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전 세계에 차마시는 문화가 퍼지게 된 사연은 신기하다

차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도 크게 유행하였고, 일본에서도 크게 유행하였다. 차를 마시는 문화가 동아시아에서만 머물지는 않았다. 유럽 사람들은 차 마시는 풍습을 받아들였다. 차 마시기에 열광했으며, 몇몇 국가에서는 우유 등을 타는 등 마시는 법을 새롭게 개발하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고, 각 국은 자신들 특유의 차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차에 대한 역사 중 일부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 속에 전체 역사 또한 녹아 들어있다.

1. 유럽인들은 차 마시는 것이 불결하다고도 했다.

“차에 대해 유럽인이 쓴 최초의 기록은 아라비아 여행자의 기행문 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거기에 879년 이후 중국 광동의 주요 수입권이 소금과 차에 부과된 세금이었다는 게 적혀 있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원나라) 재무대신이 1284년에 차 세금을 제멋대로 올렸다는 이유로 면직된 사실을 기록하였다. 유럽인들이 극동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것은 위대한 발견의 시기였다. 16세기 말경에 네덜란드인들은, 동양에서는 관목의 잎으로 상쾌한 음료수를 만들어낸다는 새로운 소식을 유럽에 전하였다. …. 이 세상에 좋다고 하는 모든 것처럼 차 또한 선전하는 과정에서 반대에 부딪쳤다. 헨리 새빌(1678)과 같은 이단자는 차 마시는 것을 불결한 관습이라고 비난하였다. 죠나스 한웨이(‘차에 관한 수상록(Essays on Tea)’, 1756)는 “차를 마시면, 남자는 키가 작아지고 단정함을 잃는 것 같고, 여자는 그들의 아름다움을 잃는 것 같다”고 말하였다. …. 18세기 전반에 런던의 커피집은 사실상 찻집이 되었고, 애디슨과 스틸 같은 문인들은 안식처로 여겨 차를 마시면서 무료를 달랬다. 그 음료는 곧 생활필수품이 되었고 과세 대상이 되었다.”(책 ‘차의 책’, 오카쿠라 텐신 저)

어떤 외래 문화든 새로 받아들여짐에는 마찰이 따르기 마련이다. 차도 마찬가지였다. 일찍부터 차에 대한 존재를 알았지만 널리 마시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아시아와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차는 유럽인, 특히 영국인들의 필수품이 되었다. 훗날 미국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을 생각해 보면 당시 차의 위상을 익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딴죽을 거는 사람은 늘 있다. 불결하다고도 했고, 체면을 깎는 행동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차의 향긋함에 모두 파묻히게 되었다.

2. 차 문화의 시조는 당나라 육우다.

“4~5세기 경, 차는 양쯔 강 유역의 주민들이 가장 즐겨 마시는 음료가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현대적 표기인 ‘차(茶)’라는 글자가 만들어졌는데, 분명 고대의 도(荼)가 와전된 것이리라. …. 그러나 이 시기에 차를 마시는 방식은 지극히 원시적이었다. 잎을 쪄서 절구로 찧어 떡으로 빚어서는 쌀이나 생강, 소금, 귤껍질, 향신료, 우유, 때로는 양파까지 넣어서 함께 삶는 그런 방식이었다. …. 그렇게 조잡한 방식으로부터 차를 해방시키고 또 이상적인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당 왕조의 천재들이 필요했다. 8세기 중엽에 등장한 육우(陸羽, 727?~803?)는 차의 개조(開祖)다. 육우는 불교와 도교, 유교가 서로 통합을 모색하던 시기에 태어났다. 다신교적인 그 시대의 특징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체적이고 특수한 것에 보편적인 것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게 하였다. 시인이었던 육우는 차 마시는 일에서 만물을 지배하고 있던 것과 똑 같은 조화와 질서를 보았다. 육우는 탁월한 저작 ‘다경(茶經)’에서 차의 규범을 체계화하였다. 그 후로 육우는 중국의 차 장사꾼들 사이에서 수호신으로 숭배되었다.” (책 ‘차의 책’, 오카쿠라 텐신 저)

어떤 것이든 시조가 있다. 때로는 시조로, 때로는 아버지로 불린다. 차 문화에는 당나라 사람 육우가 있다. 단순히 마시는 일에서 품격 있는 문화로 한 단계 이상 올려놓았다. 특히 차의 재료인 차나무 본성, 찻잎을 따서 모으는 도구, 찻잎을 고르는 방법, 차와 관련된 도구, 차 달이는 법 등을 정리해 놓은 저작을 남김으로써 후대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3. 중국을 부지런히 배우던 일본 차 문화가 앞지르기 시작했다.

“729년 그 이른 시기에 이미 쇼오무(724~749) 천황(일왕)이 나라의 궁궐에서 백 명의 승려들에게 차를 나누어주었다. 그 찻잎들은 아마 당나라에 갔던 사신들이 가져온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대로 달여 먹었을 것이다. 801년, 사이쵸오 스님이 씨앗을 좀 가져와서 히에이잔에 심었다. 이어지는 세기에는 귀족들과 승려들이 애호하는 음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차밭도 많아졌다고 한다. 송나라 차는 남종선을 배우러 송나라에 갔던 에이사이 선사가 가지고 돌아왔다. …. 15세기에는 쇼오군 아시카가 오시마사의 후원 하에 챠노유우는 완전히 정립되어 독자적이고 세속적인 행위가 되었다. 그 이후로 다도는 일본에서 완전히 자리 잡았다. 현재 중국의 우려내는 차는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알려졌을 뿐이고, 일본에서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 일본의 챠노유우에서 이상적인 차의 정점을 보게 된다. 1281년 몽고 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침으로써 송대의 움직임을 지속해나갈 수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오히려 유목민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끔찍하게도 끊어져버렸다.” (책 ‘차의 책’, 오카쿠라 텐신 저)

일본은 다른 나라의 문화를 흡수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임진왜란 때 우리의 도공을 잡아다가 도기 문화를 발전시켰다. 서양 음식을 받아들여 일본인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재창조하기도 했다. 차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이 몽골족의 지배를 받아 차 문화를 발전 못 시키고 있을 때 일본은 치고 나갔다. 일본의 차 문화가 이때부터 중국을 앞서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허프북스 #차 #중국 차 #일본 차 #다도 #당나라 육우 #다경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