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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제자였던 물리학자의 이야기

일본 근대 물리학의 대표 주자 데라다 도라히코. 특이하게도 과학적 성과 못지 않게 뛰어난 글 솜씨로도 유명하다. 고등학교 시절 영어 교사 나쓰메 소세키를 만나 그의 문하생이 되어 문학에 뜻을 두었고, 그 후에도 문인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흔히 과학자의 글이라고 하면 상당히 딱딱하거나 건조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데라다 도라히코의 글은 다르다. 담담한 필체로 세심하게 관찰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적어 내려간다. 뛰어난 과학자의 멋진 에세이를 만나 보자.

1. 커피는 우리의 감각을 민감하게 한다.

“종교는 간혹 사람을 몹시 취하게 해서 감각과 이성을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술과 비슷하고, 커피는 감각을 민감하게 해서 통찰과 인식을 투명하게 한다는 점에서 철학과 비슷하다. 다만 술과 종교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경우는 많아도 커피나 철학에 취해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드물다. 전자는 신앙적이고 주관적이지만 후자는 회의적이고 객관적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때 작용하는 성분으로는 알코올뿐만 아니라 니코틴, 아트로핀, 코카인, 모르핀 등 여러 가지가 있으며 성분에 따라 예술의 종류가 생기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코카인 예술이나 모르핀 문학이 너무 많은 작금의 현실이 슬프기 그지없다. 커피 수필이 끝내 커피 철학 서설처럼 돼버렸다. 방금 마신 커피 한 잔에 취한 결과라 생각하시라.”(책 ‘어느 물리학자의 일상’, 데라다 도라히코 저)

글쓰기와 커피는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문인들의 커피 예찬 글이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 커피 애호가는 오노레 드 발자크다. 그는 “커피가 위로 미끄러져 들어가면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념들은 위대한 군대처럼 전쟁터 앞으로 나가고 싸움이 벌어진다.”라며 커피에 대한 예찬을 남기기도 했다. 실제로 하루 수십 잔의 커피를 마시며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커피를 좋아했을까? 바로 커피가 감각을 예리하게 만들어주고 통찰과 인식을 투명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해서다. 데라다 도라히코는 더 나아가 철학과 커피의 공통점을 짚어준다. 감각이 둔해졌다고 여겨지면, 커피 한잔으로 해결해 보면 어떨까?

2. 과학자와 예술가의 생명은 창작에 있다.

“타인의 예술을 모방하면 자신의 예술이 아닌 것처럼 타인의 연구를 반복하면 과학자의 연구가 아니다. 물론 각자가 심취하는 대상의 내용은 비교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지만 동시에 상당한 공통점도 있다. 과학자의 연구 대상은 자연현상이며 그 속에서 무언가 미지의 사실을 발견하고 아직 발표되지 않은 새로운 견해를 찾아내려 애쓴다. 예술가의 사명은 다양하겠지만 넓은 의미에서 자연과 그 현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과 표현 방법을 갈망하는 것은 분명하다. 또 과학자가 새로운 사실을 마주하면 실용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그 사실의 근원을 철저히 파고들려는 것처럼 적어도 순수 예술가는 새로운 독창적인 견해와 조우하면 실용적 가치를 떠나 충실히 묘사하려고 애쓴다. …. 세간에는 과학자가 미적 쾌락을 즐긴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다. 과학자에게는 과학자만이 맛볼 수 있는 미적 생활이 있다. 가령 옛 수학자가 세운 수많은 이론들은 정합의 미로 보면 인간의 온갖 제작물 가운데 제일 웅장하고 화려하다. 물리화학의 제반 법칙은 물론 생물 현상에서 발견되는 조화롭고 보편적인 사실도 단순히 이성의 만족뿐만 아니라 간혹 인간의 미감을 자극한다. …. 예술가는 과학자와 같은 수준 혹은 그 이상의 관찰력과 분석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쩌면 이 사실을 대부분의 예술가는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책 ‘어느 물리학자의 일상’, 데라다 도라히코 저)

흔히 과학과 예술은 대척점에 있다고 여긴다. 학창 시절 적성 검사만 봐도 그렇게 분류한다. 과학은 이성의 절정이고, 예술은 감성의 극한이라고 여긴 덕분이다. 그런데 데라다 도라히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렇지 않은 듯하다. 실제로 과학의 세계에서 발견한 규칙적인 패턴이나 하나의 질서는 미적 느낌을 들게 한다. 또한 예술의 세계는 세상을 정밀하게 관찰하여 다시 자기 식대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마치 과학 실험과 같은 과정이다. 두 영역 모두 창작에 그 핵심이 있기 때문에 이런 공통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저자는 말한다.

3. 전차(전철)의 복잡함에도 리듬이 있다.

“물론 상당히 혼잡이 심각한 시간에는 전차가 오는 족족 만원이란 의미를 초월할 정도로 차내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한 10분에서 15분쯤 가만히 지켜보면 잇달아 들어오는 차량의 만원 정도가 뜻밖에 일정한 리듬을 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원 전차라도 예닐곱 대 가량을 주기로 조금씩 다른 수준으로 사람들이 들어차 있달까. …. 5분에서 7분이 지나면 드디어 전차가 한 대 도착한다. 서 있는 사람들이 내리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앞다투어 차량에 올라탄다. 마치 이 전차를 끝으로 더는 전차가 오지 않을 것처럼 꾸역꾸역 말이다. 하지만 짧게는 수십 초, 길게는 2분 정도 간격을 두고 어김없이 두 번째, 세 번째 전차가 들어온다. 첫 번째 차량이 출입문에 사람이 붙을 정도로 만원이었다면 곧이어 도착한 두 번째 차량은 손잡이를 잡고 선 사람이 고작 한두 명이거나 잘하면 빈 좌석도 있다. 세 번째 차량은 내릴 사람이 다 내리고 나면 거의 텅텅 비는 경우가 적지 않다. …. 나는 항상 혼잡의 주기적 파동에서 ‘봉우리’를 피해 ‘골짜기’를 찾는다.”(책 ‘어느 물리학자의 일상’, 데라다 도라히코 저)

지금은 전철 도착 시간이 정확히 표시되는 경우가 많아서 위의 글이 그대로 적용 안 될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재미난 이론(?)이다. (실제로 저자는 진지하게 수학적으로 설명해 준다.) 한 대의 전차만 보내면 그 뒤로 여유로운 공간의 전차를 타게 된다. 매사에 사이클이 있기 때문이다. 데라다 도라히코의 이야기대로 굳이 혼잡의 봉우리에 탈 필요가 없다. 골짜기에 타면 가장 좋다. 뭐, 인간 삶 대부분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 놓치면 안 된다 싶어서 잡아 타면 빨리 도착은 하지만 가는 동안 여러 사람에게 치이고, 그와 반대인 경우는 여유롭긴 하지만 다소 늦게 도착한다. 선택은 자유다. 데라다 도라히코는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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