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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음악가들에게 배우는 '돈을 불리는 방법' 4가지

몇 년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배우 윤여정씨는 배우가 가장 연기를 잘 하는 순간은 '돈이 없을 때'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지나치게 솔직했기에 뒤에서 안 좋은 말도 들었다는 얘기를 훗날 덧붙이긴 했지만, 창작 활동 또한 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낸 인상 깊은 발언이었다. 우리가 즐겨 듣는 클래식 음악의 위대한 작곡가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돈 때문에 원치 않는 '밥벌이'를 찾아 나서기도 했고,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위대한 작품의 창작 욕구를 불태우기도 했다. 그들이 돈을 불리기 위해 덤벼들었던 몇 가지 방법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음악 창작과 돈의 관계, 그 속으로 들어가보자.

1. 함부로 우직하게 - 바흐

"...바흐는 크게 세 개의 직장을 전전했다...마지막 직장이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였고, 그는 그곳에서 28년 동안 악장으로 봉직했다...바흐는 이곳에서 눈이 멀 정도로 쉴 틈도 없이 일을 했다. 매주 일요일마다 신작 칸타타를 한 편씩 발표해야 했다. 보통 칸타타의 연주 시간은 30분 내외이므로 요즘으로 말하자면 매주 한 장씩 신작 앨범을 발표한 셈이다. 여기에 행정 업무에, 교육까지 모두 그의 일이었다...그런 어마어마하게 과중한 업무 속에서 그는 작품들을 써낸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누구나 나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나만큼 쓸 수 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책 '전복과 반전의 순간', 강헌 저)

돈을 불리는 정석적인 방법은, 그저 소처럼 우직하게, 죽어라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다. 가장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을 것 같은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이 법칙은 예외가 아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흐라고 할 수 있다. 주마다 음반 한 장 분량의 곡을 쓰며 '월간 윤종신' 정도는 가볍게 찜 쪄먹는 '주간 바흐'를 발행하던 그는, 거기에 더해 행정 업무와 음악, 라틴어 교육 업무까지 담당해야 했다. 무려 28년 동안 말이다. 이렇게 그가 '황소처럼' 일을 했던 배경엔 의외로 평범한 이유가 있었다. '먹여 살려야 하는 처자식'들이 지나치게 많았다. 바흐는 평생 결혼을 두 번 했는데,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낳은 자식이 일곱 명이었고, 두 번째 부인에게서 낳은 자식은 또 열세 명이었다. 도합 스무 명의 자식을 혼자서 먹여 살려야 했다(바흐는 '음악의 아버지'이면서 동시에게 많은 자식들의 아버지였다.). 위대한 작곡가가 가졌던 '영감의 원천'은 다름아닌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었다.

2. 철저한 가계부 정리 - 베토벤

"...베토벤의 유품 가운데는 구두쇠로서의 생활이 알알이 적힌 가계부가 있다. '스승 하이든과 함께 마신 커피 6크로이체르, 초콜릿 22크로이체르' 따위의 지극히 사소한 지출까지 그대로 기록하고, 수시로 계산한 가계부다. 우스운 것은 천재 음악가 베토벤의 터무니없이 서투른 산수 실력이다. 간단한 두 자리 숫자의 곱셈이나 덧셈에도 서툴렀던 베토벤은 일쑤 틀린 값을 적곤 했다." (책 '베토벤의 가계부', 고규홍 저)

바흐와 달리 베토벤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갔다. 그렇지만 그가 바흐에 비해 돈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더욱 철저하게 돈을 벌고 불리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그가 귀족 전속 작곡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는 '독립 음악인'의 길을 걷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했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 해도 생활비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베토벤은 지독한 구두쇠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가계부 정리는 구두쇠로 살기 위한 중요한 방법 중 하나였는데, 단 한 푼이라도 쓴 건 모두 기록해 놓았다고 한다. 심지어 일기에 적어 놓은 메모 중엔 '새로 온 하녀가 너무 많이 먹어서' 해고했다는 대목도 있다고 하니(책 '전복과 반전의 순간', 강헌 저), 피고용자 입장에서 보면 참 치사하기 짝이 없는 고용주였던 셈이다. 그래도 철저한 절약 정신은 그가 독립된 예술가로 살아가는 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예술가든 누구든, 자유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3. 돈도 실력 - 멘델스존

"...네 살 때부터 부유한 가문에서 교양 높은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멘델스존은 마치 아름다운 동화 속에 고결한 성품을 갖추고 등장하는 왕자 같았다. 집안의 재산은 늘 풍족했고, 가문의 꽃인 멘델스존에 대한 경제적 후원은 끊이지 않았다.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그는 궁핍의 비참을 체험하지 않았다. 넉넉한 환경과 지극히 문화적인 만남이 보장된 멘델스존의 성장 환경은 많은 음악가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책 '베토벤의 가계부', 고규홍 저)

음악가는 모두 돈에 대한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그렇지 않다. 금수저로 태어나 평생 돈 걱정 없이 작업에만 열중할 수 있었던 멘델스존도 있었다. 돈만 풍족한 것이 아니었다. 철학가 할아버지와 문화적 식견이 높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미학적 재능도 상당했다. 집안의 지원도 전폭적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작곡을 돕기 위해 아예 오케스트라를 따로 만들어 선물해 주었을 정도였다. 이런 조건들 덕분에 멘델스존은 현실에 대한 고민 없이 민간 전설, 동화 등에서 영감을 얻은 신비롭고 꿈꾸는 듯한 음악들을 마음껏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음악 자체에 대한 학구적인 연구를 통해 음악의 아버지 바흐를 재발견해낸 것도 멘델스존의 공이었다. 이쯤 되면, 정말 '돈도 실력'이라고 했던 한 승마선수의 발언이 와 닿지 않는가?

4. 닥쳐야 번다 - 슈베르트

"...이렇듯 수입은 분명히 늘어났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보헤미안적, 즉흥적 기질이 그의 생계 형편을 나아지게 하지 않았다. 그는 고액의 저작료를 받는 날이면, 친구들과 화려한 만찬을 벌여 하룻밤에 적잖은 돈을 모두 써버렸다. 그리고는 돈이 떨어져 오선지를 살 돈이 없는 지경에 처해 친구의 도움을 구하곤 했다...가난은 그의 낭만적 음악을 키우는 데 떨어져서는 안 될 동전의 양면과 같은 필연으로 31년의 짧은 삶을 지배했다." (책 '베토벤의 가계부', 고규홍 저)

'배우가 가장 연기를 잘 하는 순간은 돈이 없을 때'라고 말했던 배우 윤여정씨의 말을 작곡가에게 대입시킨다면, 슈베르트가 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낭비벽이 심했고, 개념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돈을 썼다. 그렇지만 이런 생활 패턴이 다작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피아노 한 대도 살 수 없는 가난 속에서 슈베르트는 엄청난 집중력으로 한나절에 한 곡을 쓰는 초인적인 생산력을 선보인다. 특히 매독에 걸려 죽어갔던 마지막 3년의 기간 동안,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며 더욱 작업에 매진해 대표작들을 쏟아낸다. ‘현악 4중주 G장조’, ‘피아노 소나타 G장조’, ‘겨울 나그네’ 등이 이 때의 작품이다. 겨우 31살에 죽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양질의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지속적으로 괴롭혔던 가난과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이들은 슈베르트를 집중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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