의 주인인양 교만에 빠져 산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제게 특별히 세상의 밑바닥에서 새롭게 단련할 기회를 주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변양호 사건과 완전 판박이

그러던 중에 최근에 옛 재경부 고위관료였던 변양호씨가 쓴 「변양호 신드롬」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259일간의 구속기간을 포함하여 무려 4년 4개월간의 법정싸움 끝에 2가지 사건에 대해 모두 무죄를 받아내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신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쓴 책입니다. 변양호씨는 저의 고교 및 대학교 학과선배라는 인연도 있지만, 책을 읽다보니 바로 제 경우와 흡사한 점이 너무 많아 정말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어느 회계법인 대표가 대기업으로부터 수십억의 로비자금을 받아 자신의 가족들 계좌에 입금시켜놓고는 그 용처를 꾸며대면서 무려 6명의 고위관리들이 무고하게 구속되고 재판을 받으며 고통을 당한 사건으로서, 물론 대검 중수부에서 맡았던 사건입니다. 모두 6명 중 5명은 무죄를 받았으나, 연원영 전 자산관리공사 사장만이 유죄를 받았습니다. 그는 당초 검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사실을 인정해주면 불구속으로 해줄테니 법정에 가서 싸우라'는 검찰의 제안을 순진하게 받아들였다고 훗날 법정에서 주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저도 공무원출신이라 잘 압니다만, 공직사회에서 착하고 깨끗하기로 정평이 나 있던 연원영씨는 선고 후 복역 중에 간암이 발생하여 형집행정지상태에서 작고하셨습니다. 결국 화병으로 돌아가신 것이겠지요.

변양호씨는 그의 책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나라 검찰제도와 관행의 문제점에 대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그가 가장 강조한 대목은 우리나라는 검찰이 기소독점권 뿐만 아니라 기소재량권까지 가지고 있어 피의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인센티브구조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드릴 필요는 없으리라 봅니다. 그리하여 이런 구조 때문에 피조사자의 '진술의 임의성'이 항상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변양호씨는 저와 유사하게 3차례에 걸쳐서 돈을 받았다고 기소되었고, 돈을 받았다는 액수도 비슷합니다. 그리고 저와 같이 김모씨의 진술만이 유일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또 저와 같이 그 진술도 오락가락하여 전혀 신빙성이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중수부 과장과 수사검사는 이 사건의 부장과 과장이 되어 있습니다. 우연치고는 굉장한 우연이지요.

저는, 부끄럽습니다만, 이명박정부 출범의 일등공신이라는 소리를 듣다가 형님불출마선언을 주도한 이후로 지난 정부의 사찰대상 1호로서 늘 감시와 내사의 대상이었습니다. 제가 고분고분했다면 저는 이명박정부에서 누구 못지않게 영화를 누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당 내 소장개혁파의 리더라는 소리를 들으며 이명박정부에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특히 검찰개혁에도 앞장을 섰습니다. 지난 18대 국회에서 대검 중수부 폐지 및 공직비리수사처 신설 등 검찰개혁을 끝까지 주장한 최후의 3인방 중에서 한명은 과거의 불미스러운 일이 석연치 않게 갑자기 언론에 기사로 나오면서 스스로 불출마를 선언했고, 정태근 전의원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다 낙선함으로써 19대 국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유일하게 저 혼자였습니다. 그동안 검찰은 '눈엣가시'인 저를 단골표적으로 삼고, 웬만한 기업인이 구속되면 저와의 관련성 여부를 추궁하곤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정치를 하면서 몸가짐을 바로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미 벌써 어떻게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저축은행사건이 터지고 이상득씨가 조사를 받으면서 솔로몬 임석회장을 그에게 소개시켜 준 저를 드디어 엮어넣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검 중수부가 그동안 비난 받아 왔던 전형적인 표적수사, 물 타기 수사, 짜 맞추기 수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여타 정치자금 사건과 다른 점 ① 돈을 돌려준 사실이 확인됨 ② 임석을 회피하고, 이상득씨에게 패스함

제가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제 사건을 정치적으로 해석해 달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정치적인 의도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제 사건에 대한 수사자체가 부실수사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솔로몬 임석 때문에 사법처리 되었거나 사법처리중인 사건이 여러 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사건이 여타 사건과 뚜렷하게 다른 사항이 두 가지 있습니다. 이 점 재판장님께서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첫째, 저는 2008년 1월 말 유정한정식집에서 임석으로부터 받은 홍삼세트가 돈인 것을 알자 총리실 후배인 이OO을 통하여 돈을 돌려준 사실이 확인된 바가 있습니다. 또 저를 통하여 이명박 후보를 돕겠다는 임석의 요청에 응하지 않고 그를 이상득 부의장에게 소개시켜 주었다는 것입니다. 즉, 임석과 관련된 다른 사건과 달리 확실하게 거절한 행위와 함께 일종의 회피한 행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둘째, 제 사건은 임석의 진술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증거도 없으며, 심지어는 임석의 부하직원 등 그 어떠한 관계자의 관련 진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검찰은 조사 중에 주OO, 이OO, 박OO, 이△△ 등 임석의 비자금과 관련된 부하직원들에게 정두언에게 돈이 전달된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으나 모두가 모른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1심 재판에서 이렇게 주장을 하자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비서실 과장이었던 고OO이 돈을 준비해가면서 정두언과 만나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진술했다'며 저희 주장을 일축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OO이 진술한 그 사건은 2008년 1월말 유정에서 임석과 만난 후 돈을 돌려준 사건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것은 사실이었기에 고OO이 알았던 것입니다. 만약 제게 돈을 주었다는 다른 3건도 사실이었다면 고OO의 경우처럼 누군가는 반드시 알 수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저에게 돈을 갖다 준 것을 안다고 진술한 사람이 없습니다. 즉, 1심 재판부는 저에게 유리한 사실을 가지고 오히려 불리한 판단 근거로 삼은 것입니다.

1심 판결의 지나친 편파성

어쨌든 저희들은 당시 궁박한 처지에 빠진 임석 단 한 사람의 진술만을 토대로 꾸며짐으로써 부실하기 짝이 없는 기소내용에 대해 1심에서 조목조목 반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1심 재판부가 만든 100페이지가 넘는 판결문을 분석해 본 결과 저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저희가 검찰의 주장중에 모순이나 불일치나 의문이 있다고 지적한 사항들에 대하여 1심 판결문은 무려 27군데에 걸쳐서 3가지 유형으로 검찰의 주장을 옹호합니다. ①5년 전 일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착각을 일으켰다거나, ②일부 세부사항에 대하여 진술변경이 있으나 전체 공소사실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라거나, ③시간의 경과와 부정확성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식으로 검찰의 주장을 옹호하며 지극히 편향된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오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판사들'이라는 제목의 주요 일간지 칼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재판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1, 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전 안산시장의 뇌물수수사건에 대하여 대법원이 '검찰의 주장 중 모순이나, 불일치나, 의문이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고, 피고인에 대하여는 현미경의 잣대를 들이대며 입증을 요구하는 것은 형사재판부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는 취지로 파기 환송한 예를 들면서 '열 도둑 놓쳐도 억울한 한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칼럼을 통해 제가 1심 판결문을 보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저의 심정이 비단 내 자기편의적 사고의 소산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임석의 당초 진술 번복

제 사건의 유일한 증거라고 할 수 있는 임석의 진술이 본 2심 공판에서 상당 부분 바뀌고 있습니다. 사실 제 입장에서는 바뀐 것이라기보다는 사실대로 밝히고 있는 것이며, 그것도 핵심사항에 대해서는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주변사항만 눈치를 보며 진실을 밝히고 있어 답답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저로서는 임석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는 합니다. 저도 막상 난생 처음 수감생활을 해보니 '형을 1년만 줄여주면 친구라도 팔며, 5년만 줄여주면 마누라라도 팔겠다.'는 감방의 속설이 실감이 납니다. 이제야 1심이 끝나고 추가 고발건도 있는 임석의 입장에서는 저 정도라도 진실을 밝히려고 애를 쓰는 것이 참으로 보기에 안쓰러웠습니다. 임석은 이 2심 법정에서 과거에 검찰과 1심에서 그렇게 진술할 수밖에 없었고, 또 진술을 바꾸는 이유로서 다음과 같은 취지의 얘기를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① 그 당시는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자포자기 심정으로 진술 한 것 같다.

② 사실 검찰에서 그런 증언을 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관성이라든지 이런 부분에서 제가 그렇게 진술했다.

③ 제가 얘기하는 취지나 의도와는 다르게 진술된 부분들을 수정하고 그러기엔 저의 힘이 너무 미약했다.

④ 물론 제가 다른 점이 분명히 있었다. 근데 제가 다른 차원으로 얘기하면 더 어떤 그런 부분에 대한 것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제가 수정을 요구하고 원하는 대로 작성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⑤ 공무원이라는 게 징계를 받고 그러면 장래에 씻을 수 없기 때문에 제3의 피해자는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해서 총리실 이OO 실장이 하는 얘기에 맞는 거 같다고 말씀드렸다.

⑥ 제가 죄책감도 느꼈기 때문에 이번 2심이 마지막 재판이고 해서 추정 내지 정확치 않은 진술에 대해서는 올바르게 말씀드려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게 제 본분인 것 같아 말씀 드리는 것이다.

정말 어렵게 돌려서 말하고 있지만, 이 정도면 이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누구든 알 수 있는 게 아닙니까? 결국 검찰의 의도에 맞춰서 진술을 했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임석은 왜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두려워하면서도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나마 그리고 일부나마 진실을 밝히려고 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지난 주 6월 20일 오전 재판에는 당시 중수부 2과장께서 지금은 CJ그룹 수사를 맡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실 텐데도 불구하고 이 법정에 직접 나오셨습니다. 그 분을 보는 순간 제 마음이 철렁했는데, 임석은 오죽했겠습니까? 그 분이 왜 직접 나오셨겠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 증인신문 날인 지난 6월 27일에 임석은 그 이전보다 많이 위축된 모습을 보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재판장님!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대검 중수부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검찰개혁의 상징으로 왜 하필 중수부가 제일 먼저 폐지되었겠습니까? 그만큼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저는 제가 폐지를 주장한 중수부 열차의 막차를 타고 있는 마지막 승객인 셈입니다.

이제는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 가급적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당초에 이번사건을 신문보도를 통해 처음 알았습니다. 이상득씨를 수사 중인데 곧 저와 민주당 박OO의원도 수사할 예정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 사건과 관련해서 저는 언젠가 임석을 알게 되었는데, 2007년 대선기간 중에 그를 이상득씨에게 소개시켜 준 사실 밖에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수사를 한다는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때 마침 제 수행 비서였던 김OO이 지방에 가 있다가 저의 이OO 보좌관에게 전화를 하여 '의원님은 걱정 안 하셔도 된다. 2008년 초에 3,000만원을 받았다가 돌려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듣고 '그러면 그렇지'하고 있던 차에 대검 중수부에서 7월 4일이나 5일에 출두 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도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도 하고, 언론에서 하도 떠드니까 하루라도 빨리 결백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에 7월 4일에 출두하였습니다. 그리고 검찰조사 도중에 저의 혐의를 알게 되자 저는 '나는 뭔가 했더니, 그런 거였어요? 그렇다면 안심이 되네요.'라고 말했고, 검찰조서에도 그런 취지의 진술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겨우 그런 거였냐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결국은 유죄가 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임석을 이상득씨에게 소개한 것이 공범이 되다

먼저, 3억 공모부분입니다.

저는 임석을 이상득씨에게 소개시켜 준 일이 죄가 되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습니다. 앞서 제가 이 일에 대하여 일종의 회피행위였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런 표현을 쓰게 된 배경을 잠깐 설명 드리겠습니다. 당시 캠프 외부에는 제가 캠프의 핵심실세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제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후보를 돕겠다고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저는 적당히 처리하거나, 이 정도면 중요한 인사다 싶으면 종교단체 등 외부직능 조직의 인사들을 주로 챙기고 계시던 원로분들에게 소개를 시켜주곤 했었습니다. 저는 당시 캠프 내부의 전략 및 기획과 관련된 일만 전담하고, 캠프 외부의 일들은 대부분 원로분들이 챙기셨습니다. 이를테면, 당시 정OO의원이 직능본부장을 맡았지만, 국내의 대부분 직능단체장들은 정OO의원보다는 이상득씨를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상득씨는 주로 종교단체를 비롯해서 직능관련 일을 도맡다시피 하셨던 게 사실입니다. 임석도 그런 과정에서 이상득씨에게 소개시켜준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저의 전 직장인 총리실 후배를 통하여 알게 된 임석이 언젠가인지 이명박 후보를 돕고 싶다고 하기에 저는 통상적으로 그랬듯이 말을 자르고 이상득씨를 소개시켜주면 어떠냐라고 했더니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러고 말았습니다. 검찰조서를 보면 임석이 제게 '이명박 후보를 돕고 싶다고 했다'고만 진술되어 있습니다. 검찰은 애초부터 저를 공범으로 몰고자 했기 때문에 검찰조서에 얼마든지 경제적 도움이니, 재정적 도움이니 하는 표현들을 기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표현이 기재되지 않은 이유는 실제로 임석 자체도 제게 그렇게만 얘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임석이 그렇게 얘기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제가 그 이상의 얘기를 할 여지를 주지 않고 이상득씨를 소개시켜주겠다며 말을 잘랐기 때문입니다. 그 후, 저는 그 일을 차일피일 미루었으며, 아마 임석으로부터 몇 차례 더 채근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대화는 '이상득씨 언제 소개시켜 줄 거예요?', '미안해요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하는 정도 이상이 전혀 필요치 않았습니다. 굳이 경제적이니 뭐니 하는 얘기가 나올 여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이 법정에서도 임석은 당초 경제적인 취지의 얘기 정도도 없었다고 하다가, 나중에 계속 추궁을 당하자 얼결에 그렇다고 시인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구나 미래저축은행 김찬경 사건에서 김OO씨는 김찬경으로부터 '피고인 이상득에게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도 만남을 주선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OO씨는 입건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이 점 또한 고려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적법하게 하는데 왜 부담스럽게 생각했느냐 하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공무원 생활을 20년 넘게 했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또 적법하게 하더라도 정치인들은 괴로움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굉장히 친한 척 팔고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귀찮은 상황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적법하게 처리해도 제가 믿는 사람이 아니면 저는 기본적으로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임석은 제가 그를 잘 모르기 때문에 부담스럽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던 저는 소개시켜준 총리실 후배의 체면도 있고, 또 저렇게까지 하는데, 한나라당이 취약한 호남 출신인 임석이 대형 저축은행 회장이기 때문에 대선에 뭔가 도움이 되겠지 하는 마음에 임석을 국회부의장실에서 만나자고 한 것입니다. 저는 그때만 해도 이상득씨를 만나려면 직접 사전약속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수행 비서인 김OO에게 '부의장님 언제 뵐 수 있는지 알아 봐라' 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날도 임석을 바로 부의장실에서 만났기 때문에 사전에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임석에게 시간, 장소를 알려준 것도 당연히 김OO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임석회장이 돈을 준비해 해오는 것을 알면서도 소개시켜주려 했다면, 감히 약속장소를 국회부의장실로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임석은 평소에 어떤 식으로 하는지는 몰라도 '그날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일단 돈을 준비해가자'고 생각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검찰은 '이명박후보를 돕고 싶다'는 임석의 발언취지를 재정적인 도움으로 이해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저는 1심법정에서 '정확하게 당시 상황이 기억나지 않지만, 임석 입장에서 여러 가지 도움이라는 게 있을 수 있고, 설령 그 말을 재정적인 도움을 준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치더라도 특별당비, 후원금 등 적법한 절차에 따라 돈을 받으면 문제가 없는 것이며, 저는 어쨌든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이상득씨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한 것이다'라고 진술 했듯이 당시 제가 임석의 발언 취지를 반드시 재정적인 도움으로 이해했다고 단정 할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제 진술은 기억에 의한 진술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지금의 생각을 얘기한 것이지, 그때 상황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검사나 변호인이나 판사님께서 물어보면 '그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대답을 한 것이지 제가 그것을 시인한 기억은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OO은 1심 법정에서 '임석한테 경선 전에 돈을 주는 게 낫겠다.'라고 얘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재정적인 도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두언 의원이 훌륭하고 임석도 훌륭하기 때문에 알고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소개 시켜주었습니다.'라고 얘기하는데 저는 이렇게 얘기 하는 게 더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억은 안 나지만 그럴 수도 있겠으면 '그럴 수 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대답한 것이지 시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설령 임석이 당시에 경제적인 도움이라는 취지의 얘기를 했다손 치더라도, 제가 듣기를 원하지 않는 얘기를 할지 모르니 제 귀를 막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이유를 들어 '결국 공모의 정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당시 대선의 핵심적인 지위에 있던 저는 지금과 같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렇게 했어야 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① 가급적 아무도 만나지 말아야 하고, ② 누굴 만나더라도 가급적 아무 얘기도 듣지 말아야 하고, ③ 나아가 무슨 얘기, 특히 경제적 운운의 얘기를 들으면 절대로 아무도 소개시켜주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밖에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거라는 게 결국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소개시켜주는 사람장사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런 현실을 고려한다면 제게 책임을 지우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무리하자면, 저는 임석으로부터 이명박후보를 돕고 싶다는 얘기 이상을 듣지 않았으며, 그런 상태에서 이상득씨를 소개시켜준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하늘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검찰의 무리한 짜맞추기 수사

최초의 검찰조서를 보면 검찰은 3억 부분에 대해서 저를 공범으로 만들기 위해서 당초에 3가지 장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①임석이 사전에 돈 얘기를 했다. ②임석이 있는데서 이상득이 정두언한테 권OO에게 돈을 전하라고 했다. ③돈을 정두언 차에 실을 때 정두언이 있었다. 그런데 ③번은 나중에 김OO 진술을 들어보면 너무 신빙성이 없는 얘기입니다. 제 카니발은 뒤 트렁크에 그런 것을 실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임석이 대질신문 때 '그때 정두언의 인기척이 있었던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카니발은 뒤에 트렁크 문을 열면 제 머리가 딱 보입니다. 너무 말이 안 되니까 ①, ②번의 신빙성에까지 나쁜 영향을 줄 것 같아서인지 나중에 검찰은 '임석이 기억이 안 나는 것'으로 물러섰습니다. ①번 사전에 돈 얘기가 없었다는 것은 임석이 이 법정에서 어렵게나마 이미 진술 했고, ②번 이상득씨가 임석 앞에서 제게 권OO에게 돈을 전하라고 했다는 얘기는 현역 정치인들이 들으면 모두 소가 웃을 소리라고 할 정도로 정치권의 상식으로는 어처구니가 없는 얘기입니다. 임석은 2011년 말에 제게 이상득 부의장이 권OO에게 전화하는 걸 들었다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권OO 얘기를 하길래 어떻게 권OO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이상득 부의장님이 권OO한테 전화하는 것을 제가 들었거든요'라고 저한테 분명히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의 변호인이 임석한테 물어보니까 임석은 이 법정에서 '당시 이런 말씀을 전혀 안 드렸는데 제가 그런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제가 정의원님께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시인하기도 했습니다. 제 추측은 임석이 처음 검찰진술에서 저에게 얘기한대로 진술을 했는데, 완전하게 저를 공범으로 만들기 위해서 제가 있는 자리에서 얘기를 한 것으로 조작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③번 돈을 차에 실은 경위와 관련해서 수행비서 김OO이 임OO로부터 임석이 뭘 주면 권OO 의원에게 전하라는 지시 내지 부탁을 받았다는 사항은 이미 김OO, 임OO 등의 증인신문을 통해서 보셨습니다. 임OO는 1심에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면 될 것을 굳이 김OO을 잘 모른다며 '도둑이 제 발 저린' 식으로 얘기를 했다가, 나중에 김OO의 결혼식 때 낸 그녀의 축의금 봉투가 나오는 바람에 거짓말한 것이 들통이 났습니다. 사실 임OO는 제가 잘 압니다. 김OO을 몹시 예뻐했습니다. 그렇게 동생처럼 예뻐하던 김OO을 '김OO인가, 김△△인가'라는 식으로 진술을 하길래 저는 굉장히 놀랬습니다. 임OO는 본인이 떳떳하지 못하니까 거짓말까지 해가며 과잉부인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재판정

재판과정에서 제가 참으로 답답했던 부분 중의 하나는 검찰이나 상피고인 변호인들이 임석에게 '돈 전달된 것을 왜 확인하지 않았느냐', 김OO에게 '정두언이나 임OO 등에게 왜 보고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하는 질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상득 부의장이 권OO에게 돈을 지원하려면 당연히 당사자끼리 통화를 하지요. 그러면 심부름하는 사람은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무엇을 보고하고 확인하겠습니까. 만약에 배달사고가 나면 권OO이 왜 안 오냐고 해서 금방 들통이 날 텐데 그걸 굳이 보고하고 확인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동대가 있다고 하는데 김OO이 전달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A4 박스입니다. 아마 A4 박스는 여의도 사무실에 하루에도 수십 통씩 들어갈 겁니다. 그러니 그게 기동대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정말 답답했습니다. 더구나 김OO이가 저에게든 누구에게든 제가 이러이러 해서 저러저러 했습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 왜냐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불안해집니다. '이 친구 봐라. 왜 이렇게 아는 척을 하지? 이 친구 좀 이상한데...' 라고 의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런 언행으로 인하여 인간적인 신뢰가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김OO이 이상득 부의장실과 당시 대선의 실질적인 회계책임자였던 김XX씨와의 사이에서 수차례 돈 심부름을 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돈 심부름을 김OO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의 사실 확인서는 1심에 제출한 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김OO이 그런 심부름을 한 것을 1심 재판 중에 처음 알았습니다. 만약 그 당시 김OO이 저한테 일일이 그 사실을 보고해서 제가 알았다면 저는 당장 중단시켰을 것입니다. 그렇게 떠벌리고 다니는 친구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것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2002년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 때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 옆에 있었던 유일무이한 현역 정치인이었습니다. 당시 서울시내 48개 지구당 위원장들 중에 이명박 후보를 돕는 위원장은 저 혼자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전부 저한테 말했습니다. 이명박이 지는 선거인데 왜 거기 가서 돕냐며 저희 집사람까지 말렸습니다. 그런데 결국 저희가 이겼습니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도 이명박 후보를 돕는 현역 국회의원은 2006년 말까지 유일하게 저 혼자였습니다. 이상득씨도 드러내놓고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007년 당시까지만 해도 이상득씨는 저의 후원회장이자 아버지요, 큰 형님 같은 존재였습니다. 한마디로 이명박 대통령 후보, 이상득씨, 저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김OO은 인사성이 밝고 성격이 좋아서 당시 대선캠프에서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전부 'OO아, OO아'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상득 부의장실 보좌진들과는 당연히 한 식구처럼 지냈을 때입니다. 그것은 부의장실 식구들이 더 잘 알 것입니다. 김OO이 그런 심부름을 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는 게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저는 전략기획 총괄팀장이었기 때문에 캠프 아니면 당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지 차를 탈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상득씨가 얘기한 것처럼 김OO은 기사가 아니라 캠프 요원으로 여기저기 심부름 다니고 사람들이 부르면 가고 그랬지, 저를 운전 할 일은 퇴근할 때 집에 바래다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런 현실은 잘 모르니까 참 답답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제가 소개시켜준 사람으로 인하여 이상득씨가 지금 고통을 받고 계시는 점에 대해서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 분도 구경도 못해본 돈 때문에 이런 고충을 겪는 것은 정말 억울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득씨가 무죄가 되려면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상피고인 변호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제가 파렴치한이 되어야 합니다. 돈을 중간에서 가로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말이 안되는 게 제가 처음부터 임석에게 '너 도대체 왜 그러냐' 물었을 때 돈 얘기를 하면 그냥 제가 받으면 되지, 복잡하게 일을 만들어 가로채겠습니까. 변호인들도 저를 그렇게 생각해서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그렇게 얘기를 한 것일 겁니다. 제가 파렴치한이 되던가 아니면 너무 많은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저부터 시작해서 김OO, 임석, 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거짓말을 하려면 서로 맞춰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실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까 유세지원단 얘기가 나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예비등록을 했기 때문에 이미 선거는 공식적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유세지원단도 벌써부터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도 피고인이니까 말은 못하고 답답하게 앉아있는 것입니다. 사실 전혀 다릅니다. 제가 너무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공식 선거 운동 기간 이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며, 엉뚱한 얘기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천만 원 수수 건의 공소시효 조작

다음으로 나머지 개인부분 3건에 대해서는 워낙 사실무근의 실체가 없는 사안들이기 때문에 간략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3000만 원 선물세트 부분은 임석과 제가 만난 횟수, 만난 시기, 같이 만난 사람, 선물세트를 전달한 시기 및 방법 등 어느 한 가지도 분명한 게 없이 오락가락 합니다. 심지어 임석은 이 법정에서 둘만 만났을 때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까지 합니다. 완전히 헷갈립니다. 저는 선물세트를 건네준 시기에 관한 검찰의 조사내용이 제 사건의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임석에 대한 검찰의 3회 진술조서를 보면, 검사가 법인카드 내역을 보여주며 2007년 9.12, 7.3, 6.26, 6.18이 있는데 어느 거냐고 묻자, 임석은 한나라당 후보가 확정되기 전에 돈을 준 것은 명확하게 기억이 난다고 하며 2007. 9. 12은 아닌 것 같다고 진술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남은 게 7.3, 6.26, 6.18이 남지 않습니까. 법인카드만 썼다고 하더라도 현금을 쓰거나 다른 카드를 쓰거나 다른 사람이 낸 경우를 다 제쳐놓고 7.3, 6.26, 6.18이 남는데, 이 조사를 한 날짜가 2012. 6. 23입니다. 이미 시효가 지난 것입니다. 조사는 했으나 쓸모없는 물건이 나온 것이지요. 그날 전후로 아마 검찰 내부에서는 소동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상상이 됩니다. 그리고는 검찰은 2012. 7. 2에 총리실 이OO을 불러 조사를 하면서 경선 후에 만났다는 그의 진술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코자 합니다. 임석은 이 법정에서 이OO의 징계문제 등을 걱정해서 그의 진술에 동의해주었다는 취지로 진술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지금 공소시효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검찰이 이처럼 짜 맞추기 수사를 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임석이 왜 이OO의 신상문제에 대해 걱정을 했는지 그 배경에 대해 잠깐 설명드리겠습니다. 임석과 이OO은 오래된 절친 사이입니다. 이OO은 제가 동생처럼 아끼던 제 전 직장인 총리실의 후배이고요.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이 터지고 난 직후 이OO의 태도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OO으로부터 먼저 '형, 큰일 났어. 어떻게 됐어?'라고 걱정하는 전화가 와야되겠지요. 그런데 연락은커녕 제 연락조차 안 받는 것입니다. 연락을 해달라고 해도 안 해주고 연락두절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낌새가 이상했습니다. 이OO이 무슨 곤란한 상황에 있는 모양이구나 하고 직감을 했지요. 곤란한 상황이라는 게 결국 임석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임석은 이OO의 진술에 맞추어주지 않고 부인하면 이OO이 곤란해질 거라고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OO은 이미 공무원으로서는 최고직위인 차관급으로 승진해 있습니다. 임석이 더 이상 이OO에 대해 우려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검찰 측 증인도 부인한 1억 수수

둘째, 2008년 총선 무렵의 1억 부분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임석은 그의 운전기사 주OO과 진술이 너무 많이 다릅니다. 임석은 당초 1회 갔다고 했다가 이OO과 함께 간 사실이 드러나자, 혼자 1회 더 갔다고 한 반면에 주OO은 계속 1회 갔다고 합니다. 주OO은 따라간 차가 검정색 카니발이라고 거듭 진술한 반면에 임석은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누구의 귀띔을 받았는지 은회색, 하늘색이라고 합니다. 임석은 자신의 차를 앞에 댔다고 한 반면에 주OO은 뒤에 댔다고 하면서, 임석이 A4박스를 차에 둔 채 내렸고, 돈을 전달하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궁박한 취지에서 인센티브 구조 하에 있던 임석의 진술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주OO의 진술 중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합니까. 더구나 주OO은 1심에서 검찰 측의 증인으로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주OO은 1심에서 왜 당시 검찰에서 그런 식으로 진술을 했냐고 하니까 '임석 회장이 이미 진술했다고 해서 제가 진술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증언합니다. 주OO도 가급적 임석의 진술에 맞추려고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임석이 저희 사무실에 갔다거나, 차를 따라 갔다거나 하는 큰 부분에 대해서는 주OO도 가급적 맞추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도저히 안 맞는 것입니다.

셋째, 2012년 총선 당시 1천만 원 부분입니다. 임석은 이와 관련해서도 3차례의 진술내용이 다릅니다. 결국은 돈을 돌려주기에 놓고 나왔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다시 돌려주었거나 많은 돈도 아니니 후원금처리를 하였을 것입니다. 당시는 고액후원금도 많이 들어왔었고 후원금 한도에서도 여유가 있었을 때입니다. 이 자료는 1심 재판부에 이미 제출을 했습니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이△△ 의원은 임석으로부터 1,000만원 인가를 받아서 후원금처리 했다고 지난 주 그의 재판에서 증언했습니다.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희 변호인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비서실 과장 고OO이 1억 원 박스를 준비했다는 진술을 토대로 저에게 1억 원을 전달했다는 것인데 이△△ 재판이나 박△△ 재판이나 제 재판에 고OO의 박스가 공통적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변호인이 관련해서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이 부분은 재판장님께서 유심히 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무리: 변양호 신드롬

존경하는 재판장님! 줄이고 또 줄였는데도 불구하고 얘기가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제가 모두에서 언급한 변양호씨는 그의 책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금 우리 곁에 연원영 사장이 안 계신 것도 슬프지만, 우리사회에 특히 관가에 '변양호 신드롬'이란 얘기가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 슬프다'고 말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변양호 신드롬'이란 공직사회에서 '무언가 잘 해보려고 개혁적인 일을 하다가는 꼭 뒤끝이 안 좋다. 그러니 대강 안전하게 가자'는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저는 우리 정치권에서 그래도 할 말은 하고, 여당 내에서 쓴소리를 마다않는 국회의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의 언론기사나 사설에 '여의도 정치가 사라졌다', '여당은 눈치보기만 한다.' 등등의 지적들이 종종 눈에 띕니다. 실제 지금 여당에서 소장개혁파는 사라져버렸습니다. 동료의원들도 제게 면회를 와서는, 물론 덕담이겠지만, 정두언이 없으니 여의도가 너무 조용하다고들 합니다. 제가 과대망상인지는 모르겠으나 혹여나 제 사건으로 인하여 정치권에서 '정두언 신드롬'이라는 용어가 통용된다면, 그것은 저 개인의 불행을 넘어 정치권 전체, 그리고 국가 전체에 크나큰 손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재판장님께서 이 점 깊이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살다보니 가장 고통스러울 때가 억울하게 누명을 쓸 때와 나를 대적하는 누구를 원망하며 증오할 때인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을 통해 거듭날 수만 있다면 오히려 이 고난이 축복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또 저를 이런 궁지에 몰아넣은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얼마 전 구치소에서 이름도 모르는 어느 교도관이 지나가는 제게 흰 종이로 곱게 싼 네잎 클로버를 주고 가셨습니다. 저는 순간 천사가 왔다 갔나 생각하며 망연히 서 있었습니다. 지금 저의 가족과 지인뿐 아니라 국회에 있는 동료들과 지역구에 있는 주민들이 제가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예뻐서라기보다는 제게 부여할 사명이 그만큼 많아서 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재판장님께서 공정하고 현명하게 판단하실 수 있도록 지혜와 명철을 주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의 결백을 밝혀주시면 반드시 '용기와 소신을 가진 괜찮은 정치인'이 되어서 꼭 보답하겠습니다. 두서없는 저의 얘기를 경청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3. 07.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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