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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의 탄생' 작가가 지적하는 '대한민국 할배들이 꼰대가 된 이유'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독거노인생활관리사 최현숙

“박 대통령은 당장 계엄을 선포해 빨갱이들을 모조리 잡아넣어야 한다.”

“대통령이 하야할 만큼 큰 죄 지은 거 없다.”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 100만명 이상이 운집해서 사상 최대의 촛불집회를 벌이던 날, 여의도 의사당 앞에선 보수단체 회원들 700여명이 모여 ‘박근혜 퇴진 반대 집회’를 열었다. ‘임기보장’, ‘국가수호’ 같은 손팻말을 흔들며 “종북좌파를 때려잡자”고 나선 이들 대부분은 60~70대의 노년층이었다.

국가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격렬한 구호로 극우세력의 전초병이 되어왔던 노인들을, 일당벌이를 위해 동원된 알바부대로 치부하는 건 안일한 단순화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서 20대 지지율이 0%로 집계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 속에서도 60대 이상 지지율은 13%로 상당한 격차를 보였다. (한국갤럽, 11월11일 주간집계. 일주일 뒤인 18일 주간집계에선 20대와 60대 이상 지지율이 각각 1%와 9%로, 격차가 조금 줄었다.)

내전의 상처 속에서 밥을 굶고 배움의 기회를 잃었던 불행한 세대, 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면 된다’는 구호 아래 전투 같은 생존경쟁을 버텨온 세대, 권력 아래 숨죽이며 탐욕과 연줄의 성공 회로에서 거듭 도태되어온 세대. ‘성장신화’와 ‘국가안보’는 그들 남루한 인생의 가장 빛나는 자부심이다. 그 가치가 도전받을 때, 노인들은 자기 인생을 모독당한 양 서슬 퍼런 적개심을 드러낸다. 세상은 변화를 부인하는 그들을 혐오하고, 그들은 변화를 외치는 세상을 불온시한다. 그들과의 소통은 불가능한 것일까?

최근 출간된 <할배의 탄생>은,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입으로 그들의 인생을 돌아본 구술생애사의 기록이다. 특별히 내세울 간판도 없이, 가난하고 평범하게 살아온 70대 남성 노인 두 사람의 인생사를 담은 <할배의 탄생>에는 ‘어르신과 꼰대 사이, 가난한 남성성의 시원을 찾아’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글쓴이는 독거노인생활관리사인 최현숙(59)이다.(도서 '할배의 탄생' 정보 보러 가기)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그들을 만나,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그들 가슴속 깊은 응어리와 구겨진 청춘의 기억들을 끄집어냈다. 군에서 ‘빳다’를 맞으며 ‘요령’을 익히고, 바람을 피우거나 매춘을 하고, 빚을 지고 살림을 거덜 냈다가, 다시 맨땅에서 시작하는 우여곡절의 개인사 속에, 한국전쟁과 월남전, 유신정치와 서울올림픽 같은 한국현대사가 교차된다. 70대 할배들의 생애 구술사 속에서 필자가 찾아낸 단서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지난 9일 이른 아침, <한겨레> 사옥에서 최현숙을 만났다.

역사적 기록에서 배제된 이들의 인생사

-아침 일찍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집이 여기서 가까워요. 담당하는 구역도 이 근처고요. 원래 오늘 오전에 김장 봉사에 가려고 했는데…. 인터뷰 끝나는 대로 달려가려고요.(웃음)”

헐렁한 후드티에 검은 점퍼를 걸친 그는, 언제라도 고무장갑을 끼고 김장 행사에 출동할 태세였다. 자신을 가리켜 “앞치마 두르면 식당 아줌마, 빗자루 들면 청소 아줌마”라고 깔깔 웃으며 말했지만, 그는 <할배의 탄생>을 포함해 지난 3년간 이미 세 권의 책을 낸, 필력 좋은 작가이다. 2013년에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란 제목으로 80~90대 여성들의 구술 생애사를 내놓은 데 이어, 이듬해에는 50~70대 여성들의 삶을 담은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다시 가느다란 길이 나왔어>를 출간했다. 이번에 출간한 <할배의 탄생>은 70대 남성들의 노동과 가정, 성(性)을 가감없이 기록한 세 번째 책이다.

-세 권 모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특별히 내세울 경력도 없는 가난한 독거노인 이야기입니다. 독거노인에 주목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우리 사회 역사와 기록들은 모두 ‘배운 사람’,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거나 그들의 관점에서 정리된 것들이잖아요. 사회적으로 소외된 존재들을 만나서, 발언되지 못했던 그들의 목소리를 드러내 우리 역사의 한 영역으로 공유하는 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어요.”

-구술자의 개인사를 기록하고 맨 뒤에 생애 연표를 달아놓았던데요. 70대 남성들의 일대기와 나란히, 해방과 한국전쟁, 베트남전, 88올림픽 같은 역사적 사건들이 병기되어 있어서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 같은 걸 보는 기분이었어요.(웃음)

“못 배운 사람들은 자기를 역사적으로 객관화하기가 쉽지 않아요. 자신의 노점상 생활이나 월남파병 같은 경험이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건지 따져볼 생각을 못합니다. 사회와 유리된 개인이 아니라, 자신을 사회적인 존재로 의미규정하고, 스스로 그간 어떤 역사적 사건과 조응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하고 싶었어요.”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처럼 나온 영화가 70~80대 남성들의 일대기를 조명한 <국제시장> 아닐까요? 그 영화는 이 세대 남성들이 얼마나 어렵게 자수성가했으며, 가족 부양을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 허덕이고 살았는지 보여주는, 눈물 어린 성공담이었단 말이에요. 물론 저도 눈물 철철 흘리면서 보긴 했지만….(웃음)

“저는 <국제시장>이 보여주는 그런 성공의 개념에 반대해요. 악착같이 돈 벌고, 가족을 온전하게 보전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간주되는데, 이게 우리 사회의 소위 ‘정상 이데올로기’를 구성하죠. 현실에서 마주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실 ‘다양한 비정상’들이에요. 돈을 벌 수도, 못 벌 수도 있고, 이혼을 하든가, 결혼을 못하기도 하고…. 그런 이들을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그 기준을 내면화해서 자기 삶은 쓸모없다든가 창피하다고 여기는 건 온당치 않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대상자는 어떻게 정하세요?

“저의 기준은 ‘아무나’예요.(웃음) 그냥 아무나 붙잡고 생애 이야길 해도 한 세상이 나온다고 믿어요. 그 ‘아무나’ 중에서 제일 ‘꽂히는’ 사람은, 말 많고 상처와 억압이 많은 사람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이고요. 얘깃거리가 많으니까요.”

-인터뷰 요청을 하면 순순히 허락들을 하던가요?

“대개는 오랫동안 저하고 관계가 있던 사람들이죠. 신뢰가 중요하니까. 독거노인생활관리사를 하면서 만난 노인들, 혹은 주변의 동료들 같은 경우요. 그래도 막상 하려고 하면 쉽진 않아요. 80~90대 노인은 제가 딱 3명 섭외해서 3명 다 그 자리에서 오케이를 하고 끝까지 했어요. 근데 50~60세대로 오면서는 4배수를 했어요. 12명 섭외했고 그중 딱 3명이 남았죠.”

-아! 9명은 중도 포기했군요.

“‘하겠다곤 했는데 집에 가서 생각해 보니 도저히 안 되겠다’고, ‘서방도 살아 있고, 새끼도 있고, 친척도 있고….’ 여성들의 경우엔 그래서 포기한 경우가 많아요. 뭐, 더 늙기를 기다려볼 수밖에요.(웃음)”

독거노인생활관리사로 주 25시간 일을 하는 틈틈이 인터뷰를 하고, 녹음을 풀어 녹취록을 만들고, 글로 옮기는 작업을 병행했다. 한 사람을 만나는 기간은 대개 6개월가량. 일부러 일정을 촘촘히 잡지 않는다. 이야기한 뒤 다시 생각하고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이다.

남성다움의 요건은 돈, 체력, 정력

-지극히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 여자 문제라든가 성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고백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었어요. 노인들이 좀처럼 입 밖에 내지 않는 주제들인데….

“아주 구체적인 생애 경험들, 섹스의 경험이든 노동의 경험이든 가족 간의 끈끈한 애증의 경험이든 그 기억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이분들이 자기 삶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나이 드신 분이라 해도 독거 남성 노인이 연하의 여성에게 자신의 여성 편력이나 섹슈얼리티를 고백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오히려 이분들이 많이 배웠거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분들 같으면 위선과 교양으로 포장하느라고 제대로 얘길 안 했겠죠.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엔, 성관계가 노동이나 거주, 가족 관계하고 직결이 되거든요. 부자들은 가정은 가정대로 유지하고 직장은 직장대로 유지하면서 따로 여자 문제를 처리할 수도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안 그래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란 말도 있는데, 섹슈얼리티는 굉장히 정치적인 것이어서 전 그분들의 성에 대한 얘길 꼭 듣고 싶었어요.”

“남자는 허리 꼬부라져도 지푸라기 하나 집어 들 기운만 있으면 선다는데, 여자는 나이 들면 힘들더라구. 그래서 나는 불만이 많아. 욕구를 풀어야 하잖아… 홀애비 3년이면 이가 서 말이고 과부 3년이면 보리쌀이 서 말이래잖아. 그 말이 정말 뼈있는 말이야. 남자는 마누라 없으면 성욕을 돈으로 해결하잖아. 그러구 서방 없는 여자는 돈을 받구 해주는 거구.”(김용술 노인의 구술 중에서. 118쪽)

-<할배의 탄생> 기록자로서, ‘대한민국 꼰대 할배들은 어떻게 탄생된 것인지’ 답은 찾으셨습니까?

“시민단체들이 집회할 때, 마이크 소리 최대로 켜놓고 맞불집회하는 할배들을 꼰대라고 하는데, 난 애초부터 그런 시각에 의심이 좀 있었어요. 그렇게 통으로 노인세대를 규정할 건 아니지 않나? 그래서 통계로 잡히지 않은 개개인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어요. 이분들을 만나면서 제가 느낀 건 이래요. ‘이들은 자기의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보기보다는, 가진 자들, 배운 자들의 시선과 평가를 좇아서 그걸 자기정체성으로 내면화한다’는 점.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엔 자기 정체성을 독립적으로 가질 기회가 드물어요. 그래서 많이 배운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말을 모방해서 자기를 평가하고, 그 잣대로 세상을 보죠.”

-자기가 동일시하고 싶은 대상은 자기처럼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이라기보다는 더 많이 가진 사람, 많이 배운 사람이다?

“그렇죠.”

-‘내가 여건이 안 돼서 저 위치에 못 이르렀지만, 내 의식은 저들과 같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단 얘기군요. 그런데 동세대의 배운 사람, 가진 사람의 언술은 대개 극우보수 편향이다 보니….

“맞아요. 그래서 자기 계급을 배반하는 정치적 선택들, 자기허상화, 이런 현상이 나오는 거죠. 이분들 구술에도 나오는데, ‘진보, 너네는 너네 걱정이나 해라. 가난한 노인들 걱정한다고 노인 기초연금 20만원으로 늘려라 어째라 떠들지 말고’ 이렇게 말해요. 이게 우리 사회 보수 정치권이 하는 말이랑 똑같은 거죠. 정작 자기들은 그 돈이 아주 절실한 처지인데도….”

-책에서 ‘가부장제는 여성과 남성에게 모두 억압이자 상처’라고 쓰면서 특히 ‘가난한 남성에게 더 억압적’이라고 하셨어요. 가부장제가 남성에게 작용할 때 사회 경제적 지위에 따라서 달리 작용한단 뜻인가요?

“저는 부자 남성들도 가부장제로 인해서 억압받고 피해보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들은 가부장제하에서 실제로 ‘대빵’ 노릇을 할 수 있는 다른 권력이 있기 때문에, 가부장제로 인한 피해가 있더라도 자기가 누릴 권력이 더 많으니까 그냥 감수하고 가는 거죠. 반면에 가난한 남성은 가장으로서 경제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돈은 남자가 벌어야 하고, 남자는 신체도 정신도 섹스도 강해야 한다는 생각에 짓눌려 있어요.”

-‘돈과 체력과 섹스가 강해야 남자답다’는 강박관념!

“그렇죠. 그래서 여기 미달하면 자기가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깊은 상실감이나 자괴감에 빠져버려요. 경제적 능력이 안 되는 가난한 남성은, ‘남자다움’의 기준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거지요.”

“결혼도 못 했고, 돈도 없고, 고시원에서 살고, 평생 노가다나 했고, 그런 건 다 창피한 거잖아요. 누구도 제대로 된 사람으로 안 보지요. 최 선생이나 달리 생각하지, 백이면 백 다 비정상이고 뭔가 모질란 걸로 봐요….”(이영식 노인의 구술 중에서. 256쪽)

-이영식 노인은 왜소한 체구에 여자가 없다는 것이 남성으로서 더 큰 자격지심이 되는 거 같은데, 김용술 노인은 가난해도 꽤 자신감이 넘치는 걸로 보여요.

“제가 김용술 노인한테 이영식 노인 얘기를 했더니 ‘그 사람 나한테 좀 데리고 와, 내가 교육 좀 시킬게’ 하시더라고요.(웃음) 자기는, 다 안다 이거지. 자기도 이혼해서 혼자 사는 처지지만, 자신은 그래도 ‘잘한다’, 섹스에 자신 있다는 거예요. 무엇이 남성다움인가에 대한 왜곡된 기준인 거죠.”

호기심으로 경계를 넘다

-저도 인터뷰를 하는 사람이지만, 매번 쓸 때마다 어려워요. 인터뷰 쓰느라고 밤샘한다고 하면 제 주변에 있는 사람도 “녹취한 거 그냥 옮기면 되는데 왜 밤을 새워?” 그래요.(웃음) 특히 노인들의 얘기는 더 힘들죠. 두서없고 산만하고, 주어가 빠진 채로 같은 얘기 반복하기 십상인데, 쓰신 걸 보니 기록자가 구술자에게 충분히 감정이입을 해서 그분들 속을 다 읽어내고 있단 느낌이 들어요.

“감정이입이 필요할 때가 있죠. 이분들의 구술 내용을 독자에게 최대한 그대로 드러내주기 위해서 이 양반들한테 빙의를 하려고 노력을 해요. 그분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도 녹음기를 켜두고요. 혼자서 길을 걸을 때도, 폐휴지 줍는 노인은 이 길거리를 걷는 게 어떤 느낌일까, 생각하면서 혼자 녹음기 켜서 중얼거리며 다니기도 해요.”

-폐지 줍는 노인 입장이 돼서 혼잣말을 한다고요?

“최대한 빙의를 하려고 노력하고 같은 입장이 되어보려고 하죠.”

-사실 우리 사회에서 할배는 또 다른 혐오의 대상이 되었어요. 아무데서나 호령하고 막무가내로 뻔뻔하게 굴고. 연장자의 권위로 볼품없는 권력을 휘두르는 무뢰배가 될 때가 많아요. 전철에서 노약자석 양보 안 한다고 임신부랑 싸우기도 하고.(웃음)

“할배들이 그런 진상을 부리거나, 혹은 할머니들이 전철에서 마주 앉은 전혀 모르는 할머니들한테 ‘어디 갔다 오세요?’ 말 걸다가 딸 얘기, 사위 얘기 하는 거 보면, 전 일단 녹음기 눌러요. 전혀 걸러지지 않은 그분들의 생생한 이야기잖아요. 이쁘건 밉건 간에. 저 양반들이 왜 그러는지 좀 알고 싶은데, 그 자리에서 파악하긴 어렵더라도 최대한 잘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죠.”

-그 정도 관심을 기울인다는 건 애정 없인 불가능해요.

“그분들에 대한 저의 기본 입장은 ‘옹호’예요. 가난과 고난을 겪어왔다는 자체로 그분들은 내게 선생님이에요. 가난과 고난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선 난 그분들과 생각이 다르지만…. 그리고 궁금하잖아요.(웃음) 저 사람은 왜 이렇게 성질이 못됐을지, 저 여자분들은 왜 저렇게 떠드는지, 내 속의 가장 큰 동력은 호기심인지도 몰라요. 두려움과 호기심이 늘 같이 있는데, 호기심이 더 강해서 두려움을 넘어서 버리는 거죠. 경계를 넘는 것에 대해 겁을 덜 내는 편이랄까.”

진보정당운동에서 가난한 삶의 현장으로

최현숙이 노인들의 구술사를 집필하게 된 동기는 그의 범상치 않은 이력에서 출발한다. 1957년 전북 남원 출생. 덕성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하고 아이 둘을 키우며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30대 초반부터 사회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동네 성당에서 가난한 병자나 소년소녀가장을 돌보는 일을 하다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에 발을 디디게 되었고 2000년 이후로는 진보정당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2004년 47살의 나이에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을 하면서 이혼하고 2008년 4월 총선에서 서울 종로에 진보신당 후보로 출마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참혹한 실패였지만, 성소수자의 존재를 정치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

-진보정당 운동에서 독거노인을 돌보는 일로 방향을 튼 계기가 있습니까?

“2008년 즈음해서부터 진보정치들이 궤멸하기 시작했어요. 정치노선 차이로 인한 내부갈등도 심해지고. 내가 그때 52살이었는데, 내 조건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두리번거리다가 요양보호사를 선택하게 됐지요. 2008년에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생기면서 ‘돌봄노동의 사회화’가 중요한 토픽으로 떠오를 때였거든요.”

그때부터 공부해서 요양보호사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고 2013년부터는 독거노인생활관리사로 자리를 옮겨서 지금은 서울 마포 대흥동 일대 노인들을 담당하고 있다. 가난한 독거노인들에게 주 2회 전화, 주 1회 방문, 후원물품 전달 같은 일을 한다. 하루 5시간 일하고 최저시급을 받아 월 78만원 정도의 봉급을 받는다.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선생님은 좌파에, 커밍아웃한 성소수자에, 이혼녀에, 가난한 독거여성이세요.

“(깔깔 웃으며) 네, 맞아요.”

-이단아 중의 이단아, 소수자 중의 소수자란 말씀이죠. 근데 놀라운 건 이 모든 걸 선생님이 스스로 선택하셨단 점이에요. 왜죠?

“글쎄, 호기심 때문인가?(웃음) 하여간 그게 ‘맛’있어요. 살맛을 거기서 느끼는 거죠. 안정된 삶은 왠지 재미없고 사람을 나태하게 만든다고 느껴져서.”

노인구술사를 통해 돌아본 내 삶의 치부들

-필자 소개에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우테 에어하르트(독일 심리학자)의 말을 인용해 놓았던데, 스스로 나쁜 여자라고 자처하시는 건가요?

“우리 사회가 좋은 여자, 나쁜 여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언제나 ‘정상 이데올로기’예요.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가르는…. 난 아주 어릴 때부터 거기에 큰 저항을 느꼈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교사 출신으로 굉장히 가부장적인 분이었는데, 내가 요조숙녀가 되기를 바라셨죠. 서울로 이사오면서부터 아버지가 일자리를 잃고 엄마가 돈놀이, 집장사, 미제물건 장사 가리지 않고 돈을 벌면서 아버지의 콤플렉스가 심해졌어요. 그게 폭력으로 나타났는데, 아버지의 폭력을 겪으면서도 나는 그걸 ‘맞았다’고 하지 않고 ‘싸웠다’고 기억하고 있어요. 바득바득 이를 갈고 노려보면서 맞을 거 다 맞았으니까 아버지가 보시기에도 얼마나 미웠겠어요.(웃음)”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더불어, 사춘기 무렵부터 시작된 액취증은 최현숙의 성장에 끔찍한 상처를 남겼다. 활달하고 똑똑하던 여학생은 스스로 사람을 피하기 시작했고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꼭두새벽에 첫 버스를 타고 나가 한겨울에도 창문을 열고 다닐 만큼 대인기피증이 심했다.

* 사진 하단에 기사 이어집니다.

-그 정도로 콤플렉스가 심각했다면, 수술을 할 수도 있지 않았나요?

“아버지가 여자 몸에 칼 대면 안 된다고 막았어요.(웃음) 10대 초반부터 내 인생은 거대한 혼돈과 수렁이었지요. 아버지를 배반한다는 건 단순히 아버지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질서나 권위, 규범에 대해 저항한다는 의미였어요. 액취증 경험은 그때까지 별 관심이 없었던 모든 버려진 것들, 길가의 쓰레기들, 독버섯도 다른 시선으로 보게 했어요. 나 같은 존재라고 동일시하면서. 깊은 수치심과 결핍감 때문에 대학 때까지도 도벽이 있었어요. 당시엔 그런 나를 나 자신이 도무지 해석할 수가 없는 거예요. 도대체 나는 어떤 인간인가!”

-이런 얘기 써도 되는 거예요?

“쓰셔도 돼요. 이런 상처나 혼돈, 시행착오가 나의 내면을 추적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니까. 아버지의 폭력을 경험하면서 내 안에 내재된 폭력성은 나한테도 문제였어요. 제가 자녀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폭력을 썼고 나중에 알았지만 그게 아이들에게 큰 상처로 남았거든요. 큰아들은 지금 그 문제로 나를 안 보고 있어요. 내가 커밍아웃하고 집을 나왔을 때도 ‘자식 때문에 억지로 살 필요는 없다’고 말해줬던 아이인데…. 내가 이혼청구 사유를 남편의 폭력이라고 소장에 쓴 걸 보곤 마음이 돌아섰대요. 아이한텐 엄마가 굉장히 위선적으로 보였겠죠. 자기한테 폭력을 행사한 엄마가 폭력을 이유로 이혼하겠다고 하니….”

그는 아들 얘기를 하면서 여러 번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오히려 당황한 쪽은 나였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자신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객관화할 수 있을까? 노인들을 인터뷰할 때처럼 자신에게 묻고 자신이 답하는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해왔음이 분명했다.

-노인들의 구술 작업을 하면서 선생님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많았나 봐요.

“구술생애사 작업을 하면서 계속 나 자신에 대해서 메모를 했어요. 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최대한 집중해서 나를 해부하고 나 자신에게 해명하고 싶어요. 누구나 살면서 숱한 시행착오와 오류를 남기는데, 그런 자기 삶을 스스로 어떻게 해석하고 규정하느냐, 그게 남은 삶을 사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폭력 피해나 가해의 기억은 나한테 굉장히 치명적인 걸림돌이지만 이걸 잘 해석하고 정리하면 삶의 에너지를 끌어내는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고 믿어요.”

가난한 독거노인들을 만나면서, 최현숙은 자신의 상처와 오류를 직시할 용기와 성찰의 지혜를 얻은 듯했다. 진보의 걸림돌은 대한민국 할배가 아니라 성찰 없는 나이듦이다.

녹취 심지연

▶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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