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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에 얽힌 이야기 3가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고대 이후 남자 나체 조각상 중 가장 큰 작품이다. 무려 크기가 받침을 제외하고 410cm이다. 이 조각상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성 때문이다. ‘다비드’의 뒷이야기를 만나보자.

1. 미켈란젤로는 먹고 마시는 일도 거르면서 작업했다.

“미켈란젤로는 예술계의 거장으로서 신화적인 자리에 올라서기는 했지만, 그의 덩치가 작았다는 것 – 그의 키는 155센티였다 –을 생각하면, 이 작업이 그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전체를 봐가면서 작업을 하는 일은 불가능했고, 작업을 위해서 3단짜리 비계(높은 곳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한 가설물 – 옮긴이)가 필요했다. 대리석을 기울일 수 있었다면 위에서 내려다보며 작업할 수 있었겠지만, 돌이 너무 커서 그렇게도 할 수가 없었다. …. 대리석이 그리 두껍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미켈란젤로는 한 번만 손을 잘못 움직여도 작품 전체가 망가져버릴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씻는 것은 고사하고 먹고 마시는 일도 거르면서 작업에 매달렸는데, 일어나서 바로 작업하기 위해 옷을 입은 채로 신발까지 신고 그대로 작업실에서 잔 적도 있었다.” (책 ‘세계명화 비밀’, 모니카 봄 두첸 저)

위대한 작품에는 창작자들의 고통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림과 달리 조각은 훨씬 힘들 수밖에 없다. 특히 ‘다비드’처럼 큰 조각상은 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계속해서 균형을 맞추어 가야하고, 엄청난 양의 대리석 가루도 마셔야 한다. 미켈란젤로 역시 그러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며 작업을 했다니 그의 열정과 고난이 함께 느껴진다.

2. 처음 선보일 때 청동 무화과 화관으로 조각의 성기를 가렸다.

“사실 여부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바사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피렌체 행정부의 수반이었던 소델리니가 작업의 진행을 살피기 위해 현장에 나왔을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작품의 코를 좀더 다듬으면 좋을 것 같다는 소델리니의 말에, 미켈란젤로는 그 말을 듣는 척하면서 코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냥 들고 있던 대리석 가루를 조금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델리니는 그 결과게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현장에서 몇 가지 사항이 추가되었다. 우선 나무 그루터기와 늘어진 가죽끈에 금박을 칠하고 황금 화관을 다비드의 머리에 씌웠다(이 셋은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다). 또한 스물여덟 개의 나뭇잎이 달린 청동 무화과 화관을 만들어서 조각의 성기를 가렸는데, 이는 성당위원회의 요구 사항이었다. …. 1504년 9월 5일, 미켈란젤로는 계약금 중 남은 금액을 마저 받았고, 소델리니가 곤팔로니에레의 자격으로 명명식을 거행함으로써 ‘다비드’는 명실상부한 공화국의 상징물이 되었다.” (책 ‘세계명화 비밀’, 모니카 봄 두첸 저)

‘다비드’는 이후 여러 우여곡절을 겪는다. 조각의 받침에 벼락이 떨어지기도 하고, 메디치가 추종파와 공화파 사이에 격렬한 다툼이 벌어지면서 건물에서 날아온 의자 때문에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메디치가가 다시 집권하면서 그들의 기피 인물이었던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를 떠났지만, ‘다비드’는 꿋꿋이 광장을 지키며 공화국이 아닌 메디치 왕조를 상징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조각이지만 참으로 파란만장한 경험을 하였다. 그런 내용들이 지금까지 전해오면서 ‘다비드’ 감상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3. 노골적인 나체는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요즘처럼 자유분방한 시대에도 미켈란젤로 조각상의 노골적인 나체는 종종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예를 들어 ‘데일리 스타’의 1986년 기사에 따르면, 전시된 ‘다비드’를 보고 여학생들이 키득키득 웃는 것을 본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서는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방문할때를 대비해 30센티미터짜리 나뭇잎을 제작해서 따로 상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7년에는 사진작가 리 앤드루스가 자신의 누드 사진 가운뎃부분에 ‘다비드’의 성기 부분을 편집해서 남성에 대한 전통적인 재편 방식을 비꼬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캠브리지에서 ‘사기꾼들’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전시회를 주관했던 홍보회사에서는, 포스터에 문제의 작품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성기 부분을 무화과 잎으로 가리지 않으면 그 포스터를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1995년, 다비드의 예루살렘 정복 3천 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피렌체에서 ‘다비드’의 복제품을 예루살렘에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예루살렘측은 그 작품이 보수적인 유대인 사회에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책 ‘세계명화 비밀’, 모니카 봄 두첸 저)

예술 작품 속 나체는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곤 한다. 흔히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는 지점이다. 사실 ‘다비드’를 보고 외설스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워낙 큰 조각상에 벌거벗은 신체를 상세히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남성의 성기가 눈에 ‘잘’ 띄는 것은 사실이다. 그로 인해 다양한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먼 훗날에도 ‘다비드’를 둘러싼 비슷한 에피소드는 존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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