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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최순실'에 대한 모든 것(사진 6)

[토요판] 커버스토리

대학생 최순실

한국 사회 전체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만든 최순실이 19~20일 검찰에 기소됩니다. 최순실의 기소는 그와 ‘이익동맹’을 구축해 40년을 가꿔온 박근혜 대통령의 범죄 사실 규명과도 직결됩니다. 대학 시절 최순실은 대통령의 딸 박근혜와 협업하며 아버지 최태민의 사업을 전국·전사회 단위로 키웠습니다. 그 일을 지원한 유신정권에 최순실은 ‘영구집권을 위한 정신개조’ 운동을 이끌며 보답했습니다. 대학생 최순실이 ‘공부할 틈도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뿌린 씨앗이 40년 뒤 ‘국정농단 사태’로 수확되고 있습니다.

한 여학생이 대학교 잔디밭에 앉아 책 읽는 ‘자세’를 취했다.

“바쁜 일과 속에서도 틈틈이 책을 보며 미래의 유능한 영문학자가 되기 위하여 열심히 자신의 실력을 닦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이지적이다.”(1979년 9월23일 주간 <새시대>)

그의 자세를 카메라가 왼쪽 옆에서 담았다.

“조국의 맥박, 민족의 등불, 사회의 밑거름으로서 새마음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정진하고 있는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 전국 각 시·도 연합회 및 168개 대학의 새마음회 임원들은 올해 ‘새마음갖기 운동 학생의 해’를 맞아 충·효·예를 생활화하고자 오늘도 뛰고 있다.”

여학생이 ‘연출’을 바꿨다. 남학생들이 투입돼 잔디밭에 기대거나 앉았다.

“이 거대한 단체를 이끌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여성. 바로 최순실 회장이다. 잠시 동안이라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최양의 온몸이 새마음으로 뭉쳐 있음을 느끼게 된다.”

활짝 웃는 그의 옆에서 남학생들이 풍경으로 찍혔다. 최순실 회장이 말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젊은 지성인들로서 나라를 위해 뭉칠 수 있게 된 것은 정말로 보람된 일입니다. 처음 각 학교마다 새마음회를 조직하려 했을 때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는 등 고충이 많았지요.”

그의 ‘소박한 바람’이 문장에 실려 배포됐다.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최양은 친구들과도 마음껏 어울리고 공부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자신의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책 읽는 자세가 ‘이지적인’ 그가 책 읽을 틈도 없이 바쁜 이유가 있었다.

“온몸이 새마음으로 뭉친 여성”

박근혜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님이 입장하시었다. 젊은 학생들의 폭발적인 박수소리가 망망대해의 물기둥처럼 용솟음쳤다.(월간 <새마음> 1978년 12월호)

1978년 11월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역사적인 ‘전국 새마음 중·고·대학생 총연합회’ 발대식이 열렸다. 그동안 지역별로 출범한 새마음 학생 조직들의 합동 발대식은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보지 못한 새 역사의 창조였다. 각 시·도에서 일어난 파도가 수도 서울 종로로 한데 모여 민족 1만년의 큰 물줄기로 굽이쳐 도도히 흘렀다. 학생 대표 600여명의 밝고 맑은 눈빛이 기라성처럼 빛났다. 은빛 깃봉들이 새마음 깃발들을 나부끼며 눈부시게 반짝였다. 총재님이 격려사를 하시었다.

“오늘 우리의 모임은 사회를 새마음의 기풍으로 가득 채우려는 새 각오가 창조되는 순간이며, 이러한 창조가 하나하나 모여서 바로 햇빛이 어두움을 몰아내듯 사회가 나날이 밝아질 것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새로운 긍지와 사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새마음> 1979년 1월호)

총재님의 너무나도 절실한 명언에 대회장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밝은 우리나라의 내일은 바로 학생 여러분이 얼마나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새마음갖기 운동을 이끌어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전국 학생 대원들은 눈시울이 뜨거워 오는 감동을 느꼈다. 전국 중·고·대학생 총연합회의 대표 학생은 결의 선서를 통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학생으로서 해야 할 면학 분위기 조성에 매진할 마음을 굳혔다. 전날 반도유스호스텔(서울 강남) 합숙소에서 최순실 회장(단국대 4학년)은 학생들 중 가장 먼저 맹세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보람을 느낍니다. 전국의 학생 조직과 총화로써 이룩되는(전국의 학생을 조직하고 총화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학원의 면학 분위기를 조성해 학생 본분을 찾아 타의 모범이 되겠습니다. 우리의 목적 사업에 정열을 바치겠습니다.”(<새마음> 1978년 12월호)

오싹한 겨울 날씨가 마치 새봄에 새싹을 틔우는 춘풍을 맞는 것 같았다. 대표단의 도도하고 늠름한 모습은 충·효·예를 실천하는 거울과도 같았다. 그들의 씩씩하고 용맹스런 기염은 흡사 국가의 체온과도 같았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 영원히 빛날 발대식이었다.

“두 해 동안 새마음의 생활화를 위해 뛰어다닌 나날 속에 어느덧 신념과 긍지가 자리 잡혀 가고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는 내 마음은 박 총재님의 격려사를 통해서 더욱 굳굳하고(꿋꿋하고) 의욕적으로 삶을 전개시킬 수 있었습니다.”(<새마음> 1979년 1월호 최순실 기고글 ‘우리 함께 뭉치자 일하자 믿자’)

최순실 회장은 새해 각오도 글로 써 밝혔다.

“1979년에는 모든 학생들의 마음에 새마음의 밝고, 맑고, 곱고, 깨끗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릴 것을 믿으며 국가의 앞날과 자신의 개척을 위해 노력하는 슬기로운 새마음회의 학생이 될 것을 다짐하는 바입니다.”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는 1977년 2월24일 창립했다. 최순실 아버지 최태민의 ‘사업’에서 파생했다. 1975년 4월 최태민은 대통령의 딸 박근혜의 도움으로 대한구국선교단을 창립했다. 1년 뒤 구국여성봉사단(1979년 5월 새마음봉사단으로 확대·개편)이 대한구국선교단 부설로 창단됐다. 새마음봉사단은 전국 시·도에 지단·지부를 뒀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직장 조직을 세웠다. 전국 주요 공단에도 파고들었고, 노동계·종교계까지 가지를 뻗었다. 할머니봉사대도 결성됐다. 지역별·연령별·학교별·산업별·기업별·종교별 조직을 갖추며 급속히 세를 불렸다. “‘월남 사태’를 보고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하겠다는 구국십자군의 창설(1975년 6월 구국선교단 산하)로부터 시작된 애국 일념은 구국여성봉사단에서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되기까지 오로지 멸공구국 총력안보”(<새마음> 1980년 4월호)를 앞세워 확장했다.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는 구국여성봉사단(1978년 2월 박근혜 총재 취임) 시절부터 새마음봉사단과 사무실(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775)을 같이 썼다. 최순실은 공부하는 학생이기보다 대를 이은 사업가였다. 최고 정치권력과 협업하며 아버지의 ‘비즈니스’를 학생 사회로 끌어들여 전국화했다. 아버지는 애국-반공-종교를 묶어 팔았고, 딸은 면학-충·효·예-사회정화를 버무려 매상을 올렸다. 판은 현직 대통령의 딸이자 미래의 대통령이 키웠다.

사회정화와 정신개조에 앞장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 회원들은 한국 사회의 정화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한국의 국운을 짊어지고 나갈 막중한 책임도 지고 있다. 나라의 소명에 열과 성을 다해 그들은 구국의 대열에 섰다. 밝고 명랑한 학원 분위기에서 면학에 힘써 새 역사 창조의 주역이 될 능력을 갈고닦는다.(1978년 <새마음> 창간호)

“우리 대학생들이 나라와 부모를 생각하며 우리의 책임을 다할 때 후배인 중고생들도 본받으리라 믿으며 더욱 충실히 하려고 노력해요.”

최순실 부회장(<새마음>에서 확인되는 첫번째 직함)은 강조했다. <새마음> 창간 축하자 명단에서 그는 ‘회장 직무대리’로 친필 서명했다. 연합회 회원들은 새마음 정신으로 미래를 새롭게 할 의욕으로 가득 차 있다. 1978년 7월17일 아침 회원들이 전세버스 앞에 모여 선서했다.

“나의 희생과 봉사로써 나라를 사랑하고 실천적인 사회정화 사업에 앞장선다.”(<새마음> 1978년 8월호)

최순실 회장 직무대리가 조직한 제2차 하계봉사대가 버스 4대에 나눠 탔다. 선발대 70명이 충북 단양을 향해 힘찬 진군을 시작했다. 마을에 도착한 회원들은 중대 본부를 설치했다. 중대 단위로 배치(근로반·위생반·청년반·아동반·부녀반)돼 도로 바닥을 수리하고 길가 잡초를 뽑았다. 식생활과 가족계획을 위한 계몽도 실시했다. 채 걷히지 않은 장마로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데도 회원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자’는 젊은 의욕을 불태웠다. 새마음 정신을 심으려는 대학생들의 뜻을 격려하기 위해 나흘째 날(7월20일) 구국여성봉사단 임직원들이 현장을 방문했다. 박근혜 총재님의 하사품을 내놓아 회원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회원들은 총재님이 제작한 충·효·예 교육 슬라이드를 마을을 돌며 상영했다.

새마음을 내세운 최순실이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뛰어다닐 때 전국 대학은 면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국 중·고·대학생 총연합회 발대식 5개월 전(7월6일)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민의를 배제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1972년 10월 유신에 따른 선거제도 개악)였다. 5월8일 서울대 학생 2천여명이 학교에서 시위했다. 이튿날 이화여대 학생 1천여명이 학교 밖으로 나가 집회를 열다 교수·학생 18명이 경찰에 잡혀갔다. 일주일 뒤 한신대학생 100여명이 ‘5·16 민주선언문’을 낭독한 뒤 연행(10명)됐다. 6월26일 서울대·고려대·이대생 등 700여명이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가두시위(17명 연행)를 벌였다.

새마음운동의 당면 과제는 박정희 독재를 향한 학생들의 비판의식을 빼앗는 일이었다. 최태민 일가에게 ‘돈벌이’였던 새마음운동은 박정희 정권엔 ‘체제 안정을 위한 정치기획’이었다. 새마음은 “충·효·예를 바탕으로 한 밝은 마음, 맑은 마음, 고운 마음, 깨끗한 마음”(<새마음> 창간호)으로 정의됐다.

밝은 마음: 온 세계를 밝혀 주는 태양 같은 마음.

맑은 마음: 오대양과 같이 넓고 깊은 마음.

고운 마음: 우리나라의 금수강산과 같은 마음.

깨끗한 마음: 밝고, 맑고, 고운 마음이 가슴속에 뿌리내릴 때 비로소 갖게 되는 성스러운 마음.

이 이해불가의 개념을 박근혜 총재는 연설 때마다 ‘충·효·예’로 요약했다. “충·효·예를 실천하면 우리 마음은 결국 밝고, 맑고, 곱고, 깨끗한 마음으로 순화된다.” 그는 “하늘을 감동시키는 유일한 힘”이라며 특히 ‘충’을 강조했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나라 전체를 하나의 대가족으로 재편하려고 했다. 온 국민을 ‘아버지 박정희-어머니 육영수’를 받드는 유교질서(‘한국적 민주주의’) 아래 줄 세우고 싶어 했다. 새마음으로 포장된 충·효·예는 영구집권을 꿈꾸는 박정희 정권의 ‘체제 내면화 이념’이었다. “무질서와 가난을 틈타 병균같이 침식해 들어오는 공산당과 같이” 마음에 파고드는 “허점”을 차단(1978년 10월6일 경북 새마음중고등학생연합회 발대식 격려사)하는 ‘정신개조’였다. 그 ‘유신 의식화’의 최선두에 최순실(1978년 하반기부터 ‘회장’으로 활동)이 있었다.

새마음 요원들 지휘·통솔

“우리 새마음회 임원들이 우선 구체적이고 확실한 정신교육을 받아야만 되겠다고 생각해요.”(<새마음> 1979년 1월호)

1978년 9월13일 새마음봉사대원 방담회에서 최순실 회장이 제안(이튿날 고대생 3천여명은 ‘78민중선언’ 유인물을 배포하며 경찰과 대치하다 4명 연행)했다. 새마음봉사단 간부 155명은 석 달 뒤 인천시 주안동에 위치한 ‘정신의 도장’으로 달려갔다. ‘지덕을 겸비한 새마음 역군’의 산실인 새마음교육원에 자진 입소(1978년 12월20~22일 제1기 새마음 요원 양성교육)했다. 새마음 요원으로서 지성과 품위를 갖추고 나라에 충성하는 데 솔선수범해 생존과 번영을 위한 국력을 키워나가겠다는 뜻이었다.

입소하자마자 연수자들은 번호를 지정받고 반 편성이 됐다. 반장으로 선출된 사람은 반장 완장을 찼다. 최순실이 1기 연수자들의 기장이 돼 반장들을 지휘·통솔했다. 입소자들은 정신무장을 철저히 해서 나가겠다는 결의로 긴장했다.

첫날 강의 3교시는 충·효·예 슬라이드 상영으로 진행됐다. 너무도 심금을 울리는 진리에 크게 감명받았다. 즐거운 저녁식사가 끝난 뒤 방마다 명랑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저녁 8시엔 반공안보와 국가발전을 주제로 영화 상영이 있었다.

이튿날은 2㎞ 구보로 하루를 시작했다. 1교시엔 ‘박 총재님 격려사’ 발췌본을 교재로 충에 대한 강의를 들었고, 2교시엔 충에 대한 개념에 완전을 기하도록 복습했으며, 3교시엔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충에 대한 강연을 실습했다.

학교 졸업식장처럼 수료식장엔 아쉬움과 엄숙함이 감돌았다. 최순실 회장이 대표로 수료증을 받았다. 교육원을 나서는 연수자들은 아쉬운 듯 자꾸자꾸 고개를 뒤로 돌렸다. 가슴 가득 사명감을 안고 ‘신천지’를 향해 꿋꿋한 발걸음을 내딛는 개척자처럼 버스는 힘차게 달려갔다.

수료식 닷새 뒤 박정희가 다섯번째(5~9대)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다. ‘유신 신민화’를 목표로 새마음운동이 공략한 핵심 과녁은 학교였다. 자라나는 세대를 겨눈 정신교육은 사고의 뿌리를 장악하는 확실한 투자였다.

최순실의 대학생 조직은 새마음운동의 척후이자 척추였다. 학생 조직 중 가장 선도적으로 구축됐고, 그의 조직을 중심으로 초중고로 옮겨가며 살이 붙었다.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는 1978년 새마음갖기 결의 실천대회를 조직 확충의 전환점으로 삼았다. 실천대회엔 전국 100여 대학이 참가했다. 1979년 9월 새마음운동에 편입된 대학은 168개로 늘어났다.

대학생연합회 창립 1년 뒤부터 중고등학생 조직이 전국에서 잇달아 출범했다. 박근혜는 발대식마다 참석해 ‘격려’했다. 최순실도 자주 그 자리에 있었다. 1978년 10월31일 충남 새마음중고등학생연합회 발대식(대전시 충무체육관) 뒤 박근혜가 최순실에게 당부했다.

“모임이 없으면 힘이 흩어지게 마련이지만 힘을 모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만큼 도서나 벽지 등 지역 사회를 위해 많은 봉사활동을 하면서 이 운동에 앞장서주기 바란다.”(<새마음> 1978년 11월호)

유신의 붕괴가 가까워올수록 새마음운동도 규모를 키웠다. 1979년은 ‘새마음갖기 운동 학생의 해’로 지정됐다. 문교부가 정부 차원의 행정 지원에 앞장섰다.

문교부 차관과 고위관료들(장학실장·학술진흥국장), 교육감, 교육장 등이 ‘전국 시도·시군 새마음 초중고 총연합회’의 지도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각급 학교의 어린이회나 학생회·학도호국단 임원들이 새마음회 임원을 겸직하도록 해 조직을 일원화했다. 전국 초중고 33개 학교가 새마음갖기 시범학교로 지정됐다. ‘전국 새마음 중·고·대학생 총연합회’ 발대식도 문교부가 후원했다. 초등학교로까지 운동 대상이 확대됐다. 유치원 교사·직원들 대상의 별도 조직도 꾸렸다.

“학교가 교육에 의한 인간의 변화를 통하여 사회 개조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볼 때… 하루 일과가 끝난 후 20분간의 새마음협의회를 갖는데… 어린이들의 일기나 혹은 학부모의 편지에서 추출된 새마음 실천 사례를 발표시켜….”(서울 홍파국민학교 교장의 <새마음> 1979년 4월호 기고)

박근혜는 새마음 전파를 독려하면서도 어린이날 격려사에선 “어린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악용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진실로 마음을 한데 모아 어린이를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불량식품(대통령 취임 뒤 추방해야 할 4대 악으로 선정), 불량학용품 등을 이 사회에서 완전히 몰아내야 하며….”

“충·효·예 집념의 24시”

1979년 2월9일 새마음갖기 국민운동본부는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물가 안정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대회가 끝난 뒤 박근혜 총재님은 내빈과 전국 중·고·대학생 총연합회 임원 등 200여명을 일일이 접견하시었다. 신념과 의지에 넘친 질문들에 답변하시며 서로 믿고 뭉쳐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자고 말씀하시었다. ‘물가안정 범국민대회’ 휘장을 두른 총연합회 임원들이 ‘돈 있다고 마구 사면 나라경제 좀 먹는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명동 거리에서 가두캠페인을 벌였다. 결의문도 낭독했다.

“우리는… 국민 경제질서를 문란시키는 행위를 일체 지양하고… 사명을 다하는 실천의 선도자가 될 것을 모두가 결의하여 삼가 대통령 각하께 올립니다.”(<새마음> 1979년 2월호)

박근혜 총재가 찾는 주요 행사마다 최순실 회장이 참석했다. 바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가 시간이란 있을 수도 없었고, 자연히 친구들과도 소원해져버렸어요.”

최순실이 주간 <새시대>에 설명했다. 새마음운동의 학생 대표로서 공부할 시간도 여가 시간도 없는 그를 새마음봉사단 기관지 <새시대>가 단독 조명(‘충·효·예 집념 속의 24시-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 최순실 회장’)했다.

“대신 전국 각지에서 좋은 일을 하고 있는 많은 친구를 얻게 되었다며 최양은 활짝 웃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나폴레옹의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로 자신을 다스린다는 최양은 1남4녀 중 넷째(아내가 많았던 아버지 최태민과 친모 사이의 관계에서만)다. 집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중재는 혼자 다 맡고 있는 원만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 사진 하단에 기사 이어집니다.

<새시대>는 최순실과 동행하며 그의 활동들을 사진과 글로 담아냈다.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 임원들과 알차고 보람 있는 행사 계획을 세우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는” 사진들이 잡지로 소개됐다.

“많은 행사를 주관하랴, 각 대학의 새마음회 활동을 의논하랴, 새마음학교 및 새마음 기능학교를 보살피랴, 자신의 일은 제쳐놓을 수밖에 없다는 게 최양의 이야기다.”

최순실이 미래 희망을 밝혔다.

“열심히 공부하여 영문학자가 되는 것.”

다짐도 남겼다.

“회장직을 그만둔 뒤에도 조용히 봉사활동을 펴겠어요.”

잡지 발행(1979년 9월23일) 12일 전 서울대생 800여명이 유신헌법 철회를 요구하다 11명이 사복경찰에게 연행됐다. 33일 전엔 와이에이치(YH)사건(가발수출업체 YH무역 노동자들이 회사 폐업에 항의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경찰에 강제해산)으로 김경숙이 추락사했다. 잡지 발행 23일 뒤엔 부마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최순실이 기사를 읽은 지 33일 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파국’ 직전 찍은 새마음운동 리더로서의 마지막 사진엔 지금까지 포착된 그의 가장 환한 웃음이 담겨 있다.

“이념에 살고 대의에 죽자.”

“굳게 뭉쳐 호국하자.”

아버지의 죽음 5개월 뒤 박근혜가 참석한 새마음봉사단 유관 단체장 친목회(1980년 4월9일)에서 ‘결의 구호’가 터져 나왔다. 최필녀(최순실의 개명 전 이름이란 보도가 있었으나 사진으로도 확인되는 전혀 다른 인물) 새마음봉사단 사무총장이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노력하자”며 각오를 다졌다.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 회장의 대표 선서 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우리는 구국의 역군으로서 오늘의 난국 타개에 기수가 되어 국가 사회안정에 전력한다. 우리는 멸공의 투사로서 안보를 최우선하여 유사시에는 전투요원의 사명을 다한다.”(<새마음> 1980년 4월호)

선서에 나선 회장은 최순실이 아니었다. 한 달 전 대학생연합회는 임원진을 개편했다. 새 임원진 명단에서 최순실은 ‘명예회장’으로 표기됐다.

최순실은 영문학자의 꿈을 따르지 않았다. 조용하게 살지도 않았다. 그는 1975년 단국대학교 영문과에 ‘청강생’으로 입학했다. 1979년 수료했으나 졸업장은 주어지지 않았다. 잡지에 표기된 ‘단국대 대학원 영문학과’도 연구과정(비학위과정)이었다. 단국대 대학원 학적부엔 ‘1981년 수료’로 기록돼 있으나 정말인지는 알 수 없다(대학 관계자 “기록만 확인될 뿐 사실 여부는 확인은 불가능”). 그는 박정희 사망 뒤 독일로 유학해 1985년에 돌아왔다고 매체 인터뷰(1980년대 후반 육영재단 개입 논란 해명)에서 밝혔다. 유아교육학 학사·석사·박사 학위는 미국 퍼시픽스테이츠대학에서 1981년 2월, 1985년 2월, 1987년 2월 받은 것으로 이력(한국연구자정보 시스템)에 썼다. 해당 대학엔 해당 학과가 없다. ‘육영재단에서 빼돌린 재산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의혹 반박 소송(2007년) 땐 1979년부터 2년간 강남 압구정동에서 패션 대리점을 운영했다고 밝혔다. 1982년부터는 강남 신사동에서 인테리어 가게를 열었다고도 했다. 1979년 10·26 이후 공식 기록에서 사라진 최순실이 박근혜와 재회했다고 밝힌 1985년까지 그의 행적을 알려진 정보로는 알 수 없다. 스스로 밝힌 모든 정보와 정보가 서로를 배반하고 있다.

40여년 전부터 박근혜-최순실은 ‘이익공동체’였다. 유신정권 지탱과 ‘가업’ 확장을 위해 상대를 이용했다. 정부 조직과 민간(재계·언론·학자·문인 등) 자원이 그들을 위해 총동원됐다. 그 메커니즘이 기시감을 부르며 지금 되풀이되고 있다.

새마음을 앞장서 주창한 두 사람이 40여년 뒤 새마음의 허구를 앞장서 드러내고 있다. 1979년 2월27일 ‘현대그룹 새마음갖기 결의 실천대회’에서 박근혜 총재는 대통령이 된 자신에게 되돌려져야 할 한마디를 던졌다.

“끊어진 전구를 바라보며 왜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나 하고 기다릴 사람은 없습니다. 전구를 새것으로 갈기 전에는 절대로 불이 들어올 수 없음을 상식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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