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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스캔들의 데자뷰를 보면서

대통령의 선의를 팔아 재벌 총수들로부터 돈을 모금했다. 재단은 대통령의 충복과 그의 측근들로 채워졌다. 그들은 당초 목적과는 동떨어진 용도로 자금을 썼다. 대통령의 퇴임 이후를 대비한 기구가 아니냐는 의혹이 흘러나왔다. 당초 모금의 강제성을 부인하던 재벌들은 권력 앞에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소연할 뿐이었다. 최순실 게이트의 시발점이 된 미르와 K스포츠 재단만 떠오른다면 비교적 젊은 세대이리라. 중장년층이라면 5공화국 일해재단의 악몽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 김방희
  • 입력 2016.12.07 09:38
  • 수정 2017.12.08 14:12

애초에 '좋은 뜻'이 있었다. 대통령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충복도 있었다. 그는 대통령의 선의를 팔아 재벌 총수들로부터 돈을 모금했다. 재단은 대통령의 충복과 그의 측근들로 채워졌다. 그들은 당초 목적과는 동떨어진 용도로 자금을 썼다. 대통령의 퇴임 이후를 대비한 기구가 아니냐는 의혹이 흘러나왔다. 당초 모금의 강제성을 부인하던 재벌들은 권력 앞에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소연할 뿐이었다.

최순실 게이트의 시발점이 된 미르와 K스포츠 재단만 떠오른다면 비교적 젊은 세대이리라. 중장년층이라면 5공화국 일해재단의 악몽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 재단은 1983년 아웅산 테러 직후 순국 사절 자녀들의 장학 사업 목적으로 설립됐다. 우리 문화와 스포츠 융성을 내건 두 재단 못지않게 취지는 건전했다. 재단은 일사천리로 설립됐다. 기금 모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두 경우 모두 50여명의 기업인들이 6백억원~8백억원을 갹출한 것도 비슷했다.

오늘날 재단 설립을 주도한 이가 안종범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라면, 당시에는 장세동 경호실장이었다. 그는 1984년 본격적인 기금 조성에 나서며 장학사업 외에 외교 전략과 국가 발전을 연구 목적을 슬그머니 추가했다. 조성된 기금으로 대통령 사저와 연못을 짓기도 했다. 최순실 게이트에서는 더 큰 사익을 추구하기 전에 사단이 났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 뿐이다. 일해재단은 6공화국 출범 후 5공 청문회가 열리면서 전모가 드러났다.

30년 전 스캔들의 데자뷰를 보면서, 경제라는 관점에서 진정 걱정스러운 것은 앙시앵레짐(ancien rgime·구체제)의 부활이다. 한국 경제 옛 시스템의 본질은 권력과 자본을 독점한 소수의 내부 거래다. 끼리끼리 해먹는 구조다. 앙시앵레짐의 외양은 시대를 달리하며 바뀌었다. 고도 성장시대에는 선택과 집중 전략의 외피를 썼다. 재벌들이 비대해지고 나서는 그들의 이해를 위해 감세와 규제 완화를 주창하는 자유방임형(신자유주의) 시장경제, 더 나아가서는 보수를 표방하고 나섰다. 이름이야 무엇이든 본질은 권력과 결탁한 소수의 기득권이 경제 전반을 장악하는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였다.

권력은 기본적으로 정실 자본주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권력은 쥐고 나면 오래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 방편이나 보상의 하나로 자본도 추구한다. 그 결과로 구축된 인맥 중심 체제가 바로 오늘날 러시아를 비롯해 신흥국 일부와 후진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실 자본주의이다. 그들만의 리그에 낀 소수는 이 시스템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권력은 장수하고 자본은 안정이 된다. 더욱이 대중의 저항을 최소화할 그럴 듯한 명분만 있다면 소수 기득권의 편의를 위한 이 시스템은 더욱 공고해진다. 푸틴과 측근들이 장악한 러시아가 표방하는 것이 위대한 러시아의 부활이라면 우리의 경우는 반공과 안보일 것이다.

하지만 권력이 아니라 자본이라면 이 편리한 앙시앵레짐의 유혹을 벗어나야 한다. 글로벌 시대 무한 경쟁을 견디고 이겨내 세계 일류가 되고자 하는 기업이라면 더 더욱 그래야만 한다. 구조화된 불법과 부정에 기댄 시스템에 젖어 있는 한 혁신은 불가능하다.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도 없다. 정실 자본주의 체제의 어떤 나라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거대 기업을 가지고 있나? 석유와 천연가스 같은 자원에 기댄 러시아 대기업들을 과연 지속 가능한 다국적기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30년 전 5공 청문회에 선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 하는 명언을 남겼다. '권력 앞에서 만용을 부릴 여유가 없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은 앙시앵레짐을 떨쳐버리려 했던 외환위기 이후가 불편하고 번잡스러웠다고, 다시 구체제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단지 좁은 국내 시장 독점이 아니라 드넓은 세계 시장을 목표로 한다면 단연코 권력을 외면해야 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같은 권력을 향한 창구를 닫아야 한다. 이번 기회에 정경유착이라는 지독한 중독을 벗어나야만 한다.

1988년 국회 '5공비리 조사특위 일해재단 청문회'에 참석해 선서를 하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왼쪽부터), 장세동 전 안기부장,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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