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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의 페미니즘은 불완전하고 매우 느리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겨울왕국’의 엘사와 ‘모아나’의 모아나가 있다. 과거에는 관객들이 ‘인어공주’의 아리엘과 ‘미녀와 야수’의 벨을 독립적이고 강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했는데, 엘사와 모아나를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보인다. 하지만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엔터테인먼트는 빨리 바뀐다. 아리엘과 벨은 내가 어렸을 때의 캐릭터다. ‘뮬란’이 나왔을 때 나는 10살이었다. ‘뮬란’을 보고 즐기기에 너무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공주에 대한 내 개념은 이미 형성된 뒤였다. ‘공주와 개구리’, ‘라푼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이 나올 무렵에는 나는 이미 디즈니가 목표로 삼는 연령 고객이 아니었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에 반했을 때 내가 그 영화들을 ‘뮬란’이나 ‘겨울왕국’에 비교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영화들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신데렐라’, ‘백설공주’에 비교했다.

이제 와서 ‘미녀와 야수’ 같은 영화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건 쉽고 여러 면에서 정당하다. 지금도 어린이들은 25년 전에 나온 이 영화를 보면서 뒤섞인 가치들을 받아들인다. 사회적 맥락은 바뀌었고, 독립적이고 마음의 짐을 지지 않은 여성 캐릭터들이 나오는 영화들도 많은데 말인다. 이 영화가 페미니스트 선언문인가? 그건 좀 무리한 주장 같다. 여성에 반하는 프로파간다를 담은 유독한 영화인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내겐 편견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가지고 있었던 기억이 나는 유일한 비디오 테이프가 ‘미녀와 야수’였다. 삐걱거리는 플라스틱 케이스에 든 VHS 테이프 속에 영화가 담겨 있었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영화다. 내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다음 해인 1989년에 개봉한) ‘인어공주’의 주인공 아리엘을 칭찬했지만 나는 비웃었다. 책을 좋아하고, 머리가 좋고, 침착한 농부 여성이 있는데, 왜 언어 장애자를 자청하면서 남자에게 목을 매는 인어 공주를 좋아하겠는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동네 공공 도서관이었고, (내 할머니가 기꺼이 증언하시겠지만) 나는 고집 세고 자기 주장이 센 아이였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뺏는다거나 내 의견을 말하지 말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벨이 평생 읽어도 다 못 읽을 소설들로 가득한 높은 책장들이 있는 야수의 서재에 들어갔을 때 내 머리는 핑핑 돌았다. 나는 후에 자라서 ‘책장포르노 bookshelfporn’ 같은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하게 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제라미 파인은 최근 저서 ‘공주를 위한 변호: 플라스틱 티아라와 동화의 꿈이 강하고 똑똑한 여성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In Defense of the Princess: How Plastic Tiaras and Fairytale Dreams Can Inspire Strong, Smart Women)에서 비슷한 감정을 회상한 바 있다. “이 영화에서 내가 정말 황홀해 하는 것? 그건 바로 서재다. 야수가 벨에게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이 가득한 서재를 보여줄 때, 내 심장은 벨의 심장과 마찬가지로 뛴다. 그리고 벨의 고향 사람들은 벨이 늘 지식에 목말라하는 것을 놀렸지만, 나는 벨이 꿋꿋이 책벌레로 남았다는 게 정말 좋았다.”

벨이 독서하는 게 영화에 별로 나오지 않는다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잔-마리 르프랭스 보몽이 1756년에 쓴 동화의 주인공이 실용적이고 학구적인데 비해, 영화에서 벨은 시시한 소설, 왕자가 나오는 동화를 주로 읽는다는 지적도 있다.

벨을 그저 ‘미녀’ 이상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페미니스트들

그러나 꿈 같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야수에게 죽을 숟가락으로 떠먹으라고 가르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이런 벨조차 결의에 찬 노력을 통해 태어났다. 최소한 1988년에 다른 작가들과의 경쟁을 통해 ‘미녀와 야수’의 시나리오를 맡게 된 린다 울버튼의 주장은 그렇다. 당시 다른 작가들로는 짐 콕스(‘올리버와 친구들’), 젠 르로이(‘월트 디즈니의 놀라운 컬러 세계’) 등이 있었다.

영국 애니메이터 리처드 퍼덤과 질 퍼덤이 각색했던 버전은 임원들이 초기 릴 몇 개를 보고 너무 침울하고 어둡다고 판단해 잘렸다. 당시 디즈니 영화 부문 수장이었던 제프리 카첸버그가 시나리오 작업을 맡기자 울버튼은 차분한 프랑스 동화를 노란 옷을 입은 고집불통 여주인공이 나오는 활기찬 뮤지컬로 바꾸었다. 울버튼은 ‘미녀와 야수’의 벨이 1933년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캐서린 헵번이 맡은 역을 참조한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울버튼은 벨을 디즈니의 새로운 여주인공으로 만들려 했으며 모든 단계에서 싸움을 거쳐야 했다.” 2016년 5월에 타임의 일라이저 버먼이 쓴 글이다. 울버튼의 시나리오는 충격적일 정도로 퇴보적인 수정을 겪었다.

"예를 들어 울버튼은 벨이 지도를 펼쳐놓고 자기가 가보고 싶은 곳들에 핀을 꽂는 장면을 넣었다. 그런데 이 장면이 스토리보드 제작 단계에서는 부엌에서 케이크 장식을 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울버튼은 항의했고, 제작진과 작가는 벨이 책에 메모를 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사실 독서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엔 너무 소극적인 취미로 여겨졌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속 벨은 책을 읽을 때마다 걸어다닌다."

‘미녀와 야수’의 스토리 고문이었던 로저 앨러스는 허핑턴 포스트에 케이크 장식에 대한 싸움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내가 참여하기 전 몇 주 동안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가 보낸 이메일이다. 그는 울버튼이 기억하는 수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린다와 스토리 팀 사이의 갈등이 일어난 이유는 린다와 디즈니의 차이에 있다. 린다는 혼자 글을 쓰는 작가로 일했고, 디즈니는 집단적으로 스토리를 만드는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와 모든 시각적 아이디어는 최선을 찾는 과정에서 리뷰와 수정의 대상이 된다. 이야기를 말하기 위한 가장 강렬한 방법을 찾는다.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주가 부엌이나 세탁실 밖에서 만족을 찾는 걸 보여주고 싶은 이상적 욕구조차 신성하지 않다.

‘미녀와 야수’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은 하찮은 동네 여성들(가스통 팬클럽)이 벨의 미모와 지성을 돋보이게 하는 용도로 사용된다는 지적도 했다. 벨이 유일하게 괜찮은 여성이라는 걸 암시한다는 말이다. 이건 정당한 주장이다. “디즈니 공주 영화들에서 흔한 주제는 주인공이 다른 여성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점이다. 잡초 속의 장미 한 송이인 셈이다.” ‘페미니스트 디즈니’라는 텀블러를 운영하는 마리 로저스가 허프포스트에 보낸 이메일이다. 그러나 ‘미녀와 야수’가 이 프레임에서 조금 벗어났다는 증거도 있다. ‘인어 공주’에 이르기까지 초기 디즈니 영화들이 자주 쓰던 전략은 혐오스럽고 나이가 더 많은 여성 악역과 여주인공을 대비시키는 것이었다. 신데렐라의 사악한 계모 어술러, ‘백설 공주’의 잔인한 왕비,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마녀가 그 예다.

1709년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퍼덤의 ‘미녀와 야수’에는 그런 캐릭터가 나온다. 모리스의 자매로, 원작 동화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상인이다. 퍼덤이 만든 스토리보드 애니메이션의 20분 정도는 온라인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버전에는 벨의 여동생 외에도 그들이 미워하는 고모가 나온다. 고모는 당시에는 돈이 많았던 형제 모리스(벨의 아버지)가 가족을 돌보는 것을 도우러 모리스의 집에 들어와서 모리스의 돈을 뜯어낸다. 모리스가 모든 것을 잃자 그녀는 가난해진 모리스와 가족들에게서 더욱더 뻔뻔하게 돈을 짜낸다. 여기서 가스통은 돈이 많고 멋을 부리는 남성이다. 가스통은 벨에게 구애하고, 벨의 고모는 가스통과 벨을 결혼시켜 새로운 돈줄을 만들려 한다.

퍼덤의 시나리오를 버린 다음, 울버튼은 벨의 관심사와 개인적 특징이 더 강하게 드러나는 버전을 주장했다. 그리고 흔히 등장하던 여성 악역도 없애버렸다.

여성 가족이나 친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돌아다니는 아름다운 소녀를 ‘페미니스트의 혁명’으로 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디즈니 작가들이 썼던 예전 시나리오의 벨과 비교해 보면 이것이 긍정적인 방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대부분 잠들어 있거나, 언어 장애를 갖고 있거나, 불평없이 집안일에만 몰두하던 디즈니 초기의 여주인공들과는 비교해 볼 필요도 없다. 디즈니의 벨은 전형적인 공주를 날려버린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작은 진보였다. 작은 진보라도 진보다.

울버튼은 작은 변화가 갖는 힘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울버튼은 타임에 “소녀와 여성들을 예전에 본 적 없는 역할로 묘사하면 젊은 세대에겐 그게 당연한 것이 된다”라고 말했다. 디즈니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잠만 자던 오로라에서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모험심 강한 메리다, ‘겨울왕국’의 대담한 엘사로 바로 옮겨갈 수 있었을까? 혹은 투지있고 침착한 여주인공들이 그저 정상일 뿐 아니라 당연한 것이 되기까지는 아리엘, 벨, 뮬란의 정상화가 먼저 필요했을까?

야수에 관한 문제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에게 있어 ‘미녀와 야수’의 가장 불편한 메시지는 아마 벨이 아니라 야수와 그의 짐승 같은 힘에 관한 유혹일 것이다. 작가 페기 오렌스타인은 허프포스트에 보낸 이메일에서 ‘적당한 여성이 야수 같고 폭력적이며 문제가 있는 남성을 ‘길들이고’ 왕자로 바꿀 수 있다는 발상’을 비난했다. ‘신데렐라가 내 딸을 먹었다: 새로운 소녀다운 소녀 문화의 최전선에서의 전갈’(Cinderella Ate My Daughter: Dispatches From the Front Lines of the New Girlie-Girl Culture)을 쓴 오렌스타인은 벨과 아리엘의 사랑 이야기는 여성들이 파트너를 찾고 그들의 삶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좋지 않은 메시지를 소녀들에게 보낸다고 지적한다. 폭력적인 야수가 있는 집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천사 같은 벨의 역할은 “디즈니의 ‘인어 공주’와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남성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할 수 있다는 발상과 마찬가지로 소녀들에게 알게 모르게 유독한 영향을 준다. 두 가지 모두 아주 불편한 상징주의이.” 로저스는 디즈니가 이 영화에서 이러한 역학을 더욱 키웠다고 지적한다. “원작에서 이야기의 요점은 늘 정중하고 친절한 야수의 행동이 무서운 외모와는 다르다는 점이었다.”

1959년에 개봉한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 이후 디즈니는 30년 동안 동화 애니메이션 제작을 쉬었다. 디즈니 공주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이 영화들에 대한 이 지적은 스트라이크 원, 투에 해당한다. 로맨스에 대한 이런 유독한 메시지는 보다 야심차고 독립적인 공주를 만들었다는 장점을 상쇄할까?

로저스는 이러한 내러티브의 위험을 지적한다. “이 영화의 러브 스토리는 공주 영화들 중에서 가장 불편하고 상당히 퇴보적이다. 야수가 언어적 학대를 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의 덩치를 이용해 벨을 겁준다. 벨이 갇혔다는 건 이 상황을 더욱 황당하게 만든다. 여성과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내면/자신의 모습을 충분히 오래 보여주면 결국 그녀는 당신을 사랑하게 된다는 ‘괜찮은 남자 nice guy’ 개념을 영속화시킨다.”

반면 파인은 벨/야수 관계를 포함하여 이 영화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에 반대한다. 이 로맨스는 납치범과 피해자 사이의 스톡홀름 신드롬이나 학대가 존재하는 연애를 묘사하는 것인가? “나는 그건 무리한 시각이며 좀 지겹다고 본다. 이 이야기에서 진정한 러브 스토리는 소외된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위안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인이 허프포스트에 이메일로 설명했다.

파인은 야수에게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기회를 얻지 못했던 남성을 보았다고 말했다. “아이에게 너는 무가치하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하면 그 말을 믿게 될 것이듯, 야수는 언제나 괴물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어느 시점부터는 괴물처럼 행동하게 된다. 벨은 야수의 삶에서 그 이상을 본 최초의 사람이다.” 파인은 한편 벨은 왜곡된 생각의 희생양이 되는 포로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야수에 대한 벨의 애정은 비이상적인 정신 상태가 아니다. (둘 다 아웃사이더고,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책을 사랑하는 등) 둘 사이의 차이보다는 비슷한 점이 더 많다는 걸 벨이 깨달을 때 애정이 시작된다.” 울버튼 역시 두 사람의 사이가 스톡홀름 신드롬을 보여준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울버튼은 올해 IGN에 “벨이 잡힌 것은 맞지만, 벨은 야수를 뒤바꾼다. 벨은 대상화가 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애나 E. 얼트먼과 게일 드 보스 등의 평론가들은 반대로 “야수에겐 벨이 볼 것이 없었다. 벨은 자기가 만들어낸 모습을 본 것이다.”고 주장한다.

공주 영화를 지지하는 파인의 시각으로 보면 모든 공주 이야기에서 여성에게 힘을 주는 메시지가 나온다(빌어먹을 ‘잠자는 숲 속의 공주’조차 그렇다). “나는 모든 디즈니 공주 영화들, 그 영화들의 원작인 고전 동화들이 여성에게 힘을 준다고 믿는다. 여성혐오적 시각으로 보지 않고 진짜 모습을 보면 그렇다. 여성의 힘과 영웅적 행동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벨과 야수의 로맨스에 대한 파인의 시각은 팬들로선 안심이 되는 입장이다. 이 영화를 보며 자란 여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본능적인 논리다. 그러나 메시지는 그런 식으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전달되는 법이다. “우리는 모두 괴상한 사람들이고 아무도 우리를, 우리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라는 건 (십대라면 특히) 자신의 연애에 적용시키고 싶은 매력적인 논리지만, 심각한 문제를 가리기도 한다. (왜 당신의 친구들은 당신의 남자친구를 불편해할까? 당신과 남자친구는 오직 서로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몽상가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당신의 친구들은 그가 당신을 형편없이 대하는 걸 눈치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시각은 독특하고 특별한 사랑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학대 행동을 별 것 아니게 여기게 할 수도 있다. 야수가 처음에 벨에게 충격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벨이 “남기로 ‘선택’했기 때문에(벨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거의 없었다), 혹은 벨이 불만을 표현했기 때문에(그리고 야수는 변했다)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봐선 안된다”고 로저스는 주장한다.

그러나 ‘미녀와 야수’가 타겟으로 삼은 아이들이 이 영화들을 즐기는 것을 보면 로맨스에 대한 위험한 생각들이 정말로 전달되는지는 파악하기가 힘들다. 어린 시절의 내가 벨의 팬이었을 때, 야수는 내 공주 판타지에 거의 들어오지도 않았다. 햇빛이 스며드는 3층 높이 책장, 예쁜 옷, 나와 정말 비슷한(나이가 더 많고 눈이 접시만했지만) 소녀를 스크린에서 보는 것이 내겐 중요했다. 벨과 야수의 폭력적일지도 모를 관계가 어린 팬들에게 정말 영향을 줄까?

전에 디즈니에서 일했고, 지금은 파티 회사인 벨라 프린세스에서 벨 등의 여주인공을 연기하는 브리트니 리 해밀튼은 전화를 통해 어린 소녀들은 보통 옷과 머리 색깔에 가장 관심을 보이고, 로맨스를 따르기 보다는 여주인공에 곧바로 감정이입을 하려 한다고 허프포스트에 전했다. “[벨과 야수가] 연애 관계라는 것을 이해하기는 한다.” 그러나 러브 스토리를 자세하게 파악하느냐는 물음에는 확답을 하지 못했다. “성인이 된 지금 그 영화들을 보면 메시지가 보인다… 외모에 관한 것이고 […] 누구와 사랑에 빠지는지가 당신의 삶을 만든다는 것이 보인다. 우리에겐 보이지만 아이들이 그걸 볼 거라고는 난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과 동료들은 아이들이 공주 영화에서 받게 될지 모를 유해한 메시지들을 막으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한다고도 했다. 소녀들은 옷과 화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거나, 왕자를 만나서 결혼하는 게 삶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등의 메시지를 말한다.

아이들이 겉으로는 영향을 받거나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해도, 이성애의 사랑과 결혼만을 이상화시키고 건강하지 못한 행동에 기반한 로맨스를 수용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디즈니의 러브스토리가 로맨스에 눈을 떠가는 사춘기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트와일라잇’보다 직접적이고 명백한 영향은 없을지도 모른다. ‘트와일라잇’의 팬들은 싸늘한 육식 동물 같은 에드워드 컬렌과 비슷한 남자 친구의 독특한 매력에 빠지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내 경험 상 야수와 비슷한 남성을 이상형으로 꼽는 여성은 드물다. 그러나 그들 역시 에드워드 컬렌의 팬과 같이 분류될 수 있을지 모른다. ‘미녀와 야수’는 로맨스에 관심을 갖기엔 너무 어린 나이일 때부터 특정 종류의 파트너를 마음 속에 두게 만든다. ‘트와일라잇’에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폭력 충동을 잘 억누르지 못하는 인간이 아닌 아웃사이더가 십대 아이돌로 등장한다.

아주 어린 나이에 이상화되지만 학대하는 관계를 엔터테인먼트에서 보게 되면, 나이가 들어서 엔터테인먼트와 현실의 삶에서 그와 같은 관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어볼 만하다. 올해 여름에 나온 한 연구에서는 디즈니 공주 영화들이 어린 소녀들에게 영향을 준다고 주장했다. “연구 대상이 된 소녀들이 공주 문화에 더 깊이 빠져 있을수록, 전형적인 여성적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영화들이 소녀들에게 주는 긍정적인 영향? 이 연구에서 밝힌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동화에서 러브 스토리를 없애기

아이들이 영화의 로맨스에 별 관심이 없고, 이런 영화에서 강조하는 가치가 영향을 잘 받는 아이들의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당연한 질문이 이어진다. 애초에 왜 어린이 영화에 러브 스토리를 넣는가? 부모와 어린이 외의 시청자들이 보기에 매력적으로 만들려는 나쁜 의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최근 영화들(심지어 공주가 나오는 것들도)을 보면 로맨스를 없애는 게 디즈니의 전략이 된 것 같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신비한 여정을 겪는 폴리네시아 소녀가 등장하는 최근 영화 ‘모아나’의 리뷰에서 ‘슬레이트’의 아이샤 해리스가 지적한 대로다. “2013년의 ‘겨울 왕국’이 디즈니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파는 방식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해리스의 글이다. 조금 먼저 나온 ‘메리다와 마법의 숲’(2012)은 모험심 많은 젊은 공주와 공주와 어머니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고전적인 동화 형식을 버렸다. 로맨스가 없는 ‘겨울 왕국’은 안데르센을 떠올리게 했고, 대히트를 쳤다. (‘겨울 왕국’을 보지 않았더라도 ‘렛 잇 고’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영화의 완벽한 왕자가 악당으로 변하는 캐릭터이고, 이성애 로맨스보다 자매애를 노골적으로 더 높인 것은 디즈니 동화의 맥락에선 혁명적으로 느껴졌다.” 해리스의 글이다.

하지만 그건 페미니즘이 셀러브리티들을 통해 주류로 나가기 시작했던 2013년의 일이다. 90년대 초의 상황은 엄청나게 달랐다. ‘미녀와 야수’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실패한 후 디즈니가 만든 두 번째 애니메이션 공주 영화였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예쁘고 마법에 걸려 혼수 상태에 빠졌다’고 설명하는 게 가장 적절할 여성에 대한 영화였다. 지금으로선 작가가 여주인공이 케이크 장식 이외의 다른 취미를 즐기는 장면의 스토리보드를 만들려고 싸우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가사만 돌보는 여주인공이 나오면 절망적으로 낡아보일 것이다. 메리다는 활을 쐈다. 뮬란과 포카혼타스는 영화 자체의 문제가 있긴 했어도 전사이고 아웃도어 활동을 열렬히 즐기는 캐릭터였다. ‘개구리와 공주’의 티아나는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건 레스토랑을 여는 게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리엘과 벨 등을 연기했던 해밀턴에게 요즘은 누굴 가장 자주 연기하는지 물었다. “엘사를 많이 한다. ‘겨울 왕국’ 캐릭터들이 제일 많다.”

울버튼은 EW 인터뷰에서 초기 디즈니 공주 영화들이 ‘문화를 반영한다’고 했다. 벨을 페미니스트적인 주인공으로 만드는 일은 “힘들었다. 여주인공-피해자라는 생각이 디즈니에서는 굳어져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결과물에 만족한다고 말한다. “한 번에 일으킬 수 있는 변화에는 한계가 있다. 벨 이전의 디즈니 공주들을 보라. 벨은 독립적이고 개방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독서하기, 야외 탐험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걸 만드는 건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벨의 대사 한 줄 한 줄이 다 전쟁이었다.”

조금씩 이뤄지는 진전

이러한 점진주의적 접근은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 수 있다. 최근의 선거가 그 사실을 보여준 바 있다. 25년 동안의 변화는 불충분한 타협으로 보인다. 왜 즉각 모든 걸 바꾸라고 싸우지 않는가? 아니면 디즈니 공주 브랜드 기계 자체를 내다버리고 페미니스트 아이들을 위한 엔터테인먼트 유토피아를 다른 곳에 세우는 건? 진보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긴 해도, 지긋지긋한 한 걸음 전진-두 걸음 후퇴를 반복할 수도 있다. 최근에 묘사된 벨의 모습은 지성보다는 미모를 강조했다고 오렌스타인은 주장한다. 2012년에 디즈니가 다시 선보인 미녀와 야수에서는 “벨의 외모는 솔직 담백함에서 경박함으로, 고결함에서 섹시함으로 갔다”고 그녀는 썼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버전의 벨과 2012년의 벨

그러나 디즈니의 지난 25년을 돌아보면 몇 가지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첫째, 디즈니와 같은 기민한 매체 대기업은 너무나 만연해 있고 집요하기 때문에 날려버릴 수가 없다. 점점 더 평등을 중요시하고 사회적 인식이 커지는 젊은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려고 변화할 의지가 있으므로 더욱 그렇다. 둘째, 점진적인 변화에 힘쓰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굉장히 답답하지만,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 보면 상당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로저스는 문제가 많았던 애니메이션 원작을 실사 영화가 크게 개선하기를 바란다. 만약 벨이 여행과 소설 이외의 다른 것에도 흥미를 보인다면 좋을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가 발명가라는 사실(작은 시골 마을에서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이 흥미롭다. 벨이 이런 관심을 가진다면 흥미로울 것이다.” 로저스가 허프포스트에 말했다.

실사 영화에서 벨 역을 맡을 엠마 왓슨도 11월에 캐릭터에 대해 단서를 흘렸다. “그렇다. 우리는 벨을 발명가로 만들었다.”

*관련기사

- 실사판 ‘미녀와 야수'의 새로운 스틸들이 공개됐다

 

허핑턴포스트US의 Coming To Terms With ‘Beauty And The Beast’ And The Imperfect Feminism Of Disney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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