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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없이도 좋은 詩를 쓸 수 있어야 한다

21세기 초입에 제정된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희롱을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 행위로 규정한다. 직장마다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한 지도 제법 오래다. 그래도 좀체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 수천년 동안 인간의 뇌리에 축적된 편견이 DNA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의도라도 시대에 맞는 언행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자신의 세대에는 너무나 익숙한 습관도 다시 점검해보아야 한다. 나이 들수록 되돌아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내다보며 살아야 한다.

  • 안경환
  • 입력 2016.11.22 10:18
  • 수정 2017.11.23 14:12
ⓒgettyimagesbank

"요즘 한국 문단에 좋은 시가 드물다.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이다." 연전에 원로 시인 고은이 쏟아낸 탄식이었다. 그의 시대는 그랬었다. 삶에 절망한 사람, 세상에 분노한 사람이 찾는 것이 문학이었다. 그런 문학의 길에 필수적 장비가 술이었다. 술이 바로 문학이고 소설이며 글쓰기의 다른 명칭이다. 원로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진단이다.

서양도 마찬가지였다. 서구 문화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의 예술은 디오니소스신(神) 축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 축제의 신, 위반의 신, 광기의 신이다. 평상시에 금기였던 행위도 축제에서는 위반할 수 있었다. 성과 폭력이 난무하는 디오니소스 축제는 동물적 광기가 신성의 체험으로 구현되는 황홀경이었다. 이렇듯 음주와 예술은 탈속(脫俗)의 도구였다. 술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성(聖)과 속(俗), 선(善)과 악(惡)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의 잠재적 욕구를 분출시켜 주었다. 무수한 권주가(勸酒歌)들이 술에 기댄 각종 기행과 일탈을 칭송했다.

근대 한국은 '술 권하는 사회'였다. 예술가들만 술에 탐닉한 것이 아니다. 모든 한국 사내가 술 단지를 곁에 끼고 살았다. 술자리에 끼지 못하는 남자는 제대로 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 한국 사회는 술 문화에 지극히 관대하다. 음주 운전만 해도 그렇다. 다수의 한국인은 음주 운전 경험이 있다. '대리운전기사'라는 기이한 직업도 있다. 현임 경찰청장은 하급 간부 시절에 음주 운전으로 큰 사고를 낸 전력이 드러났지만 무난하게 임명되었다. 분개한 국민은 거의 없었다. 다른 선진국에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다.

오랫동안 술은 철저한 남성의 도락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술 맛을 돋우는 안주 노릇을 강요당했다. 술자리에서 진지한 이야기든 실없는 농담이든 여성은 사내들의 사연을 경청하고 반응해야 한다. 대체로 술 마시는 남자의 권력과 금력에 기생하지만 때로는 허점을 찔러 잇속을 챙기기도 한다.

지난 20여년 한국 사회는 치열한 '평등의 전쟁'을 치러왔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징집된 전쟁이다. 가장 첨예한 전선이 성차별 철폐 전선이다. 모든 분야에서 견고했던 남성의 지배 체제가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다. 이제 여성도 술자리의 엄연한 주빈(主賓)으로 동참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축적되어 온 사내의 음주 문화가 강한 도전을 받고 있다. 남녀가 함께한 술자리는 자리를 옮긴 직장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관용으로 넘겨주었던 각종 취중 일탈도 엄정한 심판을 받게 되었다. '성희롱'이라는 새로운 범주의 범죄가 탄생했다. 이 신형 범죄는 해묵은 형사법의 보편적 상식을 뛰어넘는다. 가해자의 죄의식과 무관하게 내리는 일종의 '사회적 단죄'인 것이다. 상대의 매력을 칭찬하려는 의도로 건넨 말도 상대방의 주관적 성적 수치심을 유발했다면 성희롱이 된다. 21세기 초입에 제정된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희롱을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 행위로 규정한다. 직장마다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한 지도 제법 오래다. 그래도 좀체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 수천년 동안 인간의 뇌리에 축적된 편견이 DNA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의도라도 시대에 맞는 언행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자신의 세대에는 너무나 익숙한 습관도 다시 점검해보아야 한다. 나이 들수록 되돌아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내다보며 살아야 한다.

근래 들어 문인과 예술 종사자들의 성희롱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 수면 아래 산적해 있는 거대한 치부의 일부가 드러났을 뿐이다. 성희롱의 본질은 권력자와 그 권력의 피해자 사이의 문제다. '문화 권력'도 엄연한 권력이다.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이 어떻게 피해자를 만들어내는지 항상 유념해야 한다. 성적 욕망은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이다. 가장 아름다울 수도, 더없이 추해질 수도 있는 욕망이다. 그 욕망이 권력과 결합하면 추(醜)의 극치를 이룬다.

세상이 크게 달라졌다. 앞으로 더욱 급격하게 달라질 것이다. 개명된 사회는 사람을 구분하지만 차별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여자도 술에 취할 수 있고 성희롱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그게 사회가 발전하는 증거다. 도널드 트럼프를 미국 대통령으로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도 그가 여성을 비하하는 것을 장기로 삼는 시대에 역행하는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 이 글은 조선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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