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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여행가의 눈에 비친 120년 전 조선의 모습 3가지

오스트리아인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은 1854년에 태어나 1918년에 타계한 귀족 출신 여행가다. 유럽만 다닌 것이 아니라 전세계를 누볐다. 그 과정 중에 1894년 일본을 떠나 조선 여행을 시작한다. 우리 역사책에서도 가장 숨가쁜 시기다. 바로 갑오년이다.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그리고 갑오경장 등이 이어졌다. 오스트리아인 여행가는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으로 인해 조선을 북에서 남으로 종단하려던 계획을 수정하였다. 그래도 당시 남긴 여행기는 참으로 생생하다. 1894년 서울에 그와 함께 가있는 듯하다. 우리의 120여년 전 모습은 어땠을까? 오스트리아인 여행가는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1. 서울(한양)은 엄청나게 더러웠지만 전염병 발생은 드물었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도시 중에서도 서울은 확실히 가장 기묘한 도시다. 25만 명 가량이 거주하는 대도시 중에서 5만여 채의 집이 초가 지붕의 흙집인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가장 중요한 거리로 하수가 흘러들어 도랑이 되어버린 도시가 또 있을까? 서울은 산업도, 굴뚝도, 유리창도, 계단도 없는 도시, 극장과 커피숍이나 찻집, 공원과 정원, 이발소도 없는 도시다. 집에는 가구나 침대도 없으며, 변소는 직접 거리로 통해 있다.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주민들이 흰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다른 곳보다 더 더럽고 똥 천지인 도시가 어디에 또 있을까? …. 그러면서도 서울은 결코 건강에 해로운 곳이 아니며 전염병 발생도 드물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겨울이 매우 혹독하여 여러 달 동안 눈과 얼음 그리고 추위가 전염병의 등장을 막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름의 소나기가 오물을 씻어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은 오물은 개들이 먹어치운다. 개들은 가장 충실하고 집도 잘 지키는 하수도 청소부다.”(책 ‘조선, 1894년 여름’,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저)

헤세-바르텍에게는 조선의 수도 한양이 상당히 신기해 보였던 것 같다. 대도시면서 질서가 잡혀있지 않고, 더러우면서 전염병이 유행하지 않는 곳이었다. 여행기대로라면 조선은 발달한 문명 국가에서 온 사람들은 질겁을 할 만한 곳이었다.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등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 동안 망가진 정치가 백성들 삶의 수준까지 낮추어 놓은 듯하다.

2. 왕은 신성한 존재라서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에서 왕이 얼마나 신성시되는지는 다른 지침에서도 드러난다. 조선의 귀족들은 가족이 상을 당하면 얼굴을 가리지만, 왕의 면전에서는 예외다. 또 누구도 왕 앞에서 안경을 쓸 수 없다. 말을 탄 사람은 왕궁이 가까워지면 말에서 내려야 한다. 왕의 초상은 동전이나 우표에 찍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왕의 초상을 백성들이 만지게 되면 이는 왕을 모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인에게 유럽의 동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쇠로 된 물건이 왕의 몸에 닿아서는 안 된다. 1800년 정종 대왕(정조)은 악성종양으로 죽었는데, 수술용 메스로 종양을 째는 것이 바로 이 예법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한 왕자가 자신의 팔에 수술을 행하도록 마지못해 허락했다. 다만 이후에 그는 자신의 불쌍한 주치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예법을 어긴 죄로 왕이 주치의를 참수형에 처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책 ‘조선, 1894년 여름’,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저)

왕정에 익숙한 유럽인의 눈에도 신기해 보일 정도로 조선의 왕은 특권을 누렸다. 그 특권만큼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펼쳤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런 특권은 각종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가로막기까지 했다. 쇠로 만든 물건이 왕 혹은 왕자의 몸에 닿으면 안 된다는 예법은 수술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힘 있는 자들부터 이용하기 시작해야 기술은 발전하게 되어있다. 위에서부터 막혔으니 과학적 기반의 의술은 전혀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3. 관리가 되기 위해 중국 글자가 쓰인 책으로 공부했다.

“관리직에 뜻을 두고 있는 젊은이들은 사정이 다르다. 이들은 ‘큰 글(漢文)’, 즉 중국 문자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이를 위한 독자적 교과서가 있는데, 이 책들엔 중국 글자와 조선 글자가 실려 있고, 글자 옆에 중국식 발음과 조선식 발음이 큰 글씨로 쓰여 있다. 그러니까 이상하게도 한 음절이나 한 단어를 의미하는 같은 글자가 조선과 중국에서는 서로 다르게 발음되는 것이다. 학생들이 글자를 다 쓸 줄 알면 중국의 오래된 판례들이 설명되며, 역사적 주제에 대한 에세이와 시 같은 것을 쓰는 숙제가 주어진다. 수학과 지리학은 부수적이며, 국가시험을 치르는 데 다른 학문은 불필요하다. 아직도 조선인들은 고대의 그리스인처럼 지구가 평평한 판이라고 믿고 있다.”(책 ‘조선, 1894년 여름’,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저)

1894년이면 조선이 충분히 개화되고도 남아야 할 시점이었다. 중국과 일본이 모두 몇 십 년 전에 서양 세력에 의해 개항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젊은이들은 관리가 되려고 여전히 중국 글자로 쓰인 책을 달달 외웠다. 지리학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조선에서 만든 지도에는 땅 끝에 가면 영원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또한 조선은 중국과 함께 당당히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세계를 돌아다니던 오스트리아인 여행가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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