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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훅 총기 난사 사건에서 범인이 가장 먼저 죽인 사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 박세회
  • 입력 2016.12.16 14:59
  • 수정 2016.12.16 15:01

애덤 랜자가 처음으로 쏜 사람은 자신의 어머니였다.

매년 샌디 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 터졌던 날이 돌아오면 미국은 그날의 사건을 되새긴다. 그건 미국의 의무다. 아무도 4년 전 12월에 애덤 랜자가 코네티컷 주 뉴타운의 자신이 다녔던 초등학교에 들어가 총을 난사했던 끔찍한 사건을 정상적인 상태로 여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한다. 대중이 빼앗긴 삶을 인지하고 슬퍼할 수 있도록 온라인과 현실에서 기념비가 나타난다. 종이 26번 울린다. 초를 26개 켠다. 올해 CNN 앵커 제이크 태퍼는 26명의 이름과 사진을 트위터에 올려, 상상을 넘어선 상실에 얼굴을 부여했다.

26이라는 숫자는 살해 당한 어린이 20명과 아이들을 구하려다 사망한 성인 6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비극의 희생자 집계에는 한 생명이 빠져있다. 낸시 랜자다.

그 날 애덤에게 처음으로 살해 당한 피해자는 애덤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이 이야기에서 완전히 지워져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샌디 훅 학살의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이건 집에서 시작된 사건이라는 점이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총기 난사 사건의 상당수는 자신의 가족을 표적으로 삼은 범인들에 의해 벌어진다는 강력한 증거를 무시하는 셈이다.

12월 14일 아침에 랜자가 다중 살인을 저지르러 초등학교로 차를 몰고 가기 직전, 그는 침대에 있던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다. 몸에 총을 네 방 쏘았다. 애덤 랜자의 아버지는 이 행동이 굉장히 상징적이라고 생각했다.

피터 랜자가 2014년에 뉴요커에 말했듯, 그는 한 발 한 발이 가족원들을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낸시를 네 번 쏜 것은 우리 한 명당 하나씩이었다. 낸시 한 발, 애덤 한 발, 라이언 한 발, 나 한 발.”

낸시가 피해자 집계에서 체계적으로 지워진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아들의 끔찍한 행동에 대해 부분적으로나마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그녀를 증오했다.

그 학살에서 살해 당한 다른 사람들, 즉 무고한 어린이들과 그들을 지키려던 용감한 성인들과는 달리, 그녀는 불완전한 피해자였다. 그녀는 아들이 학살을 저지르러 들고 나간 총을 구매했다. 사격장에 데려가 총기에 대한 애덤의 흥미를 키워주었다. 그녀는 애덤이 얼마나 아픈지 몰랐다. 어머니로서,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랐다 해도 그녀만큼은 아들이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걸 알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낸시가 아들의 폭력의 첫 피해자가 되기 전, 그녀는 아들을 돌보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애덤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세상에서 기능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녀의 삶의 중심이었다.

애덤은 발달 장애가 심했고, 소리와 냄새에 굉장히 예민했고, 심신을 약화시키는 공황 발작에 시달렸다. 총격 사건의 주 검사 보고서에 의하면 낸시는 ‘아픈 아들 때문에 일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총격자가 어떻게 될지 걱정했다.’

애덤이 14살일 때 검사했던 예일 대학교 아동 연구 센터의 정신과 의사는 애덤이 낸시의 행동을 깊이 통제한다고 했다. 애덤은 낸시에게 문 손잡이 같은 금속 물건은 세균투성이라며 만지지 못하게 했다. 낸시가 하이힐을 신으면 발 소리가 너무 크다고 불평했다. 낸시가 저녁 식사를 요리하는 냄새에 애덤은 굉장히 불안해 했다.

낸시는 ‘거의 자신의 집에서 죄수가 되어가고 있다’고 의사는 결론내렸다.

2013년에 코네티컷 주 기관은 애덤의 삶에서 그 동안 있었던 위험 신호와 예방할 수 있을지도 몰랐던 기회가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 결과물인 114페이지 보고서는 애덤의 부모가 ‘애덤의 장애의 깊이와 그 의미, 계속되는 지원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 결론내렸다.

그렇지만 애덤의 문제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건 애덤의 부모들만이 아니었다.

‘교육과 의료 기관이 대응하며 약점과 실수를 보인 것’이 애덤의 상태를 악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한 조사 결과는 ‘이해심을 갖고 부모를 돕고, 복잡한 발달 및 정신 건강 장애를 지닌 아동들의 필요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고 한다.

그들은 책임은 결국 단 한 사람, 애덤 자신에게 있다고 결론내렸다.

“왜 그가 총기 난사에 집착했는지, 왜 그 집착에 따라 행동했는지 충분히 설명할 방법은 없다. 결국 이 끔찍한 행동의 책임은 오직 그 혼자에게만 있다.”

대중이 이를 지적으로 이해한다 해도, 낸시에 대한 적대감이 남아있다는 것은 살인자의 어머니들에 대한 공감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을 때 대중은 희생양을 갈구한다. (이런 현상을 다룬 픽션으로는 틸다 스윈튼 주연의 ‘케빈에 대하여’가 있다.)

콜롬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범인 중 하나의 어머니이자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쓴 수 클리볼드가 올해 인터뷰에서 말했듯, ‘어머니는 당연히 알아야 할 것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낸시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능력인 공감은 우리의 편견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우리와 닮은 사람, 같은 스포츠 팀을 응원하는 사람에게 더 큰 공감을 느끼고, 낸시처럼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통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공감을 덜 느낀다.

예일 대학교 심리학자 폴 블룸이 신저 ‘공감에 반하여: 이성적 연민 옹호 Against Empathy: The Case for Rational Compassion’에서 주장하듯, 공감은 우리의 도덕적 사유를 왜곡하고 우리가 잔인하고 종족 차별적으로 행동하게 만들 수 있다. 블룸은 결정을 할 때 ‘공감은 도덕적 열차 사고’라고 썼다.

낸시를 이 학살의 피해자에서 배제함으로써 우리는 누가 대중의 연민을 받을 만한지에 대해 도덕적 선을 긋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낸시를 지울 때, 우리는 가족 안의 폭력과 다중 살인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필수적인 내러티브와 관련된 한 부분을 잃는다.

50년 전 건축학도 찰스 휘트먼은 오스틴 텍사스 대학교의 유명한 탑에 기어올라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폭력 행위였고, 지금은 현대 최초의 총기 난사 사건으로 간주되는 일이었다.

휘트먼은 십여 명을 죽였고 30명 이상에게 부상을 입혔다. 하지만 그의 살인은 탑 위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대중에게 총을 쏘기 전에 어머니와 아내부터 죽였다.

‘광란 국가: 미국을 총기 난사에서 구하기 Rampage Nation: Securing America From Mass Shootings’의 저자 루이스 클라레바스는 대량 총기 학살을 저지른 사람들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죽이는 일이 드물지 않다고 한다.

클라레바스는 최근 책에서 1966년부터 2015년까지 6명 이상이 사망한 총기 학살을 모두 살폈다. 그 중 40% 이상에서 범인은 연인이나 가족을 죽였다. 이것이 가장 흔한 형태의 학살이었다.

“우리가 흔히 간과하지만, 전체 데이터를 보면 확 눈에 들어오는 것은 미국 총기 학살의 가장 큰 동기는 가정 내 폭력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총기 학살에서 범인과 피해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고, 그 관계는 가족 또는 연인인 경향이 있다.”

우리가 피해자 명단에서 낸시를 지울 때,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맥락을 잃는다. 그리고 낸시를 또 한 번 잃는다.

*본 기사는 허핑턴포스트 US의 'The Forgotten Victim Of The Sandy Hook Shooting'을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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