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개념국민의 착한 시위'라는 프레임

정치적 의사를 표시한 스티커는 '민폐'나 '무개념' 행동이 되는가? 의경들의 고충은 생각도 못한? 트위터에서 이미 여러 사람들이 지적한 말을 그대로 옮기면, 저것은 "대자보를 지저분하다고 떼는" 행위이기도 하다. 어째서 목소리를 시위대가 나서서 자진 철거하는지? 백도라지님의 말처럼 우리가 시위에 나가서 맞닥뜨리는 의경이나 방패, 물대포 등은 공권력이 육화한 것이다. 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의 책임을 엄밀하게는 그 자리에 없었던 강신명에게 묻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들에게 서사를 부여하고 공권력으로서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고충을 헤아리는 것은 행정적 책임자를 사적으로 해석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 짐송
  • 입력 2016.11.21 09:52
  • 수정 2017.11.22 14:12
ⓒ연합뉴스

국회의원이 '경찰도 제복 입은 시민'이라며 '백남기 농민도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표창원)이라고 하는 데서 진심 우울해졌다...제복을 입으니까 물대포를 쏠 수 있는 권력이 생기고 거기서 이미 동등한 시민이 아닌데,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지켜보고 있을 거란 말을 이 맥락에서 하는 것은 '사이좋게 지내요'의 시위대 버전이군. 나이브하다. 어쩌면 저렇게 나이브할 수가.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저것은 "대자보를 지저분하다고 떼는" 행위이기도 하다. 어째서 목소리를 시위대가 나서서 자진 철거하는지?

저 소식 듣고 새벽 내내 속이 불편했는데 기사로도 떴다. 그리고 정말 '착한' 시위대의 프레임을 씌운다. 대환장. '잘못'이라면, 정치적 의사를 표시한 스티커는 '민폐'나 '무개념' 행동이 되는가? 의경들의 고충은 생각도 못한? 트위터에서 이미 여러 사람들이 지적한 말을 그대로 옮기면, 저것은 "대자보를 지저분하다고 떼는" 행위이기도 하다. 어째서 목소리를 시위대가 나서서 자진 철거하는지? 백도라지님의 말처럼 우리가 시위에 나가서 맞닥뜨리는 의경이나 방패, 물대포 등은 공권력이 육화한 것이다. 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의 책임을 엄밀하게는 그 자리에 없었던 강신명에게 묻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들에게 서사를 부여하고 공권력으로서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고충을 헤아리는 것은 행정적 책임자를 사적으로 해석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대통령이 인간이 아니라 국가 기관이고, 그래서 일거수 일투족이 기록되고 국민들이 알아야 하며 병원 하나 가는 것도 공적이어야 하듯.

언론에서 종일 평화시위, 성숙한 시민의식이라고 '평가'하고 시위에 참석한 시민들이 스스로 이 프레임에 갇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징조이다. 어떤 위험이냐면, 시위라는 정치적 행위를 선의와 인정으로 뭉개 '무해'하고 '비폭력적'인 자신을 입증하려고 하는 것이며 이는 시위를 궁극적으로 탈정치화하여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국가와 제도에 맞서는 시위 자체는 무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다. 폭력적이어야 한다. 게다가 요즘의 시위는 차벽도 통제도 존재하며, 시위를 하는 형식이 비폭력적이라면 집회 현장에서 무고한 피해자(사업자나 행인 등)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 공권력에 감정 이입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는 이전의 폭력적인 시위대와 다른 성숙한 시민이라는 구분짓기는 궁극적으로 선을 넘었다는 것만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고자 한 맨몸의 시민을 죽음에 이르도록 물대포를 쏴댄 국가권력에 힘을 실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위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공권력이 시민을 살해한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았고 진상 규명이나 책임자 처벌은 아직 이뤄지지조차 않았는데?

'무고하게 국가에 동원된' 무장한 개개인이 불쌍하다면 자신의 맨몸을 던지며 싸울 수밖에 없었던 용산 참사나 대추리 투쟁을 어떻게 볼 것인지 묻고 싶다.

그 선이 도대체 뭐길래? 폭도와 시민은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규정하는가. 그건 엄밀히 말하면 시민들의 의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지금의 시위가 축제처럼 즐겁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것이 '더 수준 높고' '발전한' 시위는 아니다. 그저 시위의 한 형태 중 하나일 뿐이고, 정국이 이러니까 대놓고 진압을 못할 뿐이다. 언제든 수 틀리면 시위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폭력 행위, 선동으로 판단되어 진압당할 수 있다. 비폭력 시위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 시위에 대한 강박이 이렇게 본질적으로 시위의 의미를 훼손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상황이 기이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폭력 시위가 성숙하고 좋은 것이라면, '무고하게 국가에 동원된' 무장한 개개인이 불쌍하다면 자신의 맨몸을 던지며 싸울 수밖에 없었던 용산 참사나 대추리 투쟁을 어떻게 볼 것인지 묻고 싶다.

이십대 초반 광화문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닐 때 그날 시위가 있는 줄 모르고 버스를 탔다가 내렸다. 집회에 참석하려고 통제된 길을 헤매는 동안 수십 명의 의경들이 선 바깥의, 짧은 치마를 입고 핸드백을 든 나를 '시위대일 리가 없는 (정치에 관심 없는 어린 여자) 시민'으로 판단하여 깍듯하게 사과하며 지나갔다. 그러나 선을 넘어 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토끼몰이의 대상이 되어 캡사이신을 맞았다. 몇 분 사이 나는 보호해야 하는 '선량한 시민'에서 '폭도'가 된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노점 상인이고 행인이고 시위참가자고 구분이 없어지고, 그저 눈에 띄면 다 족치는 상황만 남는다.

앞장서서 스스로의 행동을 검열하며 '개념 국민'이 되지는 않아야 한다.

쓰레기를 줍고, 물건을 부수지 않고, 차벽에 올라가지 않고, 스티커를 떼는 것은 국가가 시위대를 진압 대상으로 볼지 말지와는 전혀 무관한 사안이다. 판단과 집행은 공권력만 할 수 있고, 시위에 나간 우리는 누구나 '심기를 거스르면' 즉 위험한 행동을 하면 가혹하게 진압 당할 수 있음을 안다. 이것이 권력의 격차이다. 외국의 시위가 상징적인 건물을 파괴하며 마음껏 '규범과 일상적 풍격을 타격'할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그들이 죽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없다. 한 사람이라도 더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하여 2016년 11월의 시위들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여기까지는 동의한다. 다만 그러한 위협이 코 앞에 닥치지 않은 상황에서조차, 앞장서서 스스로의 행동을 검열하며 '개념 국민'이 되지는 않아야 한다. 그들의 수고가 실존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탓이 아니며 시민에게는 어떤 의무도 없다. '무고한 누군가'를 애꿎게 고생시키지 않는 방법은 예외적인 행동, 시위 등을 전혀 하지 않는 길뿐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비폭력 #집회 #시위 #짐송 #사회 #촛불시위 #경찰 #백남기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