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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놀이공원의 '국뽕관'

앞에 펼쳐진 대형 스크린을 통해 내가 직접 대포알을 가지고 일본군의 전함을 파괴하고, 넘어오는 일본군을 직접 무찌르는 '가상현실'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한두 번만 칼을 휘두르는 손짓을 하면 수백 개의 파편으로 쪼개지는 일본군. 그곳에선 수많은 초등학생들과 유치원생들이 가상으로 조선의 수군이 되어 열심히도 싸우고 있더라. 이게 대체 무엇을 위한 가상현실인지. 대관절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가도 이런 가상현실이 있을까, 수백 년을 압제당한 IT강국 인도에 가면 영국인을 때려 부수는 가상현실 프로그램이 있을까.

  • 양동신
  • 입력 2016.12.13 09:44
  • 수정 2017.12.14 14:12

필자는 어제 아이들과 함께 수원의 어느 큰 놀이공원에 다녀왔다. 날도 춥고 애들도 감기 걸리면 안 되고 해서 그냥 실내놀이관을 위주로 다녔는데, 그러던 중 들리게 된 곳이 올해 오픈했다는 디지털 역사체험관 프라이드 인 코리아 (PRIDE IN KOREA)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입구라 그다지 들어가고 싶지 않은 포스였지만, 추위를 피해 어쩔 수 없이 입장.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역사 속 인물들이 반겨주는데, 워딩 하나하나가 주옥같아 무언가 잘못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게 하더라.

막상 들어가 보니 역사 속 인물 하나하나를 설명하는데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해 보자면,

- 실크로드를 개척한 동아시아의 해상왕 : 장보고

- 동양의 알렉산더, 제국의 설계자 : 광개토대왕

- 세계 과학기술사에서 유례 없이 눈부시게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세계 언어학계에서 역사상 가장 과학적이고 진화된 문자로 평가한다는 한글을 만듦 : 세종대왕

- 세계 해전사에 찾아볼 수 없는 불멸의 기록 : 이순신

- 노비 출신 천재 과학자, 과학의 르네상스를 열다 : 장영실

그래 뭐 여기까진 백번 양보해서 그냥 넘어갈 만하다고 치자. 마지막으로 눈에 띈 인물이 있었으니,

- 한국 최초의 여왕,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지다. 신라의 문화예술계와 경제를 발전. 여성이라는 편견을 깨고 국제정세를 활용한 통찰력으로 신라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천년왕국으로 만듦 : 선덕여왕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명량대첩 가상현실 프로그램.

앞에 펼쳐진 대형 스크린을 통해 내가 직접 대포알을 가지고 일본군의 전함을 파괴하고, 넘어오는 일본군을 직접 무찌르는 '가상현실'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한두 번만 칼을 휘두르는 손짓을 하면 수백 개의 파편으로 쪼개지는 일본군. 그곳에선 수많은 초등학생들과 유치원생들이 가상으로 조선의 수군이 되어 열심히도 싸우고 있더라. 이게 대체 무엇을 위한 가상현실인지. 대관절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가도 이런 가상현실이 있을까, 수백 년을 압제당한 IT강국 인도에 가면 영국인을 때려 부수는 가상현실 프로그램이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잉카문명 선조들 수천 명을 하루 만에 몰살시킨 남아메리카에 가면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 장군모형을 가져다 놓고 매일매일 난도질을 하는지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그리하여 찾아봤다.

이는 필시 해당 놀이공원 자체만의 작품은 아니렷다. 과연 예상되는 수준의 제작사들이 나왔다. 미래창조과학부가 제작하고 한국통신이라 불리던 어느 큰 통신사가 후원했다고. 아마도 부지는 해당 놀이동산에서 거의 무상으로 제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쯤 되니 앞서 언급된 그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수식어나 과한 업적 칭송, 특히나 선덕여왕에 대한 스토리가 어디서 왔는지 감이 잡히겠더라. 이거야 원 탄핵은 가결시켰으나, 앞으로 이 사회 곳곳에 침투한 그 창조적 발상의 유산(?)들은 다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있는 그대로의 역사만으로도 우리나라는 충분히 자랑스러운 나라이다.

굳이 그렇게 다른 나라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미사여구 혹은 없는 사실로 우리 아이들에게 국뽕에 취하게 할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지금이 냉전시대도 아니고 그렇게 역사 프로파간다 물을 주입시켜 얻어지는 이득은 무엇인가. 결국 과거의 나와 같이 국수주의에 매몰되어 시야가 닫힌 아이들은 그것을 깨기 위해 다시 수십 년의 다양한 대외경험을 쌓아야 할 것이다. 역사, 그것 말고도 한국은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작금의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및 중화학, 건설 등의 산업도 그렇고, 각국 대형마트에 즐비한 가전제품, 한류 미디어, PISA기준 높은 교육 수준, 잘 갖춰진 보편적 건강보험, 동아시아 최고 수준 민주주의, 북한 리스크도 있고 대통령이 탄핵되어도 안정적으로 운용되는 경제시스템, 등등

국뽕, 이 단어는 국가와 필로폰의 합성해서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국가에 대한 자긍심에 과도하게 도취되어 있는, 그러니까 무조건적으로 한국을 찬양하는 행태를 비꼬는 말이다.'

국뽕에 취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느 쪽이나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좋지 않듯, 부정적 의미의 '국까'적인 자세도 문제지만, '국뽕'으로 가자면 그것도 결코 국가를 바라보는 옳은 자세는 아닐 것이다.

역사로 따지자면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라크, 이집트, 인도, 중국, 어디 한 나라 지금 선진국이라 할 만한 나라 있는가. 인류 역사상 진정 최고로 광활했던 제국, 몽골. 이민 가서 살고 싶은 나라 있는가. 하다못해 그 알렉산더의 그리스 혹은 마케도니아가 지금 우리보다 살 만한가 말이다. 한데 1천 년 전만 해도 기술이 발달되지 않고 기후가 좋지 않아 사람 살기 어려웠던 나라들, 예컨대 미국, 영국, 노르웨이, 호주, 이들 나라가 역사를 왜곡하거나 아이들에게 국뽕을 주입하는가.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었던 냉전시대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애국심과 국뽕은 다르다. 애국심은 분명 국가를 이루고 있는 우리,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심어줘야 할 중요한 가치이다. 하지만 그 애국심도 있는 사실과 현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야지, 왜곡을 통해 부양하려고 하면 곤란하다. 잘한 일, 못한 일 모두 우리 역사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 역사의 변방에 있었던 민족이 우리 역사이며, 그 민족이라는 개념도 시간이 갈수록 모호해지는 감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의 연장선에서 논의되는 것이 국정교과서이다. 역사는 실로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될 수 있으며, 이를 국가가 하나의 잣대로 좋은 역사만 보여준다면, 이는 결코 자라나는 세대에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애국심을 저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애국심을 가질 만한 충분한 요인이 있는 나라다. 역사는 그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잘 대처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지, 그 위대함에 취해 남들을 배격하라고 배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긍지와 아픔은 기억하되, 그것이 오로지 복수의 앙갚음만으로 변질되지 않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 선민의식은 지구 상에 유대인 하나만으로 족하다. 그저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놀이동산과 같이 대중에게 공개된 곳에 교육시설을 만들고자 한다면, 적어도 출처는 확실히 했으면 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논문이나 공식문서에 사실을 적시할 때는 정확히 그 출처를 명기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예컨대 아래와 같이 그 의미가 모호한 문장은 예시와 같이 순화되어야 할 것이다. 정부기관에서 제작한 홍보관이라면 더욱더 그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독자에 관점에서 본다면, 그러한 출처가 없을 땐 어느 정도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 예) ㅇㅇ학회 ㅇㅇ논문 ㅇㅇ월 자료에 따르면

세계 최고로 오래된⇒ 예) 출처: OECD/ UNESCO 00년 00월 자료 기준

신라시대 국제적으로 신망이 높았던 ⇒ 예) 출처: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 선덕여왕 00년 00월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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