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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정치를 보고 싶다

만약 12월 1일 '여론' 그대로 탄핵안을 발의하고 12월 2일 표결했더라면, 국민의 여론과는 완전히 다른 국회 표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12월 9일의 탄핵안 투표가 여론조사와 우연히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은 12월 1일에 어떤 정치인이 '여론을 거슬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꿋꿋이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그 정치인의 이름은 박지원이다. 다들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모른다면 알아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그가 홀로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가며 '1일 발의 2일 표결'안을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12월 3일의 촛불 시위대는 앞으로 벌어질 표결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이미 실패로 돌아간 표결의 절망을 안고 거리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 노정태
  • 입력 2016.12.10 04:51
  • 수정 2017.12.11 14:12
ⓒ연합뉴스

'형량 계산기' 김기춘 vs. '표결 계산기' 박지원

'성지 순례'를 위한 기사를 먼저 하나 소개해보겠다.

11월 27일,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오늘 아침까지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과 접촉했다"며 "탄핵 공조자들이 60명을 훨씬 넘었다는 통화를 했다. 탄핵안은 확실히 가결된다"고 강조했다.

이미 탄핵안이 통과된 이 시점에 우리는 박지원의 표 계산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 1명 기권, 234명 찬성, 56명 반대, 7명 무효. 새누리당의 이탈표는 총 62명으로 예상된다. 박지원이 옳았다. 그의 표 계산이 정확하게 맞았다. 11월 27일 현재, 그 시점까지만 해도 탄핵은 예정된 수순처럼 보였다.

그리고 11월 28일, 박지원은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회의에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두고 "대한민국 법 미꾸라지이자 즉석 형량 계산기"라며 구속수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근혜의 지시로 차은택을 만났다고 언론에 밝힌 그가, 본인에게 돌아올 죄책을 박근혜에게 덮어씌우고 자기만 빠져나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11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은 3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정국을 뒤흔들었다. 박근혜 본인을 향한 모든 혐의를 부인하면서, 본인의 진퇴 문제를 국회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그의 말은, 탄핵을 향해 치닫던 비박계의 기세를 꺾고 주저앉히는 것이었다. 이 묘수를 박근혜 본인이 떠올린 것인지, 아니면 특히 형사법체계에 통달한 누군가가 대신 내준 것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아무튼 굉장한 한 수였다.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탄핵의 칼날이 순식간에 무뎌졌기 때문이다.

현실을 현실로서 좀 받아들이고 논의를 시작하자. 야3당의 의석을 전부 더해도 167석이다. 탄핵에는 200표가 필요하다. 33표를 어디에선가 가져와야 하는데, 그 '어딘가'는 당연히 새누리당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11월 29일의 3차 대국민담화는 그 33표를 가진 새누리당 비박계를 뒤흔들었다. 그대로 탄핵 절차가 진행된다면, 과반수 의석을 가진 야3당에 의해 발의는 가능하지만, 200표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인'이라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박지원이 택한 경로는 당연히 '이길 수 있는 확률을 최대화'하는 것이었다. 1일에 발의하고 2일에 표결하기로 했던 일정을 수정하여, 9일에 표결하는 것 말이다. 물론 일주일 미룬다고 해서 백퍼센트 탄핵안이 가결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야 없다. 하지만 그렇게 확보된 일주일 동안 어떤 변수가 등장하여 비박계의 마음이 바뀔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얻으려면 일단 탄핵안 발의를 멈추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민주당, 혹은 민주당의 주류 세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29일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가 터져나온 후에도, 우상호 원내대표는 탄핵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비박과 친박을 가리지 않고 '새누리당'을 향해 강경한 비난의 어조를 높이면서, 그들의 표를 얻어내기 위한 다른 방안을 마련하지는 않은 채, 그냥 표결을 하자고 밀어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가결이 아니라 부결을 향해 달려가는 질주와도 같았다. 다른 방향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가? 이것은 3000만명이 아니라 300명이 하는 투표다. 누가 무슨 표를 던질지 투표 개시 전에 미리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한다. 그 모든 정치적 불이익과 야당 강경파들의 야유를 무릅쓰고 양심적인 비박계 및 새누리당 탈당파 33명이 표를 던져주기를 염원하면서 2일에 탄핵안을 표결한다는 것은, 낙하산을 매지 않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묻지마 표결 강행이었을 뿐이다.

다행히도 '이쪽'에는 '형량 계산기'에 맞설 수 있는 '표결 계산기'가 있었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비난과 인신공격, 혐오발언 등에도 굴하지 않고 9일 표결안을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벌었고, 그동안 탄핵 정국을 둘러싼 '게임의 법칙'이 바뀌어, 새누리당에서 62명의 이탈표가 나오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만약 2일에 그대로 표결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건 박근혜, 혹은 '형량 계산기' 김기춘의 뜻대로 정치권이 놀아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야권 일각에서는 그렇게 '망하는' 결과가 벌어졌을 때, 국민들이 분노하여 '촛불 민심'이 더욱 활활 타오르기를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박근혜는 탄핵당하지 않고, 하야하지도 않고, 내년 대선까지 쭉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공안정국을 강화해나갔을 것이다. 국민들은 광장에서 경찰에게 쫓기고, 탄압당하고, 얻어맞고, 정신적으로 너덜너덜해져간다. 그렇게 쌓이는 불만의 목소리를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세력은 미래를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박근혜에 대한 국민적 반감에 기대어 손쉬운 대선을 하려고 한다. 이것이 12월 1일까지의 '시나리오'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정치권이 갇혀 있었던 '죄수의 딜레마'

'죄수의 딜레마'라는 개념을 꺼내는 것도 요즘은 좀 식상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이 그랬다. 탄핵안이 부결되어도 상관없다는 민주당 주류의 입장은 진정 솔직한 것이었고, 또 합리적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민주당 주류, 즉 친 문재인 계열은, 문재인을 제외한 다른 대선 주자가 부상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탄핵안 가결'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이 현재의 탄핵 정국을 2004년의 그것과 1:1로 대조하는 사람들이 현 정국의 초반에 탄핵 절차 진행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그 탄핵과 이 탄핵은 완전히 다르다. 여당을 탈당하고 미니 여당을 차린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박근혜는 아직도 거대 여당 소속 대통령이며, 노무현의 선거법 위반과 박근혜의 온갖 비리 혐의는 애초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근혜 대통령의 온갖 비리와 국정농단 등에 대해, 새누리당 의원이 탄핵에 동참하는 것은, 일종의 속죄 의식으로 작동한다. 박근혜를 탄핵함으로써 비박계, 그리고 그 속에 포함될 수밖에 없는 구 친이계는 박근혜와의 선긋기에 성공하고 오명을 조금이나마 벗을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근소한 차이로 탄핵에 성공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만약 비박계가 심지어 새누리당을 탈당하지도 않은 채로 압도적인 탄핵 찬성표를 끌어올 수 있다면, 그들은 새누리당 내의 헤게모니 투쟁에서도 우위를 차지할 것이고, 새누리당의 자산을 잃지 않은 채 조기대선 국면에 임할 수 있다.

대체 왜 민주당의 주류는 탄핵 정국에서 계속 한 발씩 늦게 움직이고, 불필요한 돌발 행동과 강경 발언으로 비박계를 위축시키고, 심지어 12월 2일 촛불집회에서까지 '탄핵'이 아니라 '하야'를 외치고 있었을까?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지렛대삼아 비박계가 부활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적은 표 차이로 탄핵이 가결되어 도덕적 면죄부를 얻었지만 새누리당 내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리게 된 비박계가 집단 탈당하여 '제3지대'를 형성하는 것도 원치 않고, 지금처럼 비박계가 세력을 과시하며 새누리당을 재접수하는 것도 민주당 주류가 원하는 바는 아니다. 그저 '지금처럼', 인기 없는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꾸준히 이어지면서 대선이 치러지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므로 탄핵안은 안타깝게 발의되지 못하거나, 발의된 후에 부결되어야 하거나, 부결되어도 상관 없다.

국민의당의 셈법은 좀 더 복잡했다. 가결되되 아슬아슬하게 가결되어, 친박과 비박의 싸움이 좀 더 커지고, 이른바 '제3지대'가 넓어질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속죄 의식을 제대로 치렀지만 그 결과 갈 곳을 잃어버린 구 새누리당 의원들을 하나씩 포섭해가며 '합리적 중도'로서 외연을 넓힌다거나, 아니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지지율이 많이 떨어진 안철수 외의 다른 대선 주자를 수용할 여지를 개척할 수 있다. 하지만 비박계가 아예 새누리당 내에서 이겨버리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므로 그다지 이익을 볼 수가 없다. 반면 탄핵안을 발의하지만 실패한다면 애초부터 탄핵론을 펼쳐왔던 안철수의 입지가 더욱 크게 줄어들기 때문에, 반드시 탄핵을 성사시켜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죄수의 딜레마가 발생했다. 국민의당은 일단 탄핵을 성사시켜야만 할 상황이지만, 너무 많은 표 차로 탄핵에 성공하면 그렇게까지 즐거운 상황은 되지 못한다. 반면 민주당은 지지층을 향한 강경 발언과는 별도로, 탄핵을 통해 비박계가 속죄하는 것도 원치 않으므로, 우상호 원내대표의 말마따나 탄핵이 부결되어도 상관 없는 쪽이다. 비박계는 탄핵을 하면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성공한다면 최대한의 표를 이끌어내어서 승리해야만 할 상황이었다.

각 정당이 얻게 되는 보상의 상대적 선호도를 -1, 0, 1로 놓고 표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민주당국민의당비박계
큰 표차001
작은 표차-110
부결1-1-1

민주당 입장에서는 작은 표차로 이기는 것보다는 부결되는 게 훨씬 낫다(2점 차이). 국민의당은 작은 표차건 큰 표차건 일단 탄핵안을 가결시켜야 1점의 손해를 안 볼 상황이므로, 새누리당이 4월 퇴진을 당론으로 정하기까지 한 상황에서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비박계는 작은 표차건 큰 표차건 탄핵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면 아예 참여를 하지 말아야 마이너스 1점의 손해를 피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부결되는 것이 이득인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죄수의 딜레마였다. 무기명투표를 이용해 민주당에서 이탈표가 나오면 그 비난은 민주당이 아니라 비박계, 더 나아가 국민의당으로 쏠릴 것이기 때문이다. 12월 1일과 2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보수 성향의 일간지 뿐 아니라 경향신문과 한겨레 등 진보 계열 언론에서도 행간에 녹여 계속 언급하던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정작 간절하게 탄핵의 성사를 원하는 쪽은 국민의당과 비박계이지만, 그들은 민주당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다. 반면 민주당은 굳이 탄핵을 성사시켜야만 할 간절한 이유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급격한 여론 변화와 보상 매트릭스 변동

12월 3일의 촛불시위 이전까지의 계산이 그랬다. 그 후 지역구 의원들에게 쏟아진 전화, 문자, 메신저 등 또한 비슷하거나 어쩌면 더욱 강한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반성을 해야 한다. 총선이 무려 3년이나 남았고, 다음 총선은 다음 총선의 이슈를 가지고 진행될 것이므로, 국회의원들은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 생각이 틀렸다. 전방위적으로 쏟아지는 여론의 압박이 정치권의 보상 매트릭스를 바꿔놓았다.

일단 민주당은 더 이상 탄핵 여론의 발목을 잡으며 한 템포 늦게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온라인 여론전에 힘입어 직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었으나, 문제는 문재인의 지지율이었다. 성난 탄핵 찬성 여론을 이재명이 모두 쓸어가면서, 물론 경선을 하면 어떻게든 문재인이 이길 테지만, 불안감이 커진 것이다. 탄핵안이 부결되고 '촛불정국'이 이어진다면 문재인이 아니라 이재명만 좋은 일이 되어버린다. 탄핵에 나서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국민의당과 박지원은 2일로 예정된 탄핵 투표를 9일로 미루자는, 지극히 합리적인 주장을 해놓고도, 탄핵안을 통과시키라는 국민 여론의 불만을 한 몸에 떠안았다. 부결되고 나면 대선 국면을 거치면서 국민의당의 존속 자체가 위험해질 상황이었다. 얻을 수 있는 보상은 변함이 없지만 손해가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여기서 빠진 변수가 있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4월 30일 18:00를 기해 나는 모든 권한을 여야가 합의한 총리에게 넘겨주마' 같은 4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면 탄핵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그런 수를 두지 않았다. 이유가 뭔지는 아직 모르겠다. 헌재로 가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비박계와 접촉을 했는데 이빨이 먹히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해버렸을까?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고 책상을 두드리다 보니 시간이 다 지나갔을까? 내게 주어진 정보 하에서는 알 수가 없고, 결론에 영향을 주지도 않으므로, 일단 넘어가자.

비박계의 셈법은 변함이 없었다. 표결에 참여했는데 부결되면 곤란하다. 표결에 참여한다면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 그런데 이제 민주당에서 배신표가 나올 여지가 사라졌고, 너무도 이상하게도 청와대에서 침묵을 지키면서, 거리낌없이 투표장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공적 용어로서 대단히 부적절한) 이른바 '촛불 민심'과 첨단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의원 압박의 결과로 변경된 보상표를 다시 그려보자.

민주당국민의당비박계
큰 표차001
작은 표차-110
부결-2-2-2

이제 죄수의 딜레마는 해소되었다. 부결되는 것은 모두에게 확실한 손해를 안겨준다. 작은 표차로 가결되어서 국민의당이 이익을 보는 상황이 생긴다 해도 민주당으로서는 감수해야 한다. 부결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박계는 일종의 꽃놀이패를 쥐고 탄핵안 표결에 나서게 되었다.

이기는 정치를 보고 싶다

혹자는, 아니 적잖은 진보 진영의 지식인들이, '여론조사 결과와 딱 맞아떨어진 국회 표결 결과'를 두고 감탄하는 모양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다. 대의민주주의는 국회의원을 리모콘 삼아 국민의 여론조사 그대로 움직이는 정치체제가 아니다.

만약 12월 1일 '여론' 그대로 탄핵안을 발의하고 12월 2일 표결했더라면, 국민의 여론과는 완전히 다른 국회 표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12월 9일의 탄핵안 투표가 여론조사와 우연히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은 12월 1일에 어떤 정치인이 '여론을 거슬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꿋꿋이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그 정치인의 이름은 박지원이다. 다들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모른다면 알아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박근혜 게이트를 두고 박영선 의원에게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여자 대통령은 꿈도 꾸지 말라'고 일갈했던 박지원의 성차별적 의식과 발언을 나는 여전히 규탄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모두 남자들이다. 게다가 박근혜는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박정희의 자식'이기 때문에 무조건적 지지를 받아온 정치인이다. '여성 대통령' 박근혜의 실패를 보상하는 방법은 다음 대통령도 여자가 하고, 그 다음 대통령도 여자가 하는 것뿐이다. 나는 성차별주의를 의식하지도 못하고,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한, 구시대 정치인 박지원을 절대 지지할 수 없다.

하지만 2016년 12월의 탄핵 정국 속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한 명 선정하면, 그건 당연히 박지원이다. 그가 홀로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가며 '1일 발의 2일 표결'안을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12월 3일의 촛불 시위대는 앞으로 벌어질 표결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이미 실패로 돌아간 표결의 절망을 안고 거리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특정 정치세력에게는 이득이 될 수도 있었겠으나, 국민들이 원하는 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미 정치 외의 다른 영역에서 충분히 '이기는 경험'을 해온 사람들이다. 2002년 월드컵으로 '세계의 벽' 앞에 무릎 꿇는 비루함이 극복되었다. 김연아 선수를 대표로 한 여러 스포츠인들의 활약은 오늘도 계속된다. 이제 한국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문화 수출국이며 경제 강국이다. 그런데 왜 유독 정치에서만큼은 '우리 정치권이 힘이 약해서 저 악당들을 이겨내지 못했다'는 찌질한 서사가 아직도 통용되어야 하는가?

정치는 결과로 말해야 한다. 국민 여러분이 힘을 모아주시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식의 무책임한 정치 세력, 적어도 나는 절대 사절한다. 욕을 먹을 때 욕을 먹더라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정치권 내부의 논리에 부합하는 행보를 하는 그런 정치인과 정치 세력을 나는 원한다. 합법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키는 데 성공한 기쁜 날, 앞으로 대한민국의 정치가 더욱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긴 글을 써 보았다. 이것은 국민의 승리이며 정치의 승리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계속, 이기는 정치를 보고 싶다.

* 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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