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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여성들이여, 이제 '여성을 위한 행진'을 할 시간이다

ⓒgettyimage/이매진스

20년 전 나는 '미국에선 여성 대통령보다 흑인 대통령이 먼저 나올 것'이라고 신문사 동료에게 말했다. 그는 “말도 안 돼! 미국에선 인종 차별이 아직도 고질적이야.”라고 말했다. 교육받은 백인 남성이 미국에 만연한 인종 증오는 잘 알면서도 어쩌면 그보다 더 깊을지도 모를 여성혐오에는 완전히 무감각하다는 게 내겐 충격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고, 흑인 남성이 대통령이 된지 8년이 지났다. 그와 똑같은 무감각함 덕분에 수치를 모르는 편견투성이인 사람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를 통치하게 되었다. 물론 백인 인종 차별주의자들은 11월 8일에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지만, 승패를 가른 것은 남성과 여성을 포함한 백인 여성혐오자들이었다. 사상 대선 후보 중 가장 훌륭한 자격을 가진 백인 여성보다는 성격상의 결함이 있고 경험이 없는 백인 남성을 대통령으로 뽑겠다는 미국인들이 그들이다.

대부분의 흑인들, 특히 여성들은 제대로 이해했다. 흑인 여성 투표자 중 94%, 흑인 남성 투표자 중 80%는 인종차별과 여성혐오에 반대하며 힐러리에게 투표했다. 흑인 여성의 클린턴 지지율이 남성보다 14% 더 높았음은 여성들이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상호교차적(intersectional)으로 투표했음을 보여준다. 흑인 여성이 인종적으로 압제 받았던 역사적 경험이 여성으로서의 그들을 향한 다른 형태의 선입견을 더 잘 알아볼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1963년 시민권을 요구하는 워싱턴 행진

백인 남성의 표 중 63%가 트럼프에게 간 것을 보면 성차별, 인종차별을 하는 남성들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들 중 상당수는 매체에 많이 보도되는 연소득 5만 달러 이상의 환멸을 느낀 블루컬러일 것이지만, 그게 어떻게 독재자를 당선시키는데 대한 변명이나 설명이 되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백인 여성의 표의 53%가 여성을 돼지, 게으름뱅이라고 부르고 내키는대로 그들의 ‘x지’를 움켜쥐는 남성에게 갔다는 걸 보면, '우리는 부정과 자기 혐오가 흔하다', '여성혐오가 백인 여성들 사이에도 스며들어 있다'고 결론내려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눈에 보이게 되고,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 되는 압제와 지배의 형태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미국에서, 여성혐오는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 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여성혐오는 지금도 옛 정상(old normal)이다. 트럼프는 예전과 같은 백인, 남성 우월주의적 정상 상태를 기반으로 선거 유세를 펼쳐 승리했다.

주로 백인 남성인 평론가들에게 속지 말자. 그들은 우리가 트럼프가 얻은 표가 젠더나 인종과는 상관없다고 믿게 만들려 한다. 찍을 만한 민주당 후보(아마 남성을 말하는 걸 것이다)가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새로운 진보 기득권층, 정치 엘리트에 대한 반발이었다고(그래서 낡은 보수 엘리트에게 표를 줬다?) 믿게 만들려 한다. 물론 다른 요인들도 관련이 있지만, 그토록 부적절한 후보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을 힐러리 탓으로 돌리는 건 비뚤어진 행동이다.

우리는 힐러리가 일반 투표에서는 승리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지만, 결국 우리는 트럼프가 출마했다는 자체에 경악하고, 그의 성폭력 자랑이 표를 얻어다 주었다는 것에 놀라야 했다. 백인 여성 투표자들의 절반 이상이 생각없이 자신의(그리고 우리의) 발등을 도끼로 찍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하는 건 정당하다. 이 여성들은 여러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자라면서 존경하라고 배웠던 가부장적 인물을 계속해서 찾는 경향이 있다. 그 존경에 대한 보답이 없다 해도 말이다.

BBC 다큐멘터리 ‘의외의 트럼프 팬들'(Trump's Unlikely Superfans)에서 트럼프 지지 집단인 ‘베이브스 포 트럼프’ 회원에게 트럼프의 모멸적인 성차별 발언에 대해 묻자 완벽한 답변이 돌아왔다. “난 모든 남성들이 좀 그렇다고 생각한다.” 여성혐오가 그녀에겐 정상이다. 그녀 같은 여성들은 트럼프들과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 형제, 삼촌, 동료가 그들이었다. 성차별은 그녀 삶의 바탕 화면이었다. 맥도날드 로고 만큼 문화적으로 친숙하고 보편적이었던 것이다.

힐러리가 트럼프의 ‘여성 카드’ 트윗에 반격하며 “만약 여성을 위해 싸우는 게 #WomanCard 라면… 난 참여하겠다”고 답했다. 지지를 끌어내 마땅할 발언이었지만, 큰 반응은 없었다. 해결책을 필요로 하는 여성들 본인이 문제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남성들이 그렇다.’ 여성혐오는 미국 문화에서 너무나 자생적이라, 지금도 가장 위험한 괴물,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괴물이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버락 오바마가 탈인종주의 미국의 심볼이라면, 힐러리 클린턴의 패배는 ‘백인들의 반발’일 뿐 아니라, 탈페미니스트(post-feminist) 미국이 얼마나 머나먼 일인지를 상기시켜 주는 날벼락이다. 우리가 왜 충격을 받는가? 미국 여성 인권 운동은 늘 시민권 운동보다 뒤쳐졌다. 흑인 남성들은 1870년 2월에 투표권을 얻었다. 여성들이 마침내 참정권을 얻은 1920년 8월보다 무려 50년 전이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내가 낙관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좋은 (그리고 나쁜) 소식은 다음과 같다. 정령이 정말로 램프 밖으로 나왔다. 미국의 새 대통령은 '강간 문화'의 세계적 상징이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트럼프의 반감은 ‘대안 우파’와 ‘남성계(manosphere)’ 등 미국의 가장 추한 부분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성질 더럽고 허풍을 떠는 트롤은 미국 백인 남성 투표자의 63%와 닮았을 뿐 아니라, 전세계 네오파시즘의 등불이다. 당신의 친구와 가족들 중 이 사실을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당신을 역겹게 만든다. 이제 아무도 가장할 수 없다. 부정도 변명도 안 된다.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것도 이제 안 된다. 관용과 협력을 할 때와 장소가 있다. 지금 여기는 아니다. 폭군과 ‘손을 잡고 일할’ 수는 없다.

과거 그 어느 때와도 달리 일어서야 할 때다. 소셜 미디어에서 외치고, 거리에서 시위하고, 정치적이 될 때다. 당신의 친구가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이 누구의 편인지 생각해 볼 때다. 용감해지고 우리의 자유를 수호해야 할 때다. 여성들이 워싱턴에서 행진해야 할 때다. 남성들이 우리 편에 서야 할 때다.

동 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은 뻔뻔하게도 전세계 남녀에게 시련을 주었다. 괴물은 이제 눈에 선명히 보인다. 트위터에서, 전세계 신문 가판대에서 독을 내뿜고 있다.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그가 우리, 우리 딸들, 우리 어머니들, 우리 자매들, 우리 아내들의 ‘X지’를 움켜쥘 때 우리는 그저 바라만 볼 것인가, 그의 불알을 움켜쥐며 반격할 것인가?

트럼프 취임식 다음 날인 2017년 1월 21일에 미국과 전 세계인들은 단합하여 워싱턴에서 여성 행진을 할 것이다. 누구나, 어디에서나 참여할 수 있는 여성 인권 지지 시위다. 오전 10시에 시작해서 오후 5시에 끝날 것이다. 시작 지점이자 종료 지점은 링컨 기념비다. 1963년에 위대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나에겐 꿈이 있다’는 연설을 했던 곳이다. 세계는 그 꿈은 아직도 살아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여성을 위한 꿈이다.

* 위의 글은 The Huffington Post US에서 소개한 기사를 한국어로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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