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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 3명

십자군 전쟁은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고 그 지역에 기독교 국가를 세우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11세기 말부터 약 200년동안 8회에 걸쳐 끊임없이 싸운 이 역사적인 사건은 오래전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극심해지고 있던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치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실 그러한 종교적 갈등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이슬람 급진세력에 의한 테러공격 등의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 십자군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전투와 싸움을 견디고 영웅으로서 명성을 날린 이들은 기독교 또는 이슬람 세력의 찬양 혹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이 남긴 업적과 어록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교훈을 주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쓴 ‘십자군 이야기’는 이러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시오노 나나미가 ‘십자군 이야기’에서 소개하는 영웅들을 일부 소개한다. 총 3부작으로 되어있는 긴 책인 만큼 본 글에서는 1권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활약한 이들을 소개할까 한다. 당시 기독교 세력에게 있어서 제1차 십자군 원정만큼 영광스럽고 멋진 기억은 없을 것이다. 기독교 세력의 영웅들이 내분 등으로 인해 기독교 세력에 대항하여 단합하지 못하고 있는 이슬람 측의 상황을 잘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1. 보에몬드

“이 보에몬드라는 남자는 이상하게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게다가 그리스도교도뿐 아니라 이슬람교도 여자들한테까지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전체적으로 키가 큰, 유럽에서 온 제후들 속에 섞여 있어도 머리 하나만큼은 더 크고, 금발이며, 몸은 마른 편이나 탄탄한 체격이다. 파란 눈으로 쏘아보듯 사람들을 바라보고, 당당한 행동거지는 자존심이 세다는 것을 보여주며, 거친 성격이면서도 냉정하고 교활하다. 그러면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을 풍긴다.”(책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저)

풀리아 공작 보에몬드 디 알타빌라는 당시 유럽 전역으로 세력을 빠르게 확장해나가고 있던 노르만족으로 이탈리안 남부에서 왔다. 한때 비잔틴제국과 싸우기도 했었으나 영지를 획득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듣고 비잔틴제국 황제의 부탁에 응하여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였다. 그만큼 사리사욕이 사로 잡혔던 인물이었지만, 냉정함도 겸비하여 주변 상황을 침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보에몬드는 안티오키아 공성전에서 적군의 탑 가까이 자신의 탑을 세우고, 그 탑을 통해 상대측 부대장(이슬람교로 개종한 그리스도교)을 회유하는데 성공하여 안티오키아 성문을 열고 일방적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이후 안티오키아 공작령을 통치하게 된 보에몬드는 인근 지역을 정벌하러 나갔다가 이슬람측의 인질로 붙잡히기도 하지만, 자신의 석방금으로 내걸린 터무니 없는 액수를 자신이 직접 교섭하여 절반 이하로 줄이고 풀려나는 등 교섭가로서의 재능도 발휘했다.

2. 탄크레디

“지금도 유럽인들, 특히 남유럽 사람들은 탄크레디라는 이름을 들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신의가 두텁고 생기 넘치는, 영원한 젊은이를 떠올린다.”(책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저)

탄크레디는 노르만족으로 자신의 백부인 보에몬드를 따라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 인물이다. 원정에 처음 참가했을 때의 나이가 막 이십대에 접어든 무렵이었으며, 보에몬드가 선별한 정예군 중에서도 최고의 전사로 여겨졌다. 탄크레디는 예루살렘을 점령할때까지 이슬람군을 상대로 용맹하게 싸웠으며, 예루살렘 정복 후에도 예리코, 나블루스, 나사렛, 티베리아스와 요르단강을 지나 다마스쿠스 직전까지 달하는 광대한 지역을 단 24명이라는 적은 병력으로 점령하는 신기를 부리는 등 전술가의 면목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 공적으로 갈릴리 공작의 지위를 인정받고 그 일대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안티오키아와 에데사 등에 대한 섭정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하였으며, 통치권을 본래의 통치자에게 돌려줄 때도 큰 미련을 보이지 않는 등 의리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탓일까, 탄크레디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하고 만다. 당대의 기준으로 따지면 사실 그렇게 이른 죽음은 아니었지만, 탄크레디는 지금까지도 젊음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조아키노 로시니의 오페라 ‘탄크레디’ 등 그의 젊음을 찬양하는 작품 등으로 젊은 시절의 탄크레디는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다.

3. 고드프루아

“교황 우르바누스가 총대장으로 고려하지 않았음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총대장으로 여겨지던 사람이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다.” (책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저)

고드프루아는 현재의 벨기에 지역을 통치하던 로렌 지방의 영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제후였다. 따라서 당시 황제와 대립관계에 있던 그레고리우스 교황을 로마에서 내쫓는데 일조하고 황제파를 따르는 대립교황을 세우는 것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 이유인지 자신의 적이나 다름없는 우르바누스 교황(그레고리우스 교황의 후임)이 십자군 원정을 제창했을 때, 이에 응하여 원정에 참가하였다. 이후 고드프루아는 수많은 전투를 치루고 원정에 참가한 다른 제후들 간의 불화 등을 지혜롭게 조정하면서 자연스럽게 제1차 십자군 총대장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탁월한 용병술과 외교력을 발휘하여 팔레스타인의 점령 및 안정화 작업에 일생을 바쳤다. 그의 탁월한 능력과 겸허한 자세는 주변 제후들의 존경심을 사로잡았고, 결과적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그를 예루살렘의 왕위에 앉히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는 제1대 예루살렘 ‘성묘의 수호자’로 취임하였다(고드프루아는 ‘왕’보다 ‘성묘의 수호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당시 성직자들의 반발을 예방하였다). 시오노 나나미의 평에 따르면 만약에 고드프루아가 없었다면 제1차 십자군이 성공했을지 의문이 갈 정도라고 한다. 그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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