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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불편러'의 불편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

신분제 시절에 누군가는 그러한 신분 제도를 불편하게 여겼을 것이고 인종차별이 일상이던 시절에 누군가는 피부색이 다를 뿐인 같은 인간을 그렇게 대우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고 시민권이 소수의 특권이던 시절에 누군가는 이것이 왜 보편의 권리가 아닌지에 대해 불편함과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에도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일상적인 것에 의문을 가지고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문제를 만들지?"

  • 김영준
  • 입력 2016.12.02 06:13
  • 수정 2017.12.03 14:12
ⓒVast Photography via Getty Images

'프로불편러'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더라. 이 용어는 보통 누군가에게 '뭘 이런 일을 가지고 불편함을 표출하느냐'는 식으로 타박하고 조롱하기 위해 쓰이는 단어인 것으로 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 이런 프로불편러들이 있었기에 진보의 길을 밟아온 것이 아닌가?

신분제 시절에 누군가는 그러한 신분 제도를 불편하게 여겼을 것이고 인종차별이 일상이던 시절에 누군가는 피부색이 다를 뿐인 같은 인간을 그렇게 대우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고 시민권이 소수의 특권이던 시절에 누군가는 이것이 왜 보편의 권리가 아닌지에 대해 불편함과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에도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일상적인 것에 의문을 가지고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문제를 만들지?"

그러나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러한 불편함이 중간에 몇 번 잘못 흐른 적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세상을 좀 더 좋은 방식으로 이끌었고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었다. 더 좋은 세상은 안락한 현실에 불편함을 느끼고 문제를 제기하며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자기가 연관된 문제에서 그러한 불편이 제기되면 매우 불쾌감을 느낀다. 대부분은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일말의 의심도 가지지 않는다. 자신의 세상 속에 '나 자신'이란 존재는 언제나 정의롭고 올바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불편함의 문제제기가 더욱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올곧은 나 자신'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란 게 참 간교해서 서로 각기 위치한 포지션에서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각자 자신만의 당위성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단 얘기다. 예를 들어 19세기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성경을 근거로 들어 흑인은 백인과는 다른 종족으로 백인이 흑인을 부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이야기했다. 심지어는 최순실마저도 "나라를 위해 일한 건데 무엇이 문제냐"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프로불편러들의 불편과 문제제기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무작정 너무 심한 것이라 생각하고 반발하기보다는 한번 고민해 봐야 한다는 얘기다. 나 또한 그런 문제제기를 받으면 처음에는 울컥하는 마음도 든다. 사람이니 당연한 것이지만 그래도 그 문제제기를 허튼소리 치부하고 무시하는 것보단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좀 더 좋은 세상으로 이끌 문제제기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 문제제기에 대해 조롱하는 것은 좋지 못한 태도라 생각을 한다. 역사적으로 프로불편러들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었으며 편안한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은 그것을 더디게 만들었다. 어쩌면 내가 지금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선하거나 올바르지 않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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