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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많이 배웠기 때문에 페미니스트인가?

내가 '배운 여자'이기 때문에 나는 저학력의, 빈곤층 남성들의 젠더 감수성을 비판할 자격을 박탈당하는가? 어째서 '젠더'가 계급을 형성하고 여기에서 착취와 차별과 억압이 일어나고 있음은 은폐되는가? 다시 말하자면, 어째서 젠더의 계급-또는 여성성의 계급('창녀'와 '모성'의 스펙트럼 같은)은 계급의 문제로 논의되지 않는가? 블랙넛이나 정중식처럼, 소위 '루저' 감성의 혹은 실제로 남성성 경쟁에서 상대적 약자인 남성이 여성을 대상으로 착취나 비하, 혐오 발언을 할 때 이것이 논란이 되면 왜 그들보다 계급이 높은 여성을 기어이 '가정'하고, 여성이 반드시 약자는 아니라는 아무말 결론을 이끌어내는가?

  • 짐송
  • 입력 2016.12.16 07:05
  • 수정 2017.12.17 14:12
ⓒArman Zhenikeyev - professional photographer from Kazakhstan via Getty Images

1.

언제나 페미니즘은 배운 여자의 언어, 엘리트 여성의 그것, 인생에 시간과 여유가 남아도는 년들의 투정으로 표상된다. 배운 여자들의 강단 학문이라고 욕하는 관점과, 제대로 된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페미니즘 전공 교수를 이겨보겠다고 이죽거리는 얼치기들이 넘쳐나는 현실, (다른 수업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놉!) 제발 하나만 좀 하자. 먹고살 만해지면 페미니즘 하겠다는 정중식의 말이 보여주듯 다른 어떤 학문이나 정치적 철학과 달리 페미니즘은 늘 잉여의, 과잉의, 잔여의 산물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상을 좀 다르게 '이분화'하자면, 페미니즘이 잉여여도 되는, 안 해도 무방한, 나중으로 밀어둬도 아무 탈 없는 삶과 생존을 위해 해야만 하는 삶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계급이 낮기 때문에' 젠더 감수성을 갖추지 못한 남성은 널렸지만, 그것은 그의 '젠더 권력'이 승인하는 '몰라도 되는' 권력이다. 반면 계급이 낮은 여성일수록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의 '페'자도 모르는 여성일지라도 이 생을 돌파하면서 살아가는 한 어떤 형태로든 페미니스트일 수밖에 없다. 여성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분열되고 발아하고 투쟁한다. 소위 '명예 남성'이라고 하는, 반-페미니스트적인 여성조차 자신의 존엄이 기로에 놓인 어떤 영역에서는 발톱만큼이라도 페미니즘적 시각이나 목소리를 가진다. 페미니즘은 학문인 동시에 삶의 실천적, 정치적 양식이다.

정중식 씨가 자신의 문제를 계급으로 정당화하고자 한 것은 저학력, 빈곤층 혐오이다.

2.

까놓고 말해서 나는 '배운 여자'다. 정확히 말하면 '오래 배운 여자'라서 상품 가치가 떨어지고, 남자들 기 죽일까봐 걱정이라는 말을 생전 처음 보는 아재들에게도 안부 인사처럼 듣는다. 학력 인플레 시대에 이런 학위는 아무 쓸모없다는 자각과는 무관하게, 나는 내가 어떤 기득권의 후광을 두르고 있는지, 그저 개인의 역사 중 하나여야 할 학력이 얼마나 저열한 차별의 핵심인지 잘 안다. 학벌주의 세상에서 이것은 유용한 방패이다. 메갈 선언을 할 때 여성학 학사 학위도 소용이 없었다고 쓰자 한 알계는 아주아주 공손하게, '잘 아시겠지만'으로 시작하는 (그러나 맨스플레인을 포기하진 못하는) 말을 보내왔다.

나는 많이 배웠기 때문에 페미니스트인가?

나는 아들이 아니라고 혀를 차는 친척들에게 혀짤배기 소리로 덤비던 일곱 살때부터 페미니스트였다. 여자 아이들에게만 청소를 시키는 선생님에게 항의하다가 벌을 서던 아홉 살 때도, 성차별적 발언을 일삼는 캠프 교사를 비판하다가 또래 남자애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던 열 다섯살에도. 나는 배우지 않아도 나이가 어려도 페미니즘 이론이라고는 1도 몰라도 페미니스트일 수밖에 없었다. 내 모든 삶의 순간순간이 차별과 폭력의 굴레를 통과하는 일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고 많이 배운 이들이 훨씬 더 거칠고 차별적이고 나쁜 말로 이 세계의 폭력을 안일하게 계승하고 전달하고 확산시켰다. 나는 싸워야 했고, 약자이기 때문에 더 많은 근거와 무기가 필요했다. 나는 '이대생'이 아니어도,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았어도, 공부를 오래 하지 않았어도 끝없이 젠더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목소리를 내고 싸우고 연대하고 때로는 박살 나서 울면서 잠들고 다음날에는 다시 열 받아서 이불을 차고 일어났을 것이다. 언제나 더 정교하고 합리적이길 요구 당하는 것은 약자이다. 나는 페미니즘 이론이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공부했다. 페미니스트가 젠더 문제에 대해서 조금만 삐끗하거나, 적확한 언어를 쓰거나 현상을 짚어내지 못하면 벌떼 같은 비난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대학원생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소위 '명문대' 학생들이 차별적이고 나쁜 사상을 당당하게 과제로 써오는 사례를 손쉽게 모을 수 있다. 내가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공부할 때 도움을 받았던 분들의 사상의 깊이도 최종 학력과 무관하다. 잡지를 만들면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 열린 생각과 풍부한 사유의 발전기를 돌릴 줄 아는 이들은 학력도 직업도 정체성도 제각각이었다. 나의 피와 살과 뼈를 만든 가족의 계보에서 나에게 어떤 기질이나 '애티튜드'를 물려준 강한 여성들 중 몇몇은 학교 근처에도 못 가봤다. 따라서 나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빈곤하고 조야한 언어로 얄팍한 생각을 전시하는 이들을 손쉽게 '못 배운' 이들로 포착하기를 거부한다. 이것은 다른 의미의 학벌주의이며, 저학력 혐오일 수 있다. 빈곤층이나 저학력층이 현상을 적절하게 진단하고 이해할 언어나 기반을 갖추지 못하는 것은 구조적 문제이다. 그러나 입체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을 구조의 차원에서만 해석하려는 것도 안일한 접근이다. 정중식 씨가 자신의 문제를 계급으로 정당화하고자 한 것은 저학력, 빈곤층 혐오이다.

세상에는 월 200을 못 버는 저임금 노동자, 저학력자들이 넘쳐난다. 정중식 씨의 '저임금' 기준이 월 200인 것도 흥미로웠지만(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를 고려하여 여성의 기준으로 볼 때, 저 기준은 제법 높다) 자신이 저임금자이기 때문에 약자를 착취하는 서사를 정당화하고, 약자의 인권을 '덜 급한 것'으로 밀어놓는 사람이 고소득자가 된다고 해서 '덜 급한 것'에 관심을 갖진 않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자기연민과 피해자 서사에 빠진 이들은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지우고, 계속해서 자신을 최하위층에 위치시킬 뿐이다.

'루저' 남성이 혐오 발언을 할 때 왜 그들보다 계급이 높은 여성을 기어이 '가정'하고, 여성이 반드시 약자는 아니라는 아무말 결론을 이끌어내는가?

3.

내가 '배운 여자'이기 때문에 나는 저학력의, 빈곤층 남성들의 젠더 감수성을 비판할 자격을 박탈당하는가? 어째서 '젠더'가 계급을 형성하고 여기에서 착취와 차별과 억압이 일어나고 있음은 은폐되는가? 다시 말하자면, 어째서 젠더의 계급-또는 여성성의 계급('창녀'와 '모성'의 스펙트럼 같은)은 계급의 문제로 논의되지 않는가?

블랙넛이나 정중식처럼, 소위 '루저' 감성의 혹은 실제로 남성성 경쟁에서 상대적 약자인 남성이 여성을 대상으로 착취나 비하, 혐오 발언을 할 때 이것이 논란이 되면 왜 그들보다 계급이 높은 여성을 기어이 '가정'하고, 여성이 반드시 약자는 아니라는 아무말 결론을 이끌어내는가? 그 정도의 '루저' 여성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에서 지워놓고, '루저' 여성이 가시화되거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짓밟아 놓고. 여자 루저, 여자 정중식은 가능한가? 케이팝 스타에서 준수한 외모의 여성 참가자들이 살쪘다며 혹평 당하는 현실에서, 여성이 정중식처럼 봉두난발을 하고 아무 옷이나 입고 체중조절이나 외모 관리에서 자유로운 모습으로 무대에 서고 그 자체가 '진정성'을 뒷받침해주어 승승장구하는 서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잡지에 관한 자리에 나갈 때는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골라 입는다. 내가 '표준 체중'(...)을 벗어나는 순간 내가 주장하는 '연애하지 않을 자유'라는 것이 어떤 조롱거리가 되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이다.

당연히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은 밖에서 보기에 좀 배운 것 같은, 계급이 좀 괜찮아서-'먹고사니즘'에 매몰되지 않고-'차별' 문제를 지적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존재로 여겨진다. 실질적 위협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들이 익명에 기대어 페미니즘적 발언을 하는데도 그 자체로 중산층 이상의 계급으로 카테고리화되는 것이다. 여성들은 '루저'로 보이지 않도록 꾸미고, '신뢰할 만한' 수준의 언어를 사용해야 겨우 발언에 힘이 실릴랑 말랑이지만, 그조차도 남성-비전공자들이 더 많은 지면과 당위를 따는 경우가 허다하다. 참 맥 빠지는 일이다.

여성상위시대라고 주장하려면 계급이 높은 여성과 계급이 낮은 남성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동일한 물질적 토대에 있는 남성과 여성 중 여성이 더 높은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는지 비교해 보아야 한다.

4.

빈곤층에 대한 공동체의 규범, 아름답고 윤리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어떤 존재가 빈곤층으로, 사회적 약자로 구성되는가에는 이데올로기가 개입한다. 아직도 '사회지도층'부터 '빈곤층'까지 모든 이미지는 비장애 남성이 독차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성이나 이주 노동자, 장애인, 퀴어 등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페미니즘의 성과 중 하나는 지금껏 '중성적'이었던,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남성'으로만 존재했던 빈곤층 혹은 사회적 약자 계층에서 '젠더' 계급을 발라냄으로써 그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위계와 착취 관계, 폭력을 발굴했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역학 관계를 건너뛰고 곧장 연민과 윤리적 포용 등을 이야기할 때, 그 포용과 연민의 테두리는 너무나 견고하게 '남성'까지만 승인한다. 그때 공동체는 누구 중심의 공동체이며, 여기에는 누가 배제되고 착취되는가?

여성상위시대라고 주장하려면 계급이 높은 여성과 계급이 낮은 남성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동일한 물질적 토대에 있는 남성과 여성 중 여성이 더 높은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는지 비교해 보아야 한다. 동일한 임금을 버는 남성은 아무도 여성의 위치로 '내려가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물질적 계급 차별뿐만 아니라, 더 가혹하고 은밀하고 일상적인 젠더 계급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계급에 있는 여성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목격하거나, 그 여성이 '그런 취급'을 받는데 일조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때 '가난한 여자는 몸 팔면 되지 않느냐'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사람은 그냥 지나가시라. 그 말이 뭐가 문제인지 스스로 생각하는 것도 포기한 이들이 여기까지 읽을 리도 없지만.)

젠더 문제에 관해서 문제 제기를 하는 여성들은 '만만한 놈들'만 골라 패는 것이 아니다.

5.

젠더 문제에 관해서 지적하는 여성들이, 남성 연대에서 높은 입지를 차지한 남성들에게 어떤 타격을 주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유명한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은 여전히 밥줄 안 끊기고 잘 산다. 이것은 유명한 여자 연예인들이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방송활동이 중지되는 등 말 그대로 '밥줄'이 끊기는 상황과 대비하여 극명한 젠더 권력의 낙차를 보여준다. 데이트할 때 할인 카드를 쓰는 상대가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 발언이, 공손하게 덧글을 달지 않은 태도가 남성들의 밥줄을 끊는다면 거기에는 페미니스트로서 연대할 일이다. 노동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오직 여성에게만 일어난다.

젠더 문제에 관해서 문제 제기를 하는 여성들은 '만만한 놈들'만 골라 패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남성 사회에서 약자인 것은 여성들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고려할 요소도 아니다. 살아있는 인간인 한 잘못은 하기 마련이고, 특히 무지로 인한 잘못은 언제든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잘못에 대해서 언제나 상냥하게,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이해해주어야 하는 주체는 여성이고 대상은 남성이다. 잘못의 주체의 성별이 바뀌면, 남성은 징벌과 훈계의 자격을 양도 받고 여성은 깨끗한 수건을 들고 목을 치길 기다리는 사무라이처럼 숙연하고 묵묵해져야 한다.

상냥한 태도가 아니면 정당한 문제제기도 가혹한 심판으로, 지적 권력의 과시나 잘난 척으로 번역되는 세상이다. 나는 잘못에 대해서 굳이 상냥하고 부드럽게 지적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원한다면 그리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선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특정성별에게만 강요된다면 더더욱. 성별화된 감정노동은 차별이다.

우리는 누구에게 이입하고, 누구를 연민하도록 훈육되고 길러지는가? 그때 사라지는 맥락은 무엇이며, 그 안에는 누가 있는가?

6.

어제도 기사가 하나 났다. "생활고 겪던 조선소 노동자, 돈 만 원에 그만..."이라는 제목이었다. 딸의 교통카드 비용 만 원 때문에 강도 행각을 벌인 남성을 연민하고 동정하면서 '휴머니즘'에 호소할 때, 그가 '마트 주차장에서 혼자 차에 타는 여성을 힘으로 제압하고 돈을 빼앗을 수 있는 힘'의 소유자라는 사실, 그리고 '타깃이 된 (남성보다 젠더 계급에서 약자인) 여성 피해자'는 증발한다. 가난한 남성은 여성을 위협하여 만 원을 빼앗을 수 있지만, 가난한 여성은 대부분의 경우 누구에게도 만 원을 빼앗을 수 없다. 물론 더 약자로 가면 가능은 하겠지만, 젠더 권력이 동일한 상황에서의 다른 약자가 대상이 될 뿐이다. (가난한 여성이 남성 청소년에게서 돈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은 명료하다)

우리는 누구에게 이입하고, 누구를 연민하도록 훈육되고 길러지는가? 그때 사라지는 맥락은 무엇이며, 그 안에는 누가 있는가? 어째서 누군가는 언제나 이해와 연민과 포용의 대상이 되는데, 누군가는 비극성을 극대화하는 도구이거나 분노와 애환을 푸는 샌드백 정도로만 존재하는가? 여성이 대상화된 샌드백이나 도구가 아니라, 욕망이 있고 고통을 느낄 줄 알며 이중의 계급 차별 속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자 애 쓰고 차별에 분노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인정받기는 왜 이렇게 힘든가?

7.

나는 여성들의 계급 의식을 후려치는 페미니스트 이미지의 '스테레오 타입'이고 아마 팔자 무지하게 좋아 보일 것이다. 나는 내가 쥐고 있는 몇몇 특권들을, '보통 여성'을 지우고 짓누르는 '보통 남자'의 알량하지만 압도적인 권력을 해체하고 그것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비판하는데 쓸 것이다. 이것은 시혜적 태도가 아니라, 연대하고 연결됨으로써 새로운 공동체를 축조하려는 시도이며 평생 지속해야 할 삶의 방식이다. 필요하다면 더 야멸차게 말하겠다. 공동체의 연민과 포용은, 타자를 착취하면서도 자기 연민에 빠져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기만적 폭력 주체들의 몫이 아니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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