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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혐'으로 찍혔던 사람들의 행보에 대해서

여자를 팬 사람이 또 팰까요? 아마도요. 하지만 엄청나게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사람이 또 할까요? 사회 전체 분위기가 가정폭력에 아주 엄해진다면요? 좀 더 어렵겠죠. DJ DOC은 아마도 다음에 가사 쓸 때 너무 여혐스러운 건 안 쓸 거라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방법이 완전 페미니즘 중심으로 바뀌었을 리는 전혀 없지만, 최소한 노래 듣는 여자들이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노력은 하겠지요. 본심은 어떻든 간에, SOA인 저에게는 상관 없고 개사했으면 문제 해결입니다. 정치인들도 '여자가...' 발언은 조심하겠죠.

  • 양파
  • 입력 2016.12.14 12:39
  • 수정 2017.12.15 14:12

한참 전 얘긴데 "여자로서 알파 남자들과 일하는 법" 종류의 자기계발서를 몇 개 읽었습니다 (저 엉뚱한 책 많이 읽어요). 여기에서 몇 개 인상 깊었던 것이, 무언가 불만이 있을 때는 둘만 있을 때 간단하게 '그거 앞으로 하지 말아달라' 말하고 그냥 돌아서라는 거였습니다. 저는 제 사정을 설명하고 설득시키는 스타일이라 이거 상당히 공감 안 갔습니다만 그런 상황에 몇 번 처해보니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했어요. 그 이후로 제가 개발한 이론이 있습니다.

IT에서 SOA(Service Oriented Architecture)라는 컨셉이 있고, 객체지향이라는 컨셉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 그리 친밀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SOA를 주로 씁니다. 편의점에 가면 종업원이 계산해줄 거라는 기대가 있고, 종업원은 그 기대에 부합하죠. 그 종업원 성격이 무엇인지 어떤 성향인지는 상관 없고, 그 사람의 '역할'을 보는 겁니다. 학교 선생님은 공부를 가르치고 경찰서에서는 민원을 받습니다. 그러니 한 사람이 어떤 요구를 받고 그에 반응을 하는 것이죠. 시어머니가 "김장 도우러 와라" 하고 서비스를 요구하면 간다, 안 간다로 반응할 수 있고요. 하지만 친밀한 사람들에게는 객체지향이 좀 더 흔합니다. 이것은 "이 사람은 이런 이런 사람이다"라는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데요, "내 친구는 나와 친하고 나를 이해하니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이렇게 할 것이다"라는 기대죠. 이심전심. 나와 공감하면 이런 말을 할 것이고, 저런 것도 해 줄 것이고, 뭐 그렇습니다.

김장 준비하는 시어머니 예를 들어 봅시다. 객체지향으로 가면, "며느리는 우리 가족이고 내가 힘든 걸 알 테니 당연히 와서 도와주고 싶을 거야"입니다. 하지만 며느리는 SOA 식으로 "시어머니가 김장하는데 도움이 필요하셔서 부탁한다면 도와드려야지"입니다. 또 다른 예로 아침 해주길 바라는 남편은 "내 아내는 나를 사랑하니까 아침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거야"라고 기대를 하죠. 대신 부인은 SOA 식으로 "남편이 아침에 밥 해주기를 원하니 내가 부탁을 들어주겠다"일 수 있고요. 이때 부인이 아침을 안 하면, 객체지향인 남편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하면서 머릿속의 객체 모델이 틀린 걸로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뭐 이런 식으로요. 왜냐면 자기 머릿속에서 "남편을 사랑하는 부인" 모델은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아침을 챙길 거거든요. SOA 인 부인은 당신 부탁을 들어주려고 노력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못 들어줄 수도 있고, 꼭 내가 매일 해줘야 할 의무는 어차피 없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문제가 있을 때 그 사람에게 "이거 앞으로 하지 마세요"라고 하는 건, 아주 확실하게 SOA 스타일입니다.

자, 이 시스템을 이제 중식이 밴드와 DJ DOC, 그 외 여혐논란에 말린 사람들에게 적용해 봅시다. SOA 모델로는 그들은 가수로서 서비스 실수를 했습니다. 여혐 가사가 논란이 됐죠. 이에 DOC 는 문제가 되는 부분을 고쳤습니다. 그리고 나와서 개사된 노래를 불렀습니다. SOA 입장에서는 잘 해결된 셈입니다. 문제 발견 ⇒ 정정 의뢰 ⇒ 정정 후 다시 서비스 ⇒ 에블바디 해피. 하지만 객체지향인에게는 이건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혐을 내재한 모델"이었으니 그런 여혐가사가 나왔는데, 이번 건 고쳤지만 다음 번에 이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잖아요. 그러니 DOC는 (심금을 울리는 눈물 가득 사과로?) 이제 그런 가사를 쓸 사람이 아니다를 증명해야겠죠.

여기서 다시 처음 시작으로 돌아가 봅시다. 뭔가 문제가 있을 때에 그 사람에게 1:1로 가서 "이거 앞으로 하지 마세요"라고 하는 건, 아주 확실하게 SOA 스타일입니다. 객체지향은 서로의 공감과 이해를 구해서 "아 우리 같은 편이고 내가 왜 이 일에 이렇게 반응했는지 납득했으니 이제 앞으로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고요. 그러므로 다시 SOA 식으로는 "네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고 내가 왜 이걸 원하는지 이래저래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겠으나 내가 원하는 건 이거니까 네가 맞춰줄 수 있는지 말해"입니다. 객체지향 스타일이라면 내가 왜 그 일 때문에 피해를 받았고 기분이 안 좋은지를 말함으로써 상대를 설득시키려고 했을 겁니다. 상대방이 이해한다면 앞으로 그에 대해서 걱정 안 해도 될 거라고 믿어서이죠. 그러나 다른 환경, 다른 교육, 다른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들인데, 낳아준 부모와도 의견이 충돌하는데 다 내 마음 같지는 않죠. 길게 (설득 혹은 말) 해봤자 "넌 이래서 나쁜놈, 넌 이래서 나쁜놈, 넌 이래서 나쁜놈"으로 들리기 쉽습니다.

이제는 여혐러로 찍힌 몇몇 사람 등을 봅시다. 거의 대부분의 여성도 상당한 수준의 여혐을 하게 만드는 이 나라에서 자란 사람들이라 놀랍진 않습니다. 보통은 제재도 받지 않고 그냥 살아가지요. 그런데 DJ DOC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도 지적 혹은 질타, 비난을 받았습니다. DJ DOC 같은 경우에는 좀 쉬웠죠. 개사하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정치인들에게는 좀 더 기준이 높습니다. 이때 "너는 여혐발언을 하는 걸 보니까 글러먹었다"류의 비난도 가능하기도 하지만, 저는 저와 다른 문화와 배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대부분인 곳에서 살고 일해서 "네 배경이 뭔지 모르니 우선 한 번 조용히 넘어가고 기록은 해두겠다", 혹은 "나는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시정 요청하고 한 번 더 가보자"인 SOA 시스템을 택하는 편입니다. 실제로는 글러먹은 사람이라도, 지금 환경 파악하고 태도 바꿀 기회를 주는 거라고 봐도 됩니다. 특히 동료처럼 가까운 남자라면 더 그렇습니다. 여자가 나서서 말 하지 않는 무슬림 분위기에 익숙한 사람이 저에게 실수를 한다면, 간단하게 못 들은 척하고 자신이 분위기 파악하도록 두거나, "어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다시 해봐"하거나의 방식으로 다시 싹 지우고 리셋할 기회를 한두번은 줍니다. Saving face 하도록 약간의 여지는 남겨두는 것이기도 합니다. 체면 구기지 않고 태세전환할 기회입니다.

생각하는 방법이 완전 페미니즘 중심으로 바뀌었을 리는 전혀 없지만, 최소한 노래 듣는 여자들이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노력은 하겠지요.

여자를 팬 사람이 또 팰까요? 아마도요. 하지만 엄청나게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사람이 또 할까요? 사회 전체 분위기가 가정폭력에 아주 엄해진다면요? 좀 더 어렵겠죠. DJ DOC 은 아마도 다음에 가사 쓸 때 너무 여혐스러운 건 안 쓸 거라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방법이 완전 페미니즘 중심으로 바뀌었을 리는 전혀 없지만, 최소한 노래 듣는 여자들이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노력은 하겠지요. 본심은 어떻든 간에, SOA 인 저에게는 상관 없고 개사했으면 문제 해결입니다. 정치인들도 '여자가...' 발언은 조심하겠죠. 앞으로 정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더 보고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deal-breaker까지는 아니므로 기억만 해두고 넘어갑니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해서 여혐러는 아니겠지요. 그저 익숙해진 삶과 그의 가치를 따라가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런 일로 제재 받아보지 않아 당황스럽고 화나서 발끈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 내 맘같이 느끼면서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건, 최소한 제 경험으로는 무리였습니다. SOA로 시작합시다. 가사 개사했으면 '가수'로서는 자기 역할 한 거죠. 공개적인 발언할 때 여성 비하하지 않으면 정치인으로는 서비스 레벨 정상화 된 거죠. 머릿속으로야 무슨 생각하든 간에요. 여혐 관련 이슈로 홍역 겪었지만 사과했고 여혐이라는 거 인정했다면, 그리고 나서 또 페미니즘 관련 우호적 스탠스라면, 우선은 리셋했다 치고 다시 모니터링 모드로 들어가도 되겠죠.

사회 전반적으로 "내놓고 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퍼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의 눈으로 보지 않고 나의 경험을 하지 않고 나의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 나의 감정을 내 사정을 이해해주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나의 관점을 완전하게 수용하고 사람이 바뀌기를 바란다면 기대가 너무 높아집니다. 갈 길이 너무 먼데 나를 이해 못하는 것에 분노하고 실망해버리면 천리 가야 하는 스케줄에 몇 걸음도 힘듭니다. 내 (정당한) 요구를 받아들이고 수용해줬음도 성공이니 기뻐하고 또 힘내서 나갑시다.

여혐 발언 한 사람들 봐주고 넘어가자는 말은 아닙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분노하면서 에너지 소비하기 보다는 (저도 그러지만) 어차피 우리 모두 다 여혐하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을 확실히 해서 그것을 받아내는 데에 더 집중하자는 말입니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 하든 여혐 발언 안하고 차별 안 하면 됐잖아요. 진짜 그게 옳다고 믿는지 사상검증까지는 갈 필요 없죠. 제도적인 조치, 그리고 사회 전반적으로 "(속마음이야 어쨌든) 내놓고 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퍼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You can specify what, or how. Not both"라고 하죠. "일 시킬 때 뭘 해야 할지 말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말 할 수 있지만 두 개 다는 하지 마"란 뜻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what부터 먼저 요구합시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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